추사 김정희의 차에 대한 깊이가 더해진 건 제주 유배 시절이다. 척박한 유배지는 견디기 쉬운 환경이 아니었기에 울분을 차로 달랬다. 그림은 제주 유배 시절 남긴 걸작 ‘세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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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박제가(朴齊家·1750~1805)와 사제의 의를 맺은 것은 시대적 흐름이었다. 북학에 대한 관심은 시대의 흐름을 파악했던 그다운 선택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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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품은 과연 승설의 향기로운 여향이 쌍비관에서 맛본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차를 조선으로 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다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영남 사람이 지리산 산승에게 얻은 것인데 산승 또한 개미같이 어린 차 싹을 금탑에서 모아 만든다 하니 실제로 많이 얻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내년 봄에 다시 차를 청한다 해도 산승은 모두 깊이 감출 것이니 (이는) 차세를 내라는 관리가 두려워 쉽게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남 사람과 산승이 좋아하고 숭상하니 (차를 구하는 일을) 도모해볼 만합니다. 그 사람이 내 글씨를 매우 좋아하니 이리저리 하면 서로 기쁘게 바꾼다고 말한 겁니다(茶品果是勝雪之餘馥賸香 曾於雙碑館中見 如此者 東來四十年 再未見之 嶺南人得之於智異山山僧 山僧亦如蟻聚金塔 實難多得 又要明春再乞 僧 皆深秘 畏官不易 然 其人與僧好尙 可圖之 其人深愛拙書 有轉轉兑換之道耳)”
‘여권이재돈인(與權彛齋敦仁)’ 『완당전집』권3
추사는 권돈인에게 만허의 차를 구해 달라고 청한다. 당시 추사와 만허는 서로 교유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만허의 차를 얻어 추사에게 준 영남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추사 글씨를 좋아했던 인물인 듯하다. 하여간 추사는 쌍계사의 만허가 만든 차향에서 40년 전에 맛보았던 용봉승설의 향기를 떠올린 것이다. 완원을 통해 알게 된 차의 세계는 추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황홀한 경험이었고 그가 차를 품평하는 기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50년께는 제주 유배지에서 해배돼 강상(江上)에 머물던 시기다. 당시 권돈인에게 보낸 이 편지로 인해 조선 후기 쌍계사에서 만든 만허의 차는 명품이었고 중국 명차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귀품이 생산됐음이 확인된다. 한편 명차의 출처를 알게 된 추사는 만허에게 김과 차종, 그리고 자신의 글씨를 보내 서로의 교유를 돈독히 하는 한편 차를 받은 후 답례를 정중히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추사가 만허를 위해 지은 시 서문에서 확인된다. 만허가 만든 차 맛에 감동한 추사는 ‘희증만허(戱贈晩虛)’와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를 지어 답례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반이란 마설로 헛된 세월을 보내니(涅槃魔說送驢年)
그대만은 눈 바로 박힌 사람을 귀하게 여기겠지(只貴於師眼正禪)
(나는)차를 마시는 일과 또 학문하는 일을 겸했으니(茶事更兼參學事)
금탑의 빛을 흠씬 받은 차를 마시라고 권하겠지(勸人人喫塔光圓)
‘희증만허(戱贈晩虛)’ 『완당전집』권10
쌍계사 봄빛, 오랜 차 인연(雙鷄春色茗緣長)
제일 가는 두강차는 육조탑 아래에서 빛나네(第一頭綱古塔光)
늙은이 탐냄이 많아 이것저것 토색하여(處處老饕饕不禁)
입춘에 다시 향기로운 김 보낸다고 약속했네(辛盤又約海苔香)
‘차사이정쌍계(茶事已訂雙鷄)’ 『완당전집』권10
이 시는 차를 청하는 은근함이 배어난다. 아마 만허와 내왕이 빈번해진 후 지은 것이라 짐작된다. 추사 바람대로 만허에게 걸명(乞茗)할 만큼 서로가 돈독한 내왕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만허의 차는 중국의 용정이나 두강보다도 좋았다 했거니와 절간에도 이보다 더 좋은 차는 없다고 평한 것은 추사다. 이처럼 만허의 차를 높이 평가했던 그는 육조탑에 차를 올릴 때 쓸 귀한 찻종 한 벌을 보내 차를 준 그에게 답례했다. 한편 만허가 풀기 어려웠던 난마와도 같은 불교 교리를 통쾌하게 정리해준 사실도 이 시 서문에서 확인된다. 불교에 해박했던 추사였기에 교리의 난마를 풀지 못해 결박당한 듯한 승려들의 포박을 추사가 풀어주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불교 지식을 보시해 교리에 어두웠던 승려들의 고통을 덜어주었던 공덕은 승려들이 그에게 차를 보낸 연유이기도 하다. 서로의 답답함을 이렇게 상보(相補)했던 추사의 인정은 본받기에 족하다. 더구나 추사의 글씨는 당대에도 소장하고 싶은 명품이었으니 이 또한 서로를 돈독하게 만든 예품(禮品)이었던 셈이다. 추사가 남긴 글씨 중 유독 승려들에게 써준 글씨가 많은 것은 이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추사에게 잊을 수 없는 차 벗은 초의다. 이들을 연결한 징검다리는 다산의 아들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1783~1859)이었다. 초의가 1815년 처음으로 상경해 추사를 만났던 학림암도 유산의 배려로 머물렀던 암자였다. 초의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것은 다산 형제들이었다. 이곳에서 초의는 평생 뜻을 나눌 벗을 만난 것이다. 모두 다산으로부터 연결된 인연의 고리였다. 사람의 인연은 사소하게 시작돼 점차 창대(昌大)해지는, 보이지 않게 연결된 끈과 같다.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진리다.
추사의 차 생활이 더욱 심화한 것은 아마도 제주 유배 시절일 것이다. 당시 추사에게 차를 보낸 후원 그룹은 초의를 비롯한 대흥사와 만덕사 승려들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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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묵법(焦墨法·진한 먹을 사용하는 화법)에 능했던 초의는 관음상을 잘 그렸는데 이 첩을 본 황산 김유근(黃山 金逌根· 1785~1840)은 이를 소장하려 했다. 이러한 사실이 1839년 초의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서 확인됐다. 소치가 초기 불화를 그린 연유는 이처럼 초의와 관련 깊다.
차 애호가 추사는 물을 평가하는 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차 품격은 물에 의해 드러난다는 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그가 지은 ‘수미변(水味辨)’에 “물을 분별하는 것은 (물의) 경중을 샘의 높고 낮은 위치로 가늠하였고, 은두(銀斗·은으로 만든 계량기)를 만들어 견주었다(辨水者 於其輕重 分泉之高下 製銀斗較之)”고 하였다. 바로 물의 경중이 질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밝힌 셈이다. 물론 이는 송대에 차를 즐긴 문인들이 물을 분별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자료를 살펴봤다는 사실에서도 그가 차 이론에 밝았던 다인이란 걸 알 수 있다. 그의 차에 대한 안목이 초의차(草衣茶·사대부들은 초의가 만든 차를 이렇게 불렀다)를 완성하는 데 기여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중흥은 차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들이 음다층의 토대를 굳건히 했기에 가능했다. 이런 시대적 조류의 중심엔 추사가 있다. 척박한 환경을 감내했던 그의 결기가 차의 온기(溫氣)에서 나온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