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시 詩의 반성 反省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5. 1. 21. 00:03

시 詩의 반성 反省

염무웅

雨水節

南녘 바람에

江얼음 녹누마는

 

엄니 가슴 恨은

언젯 바람에

풀리노

 

눈 감아

깊은 잠 드시고야

저승 따

다 적시는

궂은 비로 풀리려나 ①

 

팔할이 노예근성, 나머지는 쓸개다.

애비니 할애비니

고조니 고고조 쩍부터

북, 남, 동, 서,

조아려 국궁하고 꿇엎드려 빌어

금은을, 삼 잣을, 호피에 처녀까지,

더 심하면 피와 땀

더 심하면 울대뼈를

아니 겨레를 조상들을 제 형제를 팔아 바쳐

오랑캐와 왜족속과 아라사와 양에게

사대근성 안 꺼리는 맹수같이 사나운

서로 물고 죽이다가 지쳐 망하는

제기랄 제기랄

강산 이리 하늘 좋고 땅 좋은 데서

무엇이냐 또 되풀이

제정신 쓸개 던져

「세계 속의 한국」에 「일등 후진국」

남북 동서 넋을 팔아

개살림 짜는

팔할이 노예근성 나머지는 쑥

하늘 겹겹 땅 겹겹

피눈물 운다.②

 

 

흰 말(馬)속에 들어 있는

古典的인 살결,

흰 눈이

低音으로 내려

어두운 집

銀빛 家具 위에

修女들의 이름이

無名으로 남는다.

화병마다 나는

꽃을 갈았다.

얼음 속에 들은

嚴格한 變奏曲,

흰 눈의

소리없는 低音

흰 살결 안에

람프를 켜고

나는 소금을 친

한 잔의 食水를 마신다.

나는 살 빠진 빗으로

내리훌트는

漆黑의 머리칼 속에

三冬의 활을 꽂는다.③

 

 

이 세 시작품의 분석을 토대로 하여 오늘날 한국시가 구현하고 있는 일반적인 문제점들에 대해서 하나의 서론적인 의문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이 세 작품을 선택한 것은 전혀 임의적인 것이며 대표적이라든가 우수하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①은 의심할 여지없이 재래적인 서정시의 영역에 드는 작품이다. 우선 그 리듬에 있어서 그렇다. 민요나 歌辭를 포함한 과거의 모든 시적 표현과 마찬가지로 3음절 또는 4음절을 기본적인 운율의 단위로 하여 읽는 사람의 저항감을 최대한으로 무마시키고 있다. 좀 더 주의 깊은 독자는 이 작품이 바로 時調임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니까 국민학교 정도의 교육이라도 착실히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시에 체현된 바 과거 서정시의 가장 확립된 스타일이 제공하는 언어적 감흥에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그 독자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실상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한 이해이든 그것은 이해력의 정도에 관계된 상대적 규정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詩語의 선택과 措辭의 있어서도 재래적인 방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깊은 밤 드시고야』 『저승 따』등에서도 한글 제정 이후 정착 개화된 詩歌의 어법과 연결되고 있으며 <雨水節> <南녘 바람> <엄니>등의 어휘들은 서구 문ㄹ학 수입 이후 이른바 순수시의 폐쇄적인 단어 가공법과 관련을 가진다. 여하한 생각이나 여하한 어휘도 시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발상을 외면한 듯이 보이는 이러한 언어의 素食法에 대응하여 이 작품은 방법적으로도 소박한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雨水節/ 南녘 바람』과 『저승 따/ 다 적시는/ 궂은 비』, 그리고 『江 얼음 녹누마는』과 『엄니 가슴 恨은 ......풀리노』로써 이루어지는 比喩와 對比는 중국 고전시의 對句를 연상시킨다. ㉠봄이 되니 얼음이 녹는다㉡ 어머니의 가슴에 맺힌 한은 언제 풀리나 ㉢ 돌아가신 뒤에나 풀릴까. 이런 전개는 시조의 그것으로서 우리의 전통적 사고양식과 자연스럽게 부합되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나 주야의 변동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자연 경치의 변모에 의탁하여 자기의 신세를 비유하고 이런 종류의 탄식과 감개에 젖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바 있다. 그러면 이 시는 무엇을 발언하고 있는가, 적어도 무엇을 독자에게 환기시켜 주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물론 이런 질문은 작자가 이 작품을 하나의 메시지로서 썼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시 바깥의 상황과 照應(의미)을 의식적으로 차단하고 순수한 언어의 조작만을 실험하여 하는 작품의 경우에 있어서도 발언된 의미는 마땅히 검토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조차도 시에서 의미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의미로서 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라이트모티프를 한 마디로 요악한 듯이 생각되는 『엄니 가슴 恨은』 민요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婦謠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시의 대상이 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실 이 말에는 한국 가족제도의 중요한 측면이 가지는 모순과 우리 부녀자들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말없이 겪어온 설움의 핵심적인 요소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구체적인 생활의 감수성을 통해서 보편적인 비극의 높이에까지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우리는 기대하게 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기대와 반대되는 방향에서 끝나고 있다. 『『눈감아......궂은 비로 풀리려나.』라는 마지막 두 연은 이 작품을 아름답다는 인상으로 남게하는 가장 <시다운>기교를 보이고 있으나, 동시에 <가슴恨>이 촉발하는 고양된 감정을 객관적 사실을 통해 비극으로 승화시키는 대신 체념주의적 숙명론으로 귀착시키고 있다. 속된 신세타령 비슷한 것으로 후퇴하고 만 것이다. 문제의 밑바닥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창조적으로 형상화하겠다는 작가의식의 결려와, 힘없이 깔끔하게 말이나 다듬어 놓겠다는 일종의 匠人意識이 빚어낸 현상이라 할 것이다.

 

 

②는 이와 뚜렷이 대조적인 시인의 정신을 모태로 하여 이루어진 작품이다. 굴욕과 수탈로 점철된 한국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분노의 절규인 것이다. 『팔할이 노예 근성』 이란 구절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하는 말 - 청춘의 고뇌와 허무가 담긴 절망적 몸짓일 수는 있으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역사와 현실의 피안에 위치한 자이 정신적 오만이 숨어 있는 말 - 에 대한 통렬한 패로디로서의 다른 하나의 절망적 몸짓이다. 『팔할이 노예근성, 나머지는 쓸개다』라는 첫 행에는 詩的 內省의 여유를 가질 겨를이 없는 자의 숨막히는 상황이 절박하게 제시되고 있다. 폭언과도 같은 그 斷定的 발언의 强度는 그대로 민족적 비극의 심연을 투시하려는 시인의 역사의식의 강도와 일치한다. 이 첫행에서 맨 뒤의 두 행을 제외한 19행은 첫 행의 부연이며 보충설명이라 할 수 있다. 『북, 남, 동, 서』 즉 『오랑캐와 왜족속과 아라사와 양』의 외국 강대세력에게 『꿇엎드려 빌』』』거나 『금은을, 삼 잣을, 호피에 처녀까지』 , 더 심하면 조상과 형제를 팔아 바친 굴욕의 역사,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 서로 물고 죽이다가』 『『남북 동서 넋을』 팔아 개살림을 해온 自己喪失의 역사 - 이것이 곧 시인의 한국사에 대한 인식이며 분노요 저항이다. 『애비니 할애비니』 『제기랄 제기랄』 등의 비속한 말들은 고조된 울분의 감정이 詩的 심미감과 세련된 언어선택이라는 재래적 통념의 詩學이 설정한 경계선을 돌파하는 순간의 경련이며, 역사와 현실로부터 소외된 페쇄의 밀실에서 뿌리뽑힌 관념의 유희를 순수라는 이름으로 다듬고 분장하던 태도에의 肉彈的 반발인 것이다. 이 시를 몰아가고 있는 숨찬 항변의 리듬은 또한 시행들이 하나의 센텐스로서 안정된 종결어미로 끝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지쳐 망하는』에서 『제기랄 제기랄의 삽입구( 이것은 이를테면 『아으 다롱디리』나 『얄리얄리 얄라성』에 해당된다)가 만든 격동된 감정의 단층을 거쳐 『제정신 쓸개 던져』 『넋을 팔아』 로 연결되는 構文의 격류는 시 자체가 보여주는 감정의 폭발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그러면 굴욕과 수난의 역사에 분노를 아낌없이 터뜨리는 시인의 자리는 어디인가? 역사의 오류는 무엇에 의해서 교정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이 시에 국한해서 찾아본다면 그것은 『강산 이리 하늘 좋고 땅 좋은데』』 와 『하늘 겹겹 땅 겹겹』 으로 암시되고 있다. 즉 생활의 바탕이 되고 역사의 터전이 되는 이 한국의 토양인 것이다. 시인의 감성이 파악한 자연이다. 굴욕과 피약탈의 역사에 대한 反定立으로서 이 자연은 그러나 문제제기의 예각성에 비추어 대폭 후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 정신 쓸개』를 던지고『 넋을 팔아/ 개 살림 짜는』 역사의 비극에 대한 해결의 基點을 인간 자신의 의식적 노력의 평면으로부터 자연의 결과적인 無爲로 옮겼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와 현실에 대한 과격한 분노만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보이고 있는 자학적인 토운은 그 분노가 민중의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것임을 보여준다. 참된 분노는 현실적 태도의 변화로 발전되고 그것이 역사에 과감하게 참여하는 적극적 행동과 의의있게 연결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며, 민족적 비극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과오의 시정을 위한 민중적 이념으로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아직도 바람직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건실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하늘 겹겹 땅 겹겹 / 피눈물 운다』는 마지막 두 행은 폭발적 힘으로 비극과 분노를 재확인시켜 준다.

 

 

③에서 우리는 앞의 두 작품과 현저하게 다른 또 하나의 한국시의 모습에 부딪친다. 앞의 두 작품은 하나가 정제된 어휘 선택과 재래적 운율로써 보편적 감정의 하나를 개인적 관점에서 詩化했고 다른 하나가 민족적 비극의 역사에 분노와 저항의 절규를 퍼부었다는 명백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노래>를 지향한다는 공통된 詩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③에서 우리는 이른바 현대시의 가장 충격적인 한 몸짓과 만나게 된다. 아무 것도 발언하고자 하지 않고 단지 시를 쓰고자 할 따름이라는 - 시적인 노력의 결과만을 거의 순수하게 結晶시킨 이 작품에는 시인의 어떠한 인간적인 냄새도 제거되어 있다. 시인은 정서적 주체로서 혹은 현실의 생활자로서 시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놀랄 만한 感度를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는 자로서 그것과는 차단된 장소에 남아 있는 것이다. 『흰 말(馬)속에 들어 있는/古典的인 살결』, 여기에는 독자의 평균적 이해력에 대한 어떠한 배려도 지불되지 않은 眞空的 공간에서의 언어의 순수한 凝固가 있을 뿐이다. 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언명은 대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흰 말>과 <살결>이 주고 받는 어렴풋한 의미의 연락은 그 사이에 당돌하게 낀 <古典的>에게 거침없이 방해받고 있다.

 

첫줄에서부터 우리는 단어의 김한 배합이 빚어내는 황당무계한 매력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 작품이 어떤 메시지의 전달을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혹종의 메시지나 율동의 쾌감을 기대하면서 들어온 독자의 일상적 생활감각이나 향수능력은 곧 무력함이 판명된다. 단어의 사용법이 벌서 일상생활의 그것과 다르다. <흰 말>과 <살결>은 그 말이 일상적으로 지시하는 실제의 존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이 시의 回路속에서 문제되는 것은 다만 그 단어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흰 눈이......無名으로 남는다』 는데 오면 첫줄에서 일어난 독자의 이해력의 혼란은 한층 고조된다. 우선 문법적으로는 『家具 위에.....이름이.....남는다』이나, 읽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흰 눈이 ......내려』라는 바로 앞의 구절과 『家具 위에』 가 연결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構文의 혼란을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문의 혼란이 독자의 이해력에 극복된다 하더라도 그 의미는 여전히 풀릴 길 없는 피안에 남아 있다. <흰>< 銀빛>과 <어두운><無名>의 대조가 불러일으키는 白夜와 같은 미묘한 분위기, 그리고 <低音><家具><修女> 등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한자말이 담고 있는 동화적인 靜謐 같은 것이 있는 듯 싶을 뿐이다. 여기까지는 의미전달과 무연한 언어의 유희적 결합이 그래도 혼란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화병마다 나는 / 꽃을 갈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독자는 다시 한 번 당혹을 경험한다. 대체 무슨 소리인가. <화병>은 무엇을 비유. 상징하며 <꽃을 갈았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이 시는 바로 이런 상식적 의문에 대한 역설의 구현이다. 여기의 <나>란 <흰 말>이나 <銀빛 家具>처럼 현실적 대상에 조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에 어떤 종류의 감정적 介入을 시도하는 특정된 개인이 아니라 타인과 사물로부터 정서적으로 완벽하게 격리된 自足的인 한 인간이다. 꽃을 갈았다는 행위도 현실 상황 속의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지 않는 그 자체로서 완결된 事物的 행위다. 거기에는 인간의 여하한 감정적 정신적 潤色도 허용하지 않는 행위 그것의 절대성과 구체성이 있다. 이 때 시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현실의 광장에 서 있지도 않다.

 

 

①과 ②가 시로써, 시의 내부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면 ③에서 시인은 시의 바깥에, 그의 방안에 앉아 있는 것이다. 콜크벽으로 자기를 밀폐시키고 은밀한 가운데서 자기의 과거를 순수하게 추적하는 소설가처럼 그는 인간들 틈에서 감정을 조절하고 사상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외부적 상황과 단절된 책상 앞에서 말을 고르고 그것들을 조립시킬 따름이다. 그러다가 일어나서 『화병마다......꽃을 갈』 기도 한다. 국한된 공간을 채우고 있는 <흰 말>과 <銀빛 家具>와 <람프>와 그리고 <嚴格한 變奏曲>의 <소리없는 低音>의 그 움직임 없는 세계에서 시인은 자기를 증발시키는 것이다. 『얼음 속에 들은』』에서 『삼동의 활을 꽂는다』 까지의 이 작품의 후반부는 전반부의 變奏이다.

명백하게 경향을 달리하는 이 세 작품을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혹은 그런 근거가 대체 있을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세 작품이 존립의 기반을 공통되게 가지고 있느냐 혹은 대체 그럴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현대시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통일적 개념의 존재 가능성 및 존재 양식에 관한 물음이다. 이런 기본적 의문은 그것에 부속되는 허다한 작은 문제들을 거느리고 있다. 오늘날 시를 이야기 하는데 있어서 <抒情>이라든지 <현실> <리듬> <의미> <스타일>등의 말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개념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있다. 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소리는 오히려 수그러 들고 독자들은 시를 외면해 버리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거짓된 말놀음은 그만 두고 민중의 가슴에서 나오는 참된 시를 쓰자는 시인 자신의 노골적인 발언도 있다. 이런 不信의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내면화된 知性이니 존재의 탐구니 幻想과 魔術이니 하고 있다. 이런 근본적인 혼란, 즉 한국의 현대시를 설명할 통일적인 기본 원리가 붕괴되어 버린 듯이 보인다는 이 혼란에 비추어 본다면 앞에 시험한 시의 분석은 시 자체가 그러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없는 徒勞에 그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또 한편으로는 각 작품의 이런 분석에 대해서 역시 의미없는 무수한 反論이 나올 수도 있다.

 

①이 어째서 현대시냐,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한 반복이 어떻게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늘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형성해야 하는 예술일 수 있느냐, 이미 창조력의 움직임과는 거리가 먼 遺物이 아니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②가 어째서 시냐, 남에게 수모를 입으며 살아온 우리 역사에 대한 분노의 욕설을 제외하고는 남는 <시적>인 것이 무엇이냐, 현실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일과 그것을 시로써 표현하는 일과는 스스로 다른 것이 아니냐하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③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얼음 속에 들은 / 嚴格한 變奏曲』 따위 해명될 수 없는 - 설혹 교묘히 해명된다 하더라도 한국어 사용자의 무의식적 承服을 받기 힘든, 받는다 하더라도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 - 언어의 유희적 組合이 대체 뭐란 말인가, 시란 언제나 인간적인 것의 한복판에서 그 절정을 압축해서 노래해 온 언어 양식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시가 전통의 살아 있는 구속력으로부터 풀려져 왔을 때 시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한국어의 리듬과 정서에 밀착되면서 현대적 복잡성을 충분히 소화한 시, 현실과 역사의 앞날에 대한 강인한 비젼을 제시하면서 높은 단계의 언어적 형상화를 배반하지 않는 그러한 시, 다시 말해서 <한국 현대시>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 실천과 이론에서 아울러 형성되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과정에서 시인의 창조적 노력과 독자 대중의 광범한 참여가 튼튼히 제휴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진지한 창작과 토의가 참가하여 상호의 성과를 교환하고 이를 누적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시작품들을 그 내부에 힘차게 견인하는 원초적 질서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차후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조잡한 小論에서 제기했거나 하고 싶었던 문제들을 보충, 발전시킬 작정이다.

(① 許英子 「思母曲 3」, 「解氷期에」 ② 朴斗鎭 「넋을 팔아」 ③金榮泰 「첼로」 )

* 이 글은 1966년 『思想界』에 발표되고 『韓國文學의 反省』 민음사, 오늘의 산문선집 14, 1976에 수록된 글이다.

* 문장부호의 표기는 발간 당시의 표기법을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