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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숙명 혹은 필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29. 22:08

시의 숙명 혹은 필연

이경수(문학평론가․ 중앙대 국문과 교수)

1.

우리의 현대시사에서 난해성의 문제가 본격적인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1934년 이상의 「오감도」연작시가『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되다가 당시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 때문에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이후 시의 난해성이라는 문제를 거론한 시론가들마다 이상을 실례로 든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상 스스로도 연재 중단 사태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견해와 함께 조선의 시단 및 예술 풍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바 있었는데, 이 사건 이후 이상은 난해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한국 현대 시사에 자리 잡게 된다.

 

시의 난해성이라는 문제는 결국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상을 경험하고 김수영과 김춘수를 경험하고 그 이후 무수히 많은 실험적인 경향의 시인들을 가지게 된 오늘의 시단에서 새삼 난해성이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하게 된 맥락은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시를 고도의 함축적 언어로 이루어진 장르로 보던 과거의 시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난해성의 문제는 사실상 배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젊은 시인들 중에는 오래 공들여 쓴 시를 한 번 죽 훑어 읽고는 어렵다고 말하는 독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를 기존의 익숙한 언어, 자동화된 관습에 대한 낯설게 하기라고 봤을 때 기본적으로 시의 언어는 어려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시의 난해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결국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문제와 난해성의 문제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김종길은『詩論』에서 난해성의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 엘리엇과 말라르메를 인용하였다. 엘리엇을 들어 현대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서 현대 언어, 특히 시어의 포괄적이고 풍유적이고 간접적인 특성, 즉 난해성이 연유한다고 보았으며, 덧붙여 시를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로 생각한 말라르메의 존재가 현대시의 애매성을 낳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대시가 난해성을 띠게 된 무엇보다도 근본적인 원인은 일차대전을 전후한 시기가 예술에 있어서 전세기의 인습에 대립하는 혁명기였고 그 혁명이 급격한 것이었다는 데 있다고 보았다1). 보수적인 대중과 천재적이고 급진적인 예술과의 거리는 현대시를 비롯한 현대 예술의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현대시의 난해성을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본 김종길도 당대의 한국 현대시가 지닌 난해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표현 부족에서” 오는 것 같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여기에는 시의 난해성이 시인의 예술적인 성실이 낳은 부득이한 결과일 뿐 그것 자체가 미덕이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아울러 영미의 현대시에 비해 한국의 현대시가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난해성에 대해 원론적으로는 지지하면서도 그 실례로써 쓰여지는 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을 드리우게 한 것으로 보인다.

 

 

유종호는『시란 무엇인가』에서 현대시가 어렵다는 것은 시를 읽지 않는 시 독자들의 상습적인 불평임을 인지하면서도 해답이 내장되어 있지 않은 수수께끼, 즉 난해한 시가 더러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시의 난해성에 대해 그는 쉬운 시와 어려운 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시와 신통치 않은 시가 있다고 본다. 난해한 시의 대표격으로 논의되어 온 이상에 대해 유종호는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난 인물”이라고 보면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인지의 충격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상은 산문에서는 무서운 아이이지만 시에서는 무서워하는 아이일 뿐이므로 더 이상 그의 시에 농락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종호의 단호한 생각이었다.2) 시의 난해성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역시 우리의 시단에서 쓰여지는 난해한 시들 중에는 신통치 않은 시가 상당수 있는데도 독자들이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간다는 생각을 유종호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권혁웅은 기존의 시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새로운 체계로 시학의 원리와 구조를 밝히고 있는 의욕적인 저서『시론』에서 시학의 모든 요소들을 의미론과 연결지어 해명하려 시도하면서 세계의 객관적 실상을 시학에서 찾아 해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미론을 경유해야 함을 단언한다.3) 무의미시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그의 단언은 결국 해석되지 않는 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분석가의 그물로 모든 시를 포획할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은 시의 난해성이라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비평의 무능으로 돌리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다른 언어로 풀어서 말해질 수 없고 분석되지 않는 잉여를 가지고 있는 시가 더 좋은 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난해성은 시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시의 난해성이라는 문제는 찬반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굳이 찬반을 나누자면 나는 난해성을 옹호하는 자리에 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논의가 생산적일 리 없다. 난해성에 대한 논의는 난해성이 어디서 발생하는가라는 문제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2.

시의 난해성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것은 자칫 매우 위험한 발상이 될 수 있다. 사실상 우리의 모국어는 새로운 시인들에 의해 늘 새롭게 실험되어 왔고, 그들의 새로운 용법 실험에 의해 우리말이 지닌 다양한 가능성이 확장되어 왔다. 사전이 기존의 표준어 규범에 맞는 언어를 분류하고 정의하는 사후 작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집적물이라면, 시는 사전에 담을 수 없는 훨씬 더 넓고 풍요로운 우리말의 다양한 실례들을 활용하고 실험할 수 있는 무대라고 볼 수 있다. 최근의 사전은 방언이나 북한의 문화어까지 꽤 많이 수용해 사전에 등재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사전에 실릴 수 없는 말들, 표기되지 않는 말들은 무수히 많다. 또한 규범 문법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말들이나 표현들도 많고, 변화의 와중에 있거나 비규범의 영역에서 규범의 영역으로 이동 중인 말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 이러한 가능성의 영역을 활용하고 실험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영역 중 하나가 문학작품이며, 그 중에서도 시는 그 정수를 보여줄 수 있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바다를 향해 열리는 창문이 있다라고 쓴다

백지를 낭비하는 사람의 연약한 감정이 밀려온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한적한 한담의 한담 없는 밀물 속에

오늘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이

어제의 밀물과 밀물과 밀물로 번져갈 때

 

물고기들은 목적 없이 잠들어 있다

물결을 신은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스치듯 지나간 것들이 있다라고 쓴다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정적과 울음과 온기와 구름과 침묵 가까이

 

 

소리내 말하지 못한 문장을 공책에 백 번 적는다

씌어진 문장이 쓰려던 문장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이제니, 「피로와 파도와」(『아마도 아프리카』,창비,2012)전문

 

 

이제니의 시는 시어의 질감과 리듬, 시어와 시어가 만나 부딪히며 발생하는 독특한 분위기에서 시적인 것이 솟아오르는 시이다. 그녀의 시를 의미론의 영역에서 애써 분석하는 일은 그녀 시의 아름다움을 읽어내는 데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비슷비슷하면서도 다른 언어가 부딪혀 만들어내는 리듬이 마치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처럼, 우리 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의 물결처럼 이 시에 독특한 리듬을 형성하고 그것이 슬프고도 고독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꾸 되뇌이고 싶어지는 이 말이 우리의 피로를 다독여주며 위로의 악수를 건네 온다. 이제니 시의 아름다움은 여기서 발생한다.

 

이제니의 첫 시집『아마도 아프리카』는 기존의 시의 언어에 대한 당돌한 반란을 품고 있다. 의성어와 의태어, 형용사, 색채어 등을 그녀의 시는 집중적으로 사용하며 이 말들의 새로운 용법을 실험하는데, 사실상 이 말들의 잦은 사용은 오랫동안 시에서 금기시 되어 오기도 했다. 동시가 아닌 현대시에서 의성어와 의태어의 반복적 사용을 집중적으로 실험한 예는 드물다. 게다가 그녀의 시는 ‘요롱요롱’이라든가 ‘분홍 설탕 코끼리’, ‘독일 사탕 개미’,‘녹슨 씨의 녹슨 기타’, ‘완고한 완두콩’처럼 잘 쓰이지 않거나 서로 인접해 쓰이지 않았던 말들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독특한 분위기와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 우리말의 특징 중 하나를 풍부한 의성어와 의태어, 색채어 등에서 찾으면서도 문학어에서는 이 말들이 관습화 된 죽은 말로 다루어져 왔는데, 이제니의 발굴과 실험에 의해 리듬을 가진 우리말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고 볼 수 있다.

 

때: 알 수 없는 사이

공간: 언어의 공동空洞

등장인물: 미지의 혀

이 극에서 ‘암전’은 극 전반을 감싸는 소재와 상징으로 사용된다.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면 좋다.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

음악 역시 특별히 따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지면이라는) 무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한 가지 염두에 둘 사항이 있는데 그건 우리가 음악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몸 안에 박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틈날 때마다 상기하는 것이다. 박동은 박동으로 인식되고 소리는 소리로 구별된다. 그것은 음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을 획득한다. 개가 짖는다. 그 개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몸에 개가 아니라 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심장에서 자신의 형신形神으로 퍼지는 파동이 피와 살을 떠가며 뜻 모를 파장에 각운과 각주를 다는 일을 느낀다. 그러므로 음악에 대한 신뢰는 호흡은 머지않아 하나의 형形이 된다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빚어지기 전의 상태에서 지금의 여기까지 연결된 몸의 박동은 음악에 가장 가까운 언어다. 우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무대의 이명耳鳴은 배 속의 태동을 간직하고 있는 그 언어에 호흡기를 다시 대주는 일이다. 그것이 내게 필요한 형신이며 음악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세상에 흘러나와 음악이라고 부르는 타인의 정의들은 어쩌면 가장 낯설고 모호한 영역인지도 모른다는 예술가의 말은 존중되어야 한다. 음악은 보다 내연의, 자신만의 특별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사토브리앙은 음악을 만지고 본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반드시 귀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음악의 속성은 아니라는 것만 명기해둔다. 음악은 시차를 갖는 순간 다른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시(시어)는 허공이 질료가 된 리듬이거나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생태계이므로 객客은 작가의 의지를 자신의 언어로 상상할 것이고 상상력은 그 의지를 배반할 수 있다.

연출의 의도가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이 극은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언어들이 지면에서 빚어내는 무대이면서 언어극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하나 언어들을 섬세하면서도 모호하지 않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가 심증에 보인다면 우리들 생의 배우이며 배후인 언어를 상대하는 것이다.

이 극은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

사이

<극이 시작되기 전 잠시 1~3막까지 가가 막을 한 번 드르륵 넘겨주길 바라며>

막이 오르면

언어들이 미로와 멀미 속에서 활공하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음과 모음의 형체들

긴 사이

지면 속에서 빠져나오는 언어

천천히 지면을 걸어 다닌다

언어가 허공에 입을 천천히 벌리며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 너희들이 나를 들고 있을 때 나는 너희가 유령처럼 느껴지고 너희가 나를 유령이라 발음할 때 너희는 나라는 유령이 들고 있는 인형일 테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머무는 세계의 유령을 들고 있는 인형의 웃음이지’

반대편에서 허공들 하나씩 등장한다

언어 속으로 하나씩 천천히 스미기 시작한다

사이

반대편에서 다른 언어 등장한다

여긴 어디지?

언어의 속인 것 같아

어떤 곳이지?

그렇지 우리가 연연하는 곳일세

춤추는 언어들

아련하고 요밀한

긴 사이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시

- 김경주,『기담』에서

 

 

인용한 시는 김경주의 가장 실험적인 시집『기담』의 제일 앞에 수록된 시로, 전체 시집에서 일종이 프롤로그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시집 전체를 기이한 이야기라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을 수 있는 이 시집은 연극적 형식 및 성격을 시에 과감히 도입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시집 전체는 제3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막 인형人形의 미로’ 실린 첫 번째 시「기담奇談」의 앞에 바로 인용한 글이 실려 있다. 희곡의 앞부분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와 지문이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김경주의 연극적인 시집 『기담』의 앞에도 말들의 연극이 펼쳐질 때와 공간과 등장인물 및 이 극의 무대 및 음악에 대해 설명하는 지문이 배치된다.

 

 

김경주의 시는 알 수 없는 사이의 시간과 언어의 공동空洞이라는 공간에서 미지의 혀가 노는 극이다. 기존의 감각으로는 포착해낼 수 없는 시간과 공간에 그의 시는 존재한다. 그는 언어의 속에 존재하는 멀미와 미로와 구멍을 자신의 시로 감각해내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이미-항상 실패한다. 그의 시는 “사이에서 빚어지고 사이에서 지워진다.”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들려오는 시”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저 알 수 없는 사이의 시간과 언어의 공동空洞속으로 투신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그의 시는 소통에 실패하고 난해하다는 편견과 마주서게 된다.

3.

 

 

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모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일이다. 사전에 등재된 표준어,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의 정제된 말이나 일상의 관습적인 말들은 이미 상실한 언어의 생명력에 새로운 맥박과 호흡을 불어넣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어가 숨 쉬고 움직이게 하는 힘을 시는 아직 가지고 있다. 시의 언어가 가지고 있는 낯설게 하기 효과, 긴장의 힘은 이와 관련되어 있는 셈이다. 난해성은 오늘의 현대시가 도달하게 되는 필연적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우리말의 새로운 용법과 가능성을 실험하는 시인들의 창작 행위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반하게 되는 것이 난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기성의 언어가 가진 보수성을 지지하거나 그 자장 안에서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는 독자들에게 난해성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난해성이 목적이 되어 버려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을 나 또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통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난해성을 비판하거나 부정하는 시각은 자칫 더 위험한 생각을 불러올 수 있다. 시의 상상력으로 건너서는 안 되는 영역이나 건널 수 없는 영역이 미리 제한되거나 상상되어서는 안 된다. 난해성에 대한 비판이 기성의 보수적인 언어나 시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귀결되는 것에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경수

문학평론가, 1999년『문화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저서로『불온한 상상의 축제』『바벨의 후예들 폐허를 걷다』『춤추는 그림자』등이 있음.

― [시와소금](201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