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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시정신과 세계성으로서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22. 12:26

올바른 시정신과 세계성으로서의 시

박주택(시인, 경희대 교수)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듯 시를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만큼 행복도 큰 법이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기에 매어 있단 말인가?

 

멀게는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이나 연합서클 시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통 시가 아니면 그 무엇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 지금 시는 어쩔 수 없이 생애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일이란 철저히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숨는 일이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자나 깨나 시가 괴롭히고 있기 때문이다.

를 쓰고자 할 때 우선 시를 불러오는 일이 필요하다. 시를 불러 오는 일이란 몸과 마음을 시 속에 바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찌든 몸과 마음을 시 속에 투여하기도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시가 받아 주지 않는다. 이럴 때에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아 마음이 딴 데가 있는 것처럼 돌아서 있는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시집을 읽는 것이 좋다. 시심을 불러 일으킨다고나 할까. 시집을 읽으면서 시를 상기하며 시의 환심을 사는 것은 시가 돌아올 수 있는 지름길이다. 책을 읽고 시집을 읽고 잡지에 발표된 시들을 읽으면서 시 쓰기의 준비를 하는 것이다.

 

시를 쓸 때에 먼저 고려하는 것은 그동안 머릿속으로 쓰고자 했던 주제들을 꺼내는 일이다. 평소 이러저러 한 것을 쓰겠다고 생각해 두었던 것들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말에 그칠 공산이 크다.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되기 때문이다. 가령, 이것만은 꼭 써보자 했던 것이 막상 쓰려고 할 때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메모는 필수적이다. 대체로 수첩 사이에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지만 그것이 없을 시에는 종이나 명함 뒤 심지어 냅킨에 까지 메모를 해둔다. 대화나 여행 중에 혹은 술에 취한 중에 떠오르는 단상들은 반드시 기록해 둔 뒤 그것을 시를 쓸 때 가장 우선으로 고려한다. 메모하면서 떠오른 생각이 주제인지, 문장인지, 단어인지, 이미지인지, 상징인지 일일이 암호를 그 옆에 기록해 두면 떠오른 상황을 나중에 상기하는 데 용이하다.

 

 

를 쓰면서 고려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시적 정의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예컨대 시란 쉬운 언어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든지, 오랜 퇴고의 과정을 거친 뒤 발표해야 한다든지 하는 대체로 편향적 정의로부터 떠나 마음이 시키는 대로 쓰는 일이다. 시정신은 시를 바르고 굳건하게 그리고 당당한 것으로 이끈다. 마치 지조 있는 글처럼 시는 자신과 일치 해야만 하는 동시에 정신의 위용을 함께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시를 쓸 때의 마음가짐은 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우리시에서 부족한 것도 바로 시정신, 곧 철학의 부재이다. 시가 철학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일상에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깊은 사유가 미와 균형감을 이루며 현대성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수사보다는 주제 의식, 단순성보다는 입체성을 띌 때 시는 보다 새로울 것이라는 것이 오랜 생각이다.

 

다음으로 항상 염두에 두는 것은 우리 시가 우리 시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시로서 우리시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라는 말은 한국적인 것을 세계화시켰을 때 내지는 세계적인 것을 세계화시켰을 때 훨씬 유용 한 말일 것이다. 단순히 한국적인 상황에 천착했을 때 그것은 지역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시의 맹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 안목이 없이는 결코 세계적인 시로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끊임없이 세계시를 읽고 경향을 파악하고 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이래서 필요하다. 더욱이 세계시를 둘러싸고 있는 담론을 이해하고 문학사를 숙지하는 것 역시 우리시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 하겠다.

 

시를 기다리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드물다. 그러나 쓰기 시작할 때와 쓰고 난 뒤의 행복은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다. 따라서 시를 쓸 때는 언제나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그럴 때만이 주제 의식도 심원해질 뿐만 아니라 미적 성취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계간 『시와시학』 2007년 가을호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