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집, 언어의 의미 / 나호열
하이데거 Heiddegger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을 때 인간의 정의에 있어서 理性과 더불어 言語라는 또 하나의 특성이 부가되는 전기를 마련한다. 존재는 이 세상에 표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출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도구로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전모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 즉 의미의 자가확장성 이라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자가확장성 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법칙을 벗어나는 행위이며 이 일탈의 법칙으로부터 무한한 의미가 생성되는 것이다. 시인을 일컬어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는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를 자신의 의도에 맞게 길들일 줄 안다는 의미이다. 시인됨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가 예민한 감수성과 천부적 영감 靈感의 소유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에 덧붙여 언어에 대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 남다른 자가 시인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 일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좋은 시의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비유(譬喩)라는 것도 언어의 규칙성을 의도적으로 벗어나서 언어의 지시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함축적 의미를 확장해 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 글에서 언어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나 분석을 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언어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시를 창작함에 있어 문제가 되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진행하고자 한다.
잠깐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정의내림을 상기 해보자. 鍊金術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원초적 물질을 형태나 효용의 측면에서 변화시킴을 뜻한다. 금을 이용하여 반지, 귀걸이 등을 만들어도 금의 성질은 변화하지 않지만 형태나 가치는 바뀌게 된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며 그 사회적 약속이란 사전적 의미로 언어가 사용됨을 말한다. 그러나 詩에 사용되는 언어는 지시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문장화 syntax 될 때 새로운 의미로 확장된다. 의미란 인간의 고유한 정신활동으로서 빚어지는 또 하나의 관념이며 추상抽象이다. 또한 의미의 확장성은 시인 당사자와 독자 양 측면에서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그 다양한 해석이 인간 理性의 상대성에 기인하며 더 나아가서는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ambiguity 애매성, 다의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William Empson은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특성을 다음의 7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하였다.
1. 한 낱말 또는 문장이 동시에 여러 가지 방향으로 효과를 미치는 경우
2. 낱말이나 문장에 있어서 둘 또는 그 이상의 의미가 공동으로 참여하여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경우
3. 한 낱말로 두 가지 의미가 표현되는 경우, 예컨대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가 이에 해당된다.
4. 서로 다른 의미들이 합쳐서 시인의 착잡한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경우
5. 시인이 자신의 관념을 詩作의 실제 행위 속에서야 발견하게 되거나 또는 심리적으로 관념이 즉시 포착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우연한 혼란을 표현한 경우
6. 표현이 모순되거나 적절하지 못해서 독자가 해석을 발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
7. 철저한 모순형으로 시인의 마음속의 분열을 나타낼 경우
위의 7가지 시어의 유형은 시인의 의도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선택되어지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파생되기도 하며 독자에 의해서도 마찬가지로 기능할 수 있는 쌍방향성을 갖는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시인은 관습적 언어의 의미에다가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갈 때 시인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며 창조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도 되는 것이다.
어느 글에선가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원로는 여유와 달관으로, 중견은 서정과 잠언으로, 신인은 키치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대'를 노래하고..." 어느 시대나 우리가 직면한 세계는 불확정적이고 따라서 불안할 수밖에 없다. 똑같은 사태를 맞이하면서도 원로와 중견과 신인이 인식하는 세계의 층위가 다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인식의 깊이와 반성의 너비에 따라 詩作은 형태와 내용상에서 다양한 빛깔을 드러내게 된다. 아무리 '시인이 죽은 사회'라고 볼 맨 소리를 해도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이 본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존재의 확인과 표현의 욕구가 살아있음이다.
<예문 1.>
감은사지 전경 사진
<예문. 2>
감은사터
감포 앞바다를 뒤로 하고 대종천을 거슬러 0.5㎞쯤 올라가면 양북면 용당리다. 이곳에는 장대하고도 훤칠한 미남에 견줄 만한 석탑 두 기가 우뚝 선 절터가 있다. 절터가 들어선 곳은 일부러 주위보다 높게 다진 듯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 여기에 풍채가 거대하고 위엄 있는 품새가 사람을 압도하는 삼층석탑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은 생전에 직접 대왕암의 위치를 잡고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용당산을 뒤로 하고 용담이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세워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가지 몰아낸 문무왕이었지만 당시 시시때때로 쳐들어와 성가시게 구는 왜구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무왕은 부처의 힘을 빌어 왜구를 막겠다는 생각으로 동해 바닷가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 지 21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신문왕이 그 뜻을 이어 이듬해(682년)에 절을 완공하여 감은사라 이름하였다. 이는 불심을 통한 호국이라는 부왕의 뜻을 이어받는 한편 부왕의 명복을 비는 효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더욱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놓았다는 금당 밑의 공간이다.
감은사 탑은 종래의 평지가람에서 산지가람으로, 고신라의 일탑 중심의 가람배치에서 쌍탑 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즉 동서로 탑을 세우고, 이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동.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서 회랑이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 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도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의 바닥 장치는 이중의 방형대석 위에 장대석을 걸쳐놓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대석 밑은 빈 공간이 되도록 특수하게 만들었다.
금당의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테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임이 확실하다.
절터의 금당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현재 남아 잇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큰 것이다.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게 솟아오른 두 탑은 크기로 보나 주위를 압도하는 위엄에 있어서나 신라를 대표하는 멋진 탑이라 단정하는데 이의가 없다.
통일된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안정을 기원하는 뜻에서 감은사가 지어졌듯, 그 같은 시대정신은 웅장하고 엄숙하며 안정된 삼층석탑을 낳게 하였던 것이다. 감은사탑은 튼실한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지붕돌(옥개석)의 끝이 경사를 이루는 통일신라 7세기 후반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 뒤쪽 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절터와 주변 경치가 어우러진 속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탑을 볼 수가 있다. 대종천 건너 아래쪽에서부터 두 탑
을 올려다보는 것도 또 다른 멋이 있다. 감은사터는 사적 제 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문. 3>
감은사터 동서 삼층석탑
기운차고 견실하며, 장중하면서도 질박함을 잃지 않는 이 위대한 석탑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삼층탑으로 화강암 상하2층 기단 위에 3층으로 축조
되었다. 신문왕 2년(682), 축조 연대가 확실한 통일신라 초기 작품이다.
우선 이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와 탑신부 등 각 부분이 한 개의 통돌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 석재로 조립되었다는 점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같은 돌로 다듬어 12매의 석재로 구성하였으며 갑석 또한 12매이다. 기단 양쪽에 우주가 있고 탱주가 3주씩 있다. 상층 기단 면석 역시 12매에 갑석은 8매로 구성되어 있으며 2주의 탱주가 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옥신)은 각 우주와 면석을 따로 세웠으며 2층 몸돌은 각각 한 족에 우주를 하나씩 조각한 판석 4매로, 3층 몸돌은 1석으로 구성하였다.
지붕돌의 구성은 각층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각기 따로 조립되었는데 각각 4매석이므로 결국 8매석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층급받침은 각층 5단으로 짜여졌고 낙수면의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으며 낙수면 끝은 약간 위로 들려져 있다.
3층 지붕돌 위부터 시작되는 탑의 상륜부에는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부재는 없으나, 현재 약 3.9m 높이의 쇠로 된 찰주가 노반석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꽂혀 있다. 석탑의 전체 높이는 13m로 우리나라 3층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찰주를 빼면 높이가 9.1m로 고선사탑과 비슷한 높이가 된다. 그러나 찰주가 없는 고선사탑에 견주어본다면 이 찰주로 인해 석탑이 갖게 되는 상승감의 의미를 알게 될 터이다.
탑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것은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두 가지 요소이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3개의 몸돌을 실측해 보면 그 폭이 4:3:2의 비례로 상승감에 성공하고 있으며, 높이는 4:3:2가 아닌 4:2:2로 나타난다. 곧 1층 몸돌이 2, 3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눈높이에서 보는 착시를 감안한 것으로 만약 정상적인 체감율을 따랐다면 지금과 같은 상승감은 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감은사탑은 국보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1959년 감은사 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 중 서탑 몸돌의 사리공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모양의 청동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정교한 연화문 받침에 57×29.5㎝, 깊이 29.1㎝ 크기의 함을 놓았으며 함의 네 모서리에는 팔부신장이 새겨져 있고 각 좌우에 귀신 얼굴의 고리가 있다. 화려하고 섬세한 예술감
과 간절한 종교적 감성이 한데 어우러진 이 사리함은 보물 제 366호로 지정,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예문. 4>
感恩寺址
- 동탑 보수공사를 보며
박 영 석
지평으로 돌아가기 위해
탑신이 헐리고 있다
부식된 금동사리탑
열고 나온 순금 불상
빛 부신 천 년의 미소가
뚜벅뚜벅 오고 있다
맑은 풍경 소리에
부시시 눈뜨는 사천왕
가닥잡는 만파식적
수중대왕도 일어서고
동해의 일 천개 달이
탑돌이를 하고 있다
감은사 은빛 木魚떼
대종천을 회귀한다
대불 깨운 범종 소리
살 풀리는 그리움들
사랑아
내 오늘 밤 돌아가
신라 계집을 안으리라
<예문. 5>
감은사에 가다
송 재 학
감은사는 없다 감포 바다가 눈 높이까지 밀려와도 감은사 스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들을 쌓아놓은 두 개의 석탑이 감은사를 변명한다 지도에도 감은사로 적혀 있고 길을 물어보면 모두 아 감은사 말이지요, 감탄한다 시커먼 찰주까지 남아 있는 감은사 탑과 탑의 균열은 감은사의 不在와 더불어 꽃 핀 현호색을 에워싼다
저 연보랏빛 현호색을 가로질러 감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절은 늘 가파르다 계단과 회랑과 높은 천장의 가파름은 삶과 절의 경계인 것 현호색은 감은사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보랏빛인 양 내 속에서 번진다
그곳에 감은사가 있어야 하는지 저녁 예불 소리를 듣거나 석등의 불빛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몇백 년 동안 감은사는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감은사에서 바다까지 수로의 기록과 석탑을 찾았다 내가 감은사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밀어닥칠 해일의 기미와 내 마음을 본뜬 수줍은 현호색 무더기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한다 감은사에서 너무 지체했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이나 바람 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그것들을 짊어지기도 한다
<예문. 6>
감은사지 별사(別詞)
정 일 근
입춘날 아침 감은사에 갔다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걸인 부부를 보았습니다
서탑 기단부 하대석 이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넓은 상대석 면석으로 동해바다 겨울바람을 막고
귀한 순금빛 햇살을 온몸 가득 쬐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에 너무 얇은 옷과
풀어헤친 머리며 오랫동안 씻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사람들은 추위에 웅크리며
걸인 부부 앞을 무심히 지나쳐갔지만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무소유의 감은사 절터처럼
가지지 않고서도 넉넉한 모습이어서
내 눈동자 속 눈부처로 붙박여버렸습니다
동탑과 서탑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우리를 찾아왔을 것이라고
선덕여왕과 지귀가 환생해 사랑 나들이 왔을 것이라고
돌아오는 길 나와 같이 간 동행에게 들려주었지만
동행은 그 걸인 부부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감은사 빈 터에는 동서 쌍탑만 서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글에 열거된 예문은 감은사에 대한 것들이다. <예문. 1>은 감은사 북쪽 방향에서 남쪽을 향하여 찍은 사진이고. <예문. 2>와 <예문. 3>는 감은사터와 감은사 3층석탑에 대해 기술한 설명문이다. <예문.4>, <예문.5>,<예문. 6>은 감은사를 답사하고 쓴 시들이다.
한 번도 감은사를 가 본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현장감 있고 객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예문.1>의 사진이다. 그러나 <예문.1>의 사진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장감은 제공하지만 그 밖의 어떤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예문. 2>와 <예문. 3>은 보다 개괄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역사나 고건축물에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예문을 읽고 감은사 터와 삼층석탑을 형상화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예문으로 든 3편의 시는 시인들이 직접 감은사 터를 답사하고 쓴 시들이다. 예문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는 <예문. 2>와 <예문.3>도 감은사지와 삼층석탑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문으로만 해석하지 않을 것이다. 문장에 나타난 필자의 주관적인 표현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겠다. 요는 어떤 글도 완전히 객관적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예문의 사진도 그 사진을 찍은 사진작가의 주관이 강하게 들어가 있다. 널찍한 빈 터에 쌍둥이처럼 우뚝 선 두 기의 석탑을 한 화면에 담아내었을 때의 질감과 앵글을 끌어당겨 탑만을 부각시켰을 때의 질감은 매우 다를 것이다.
우리는 주제, 또는 주관subject과 소재 또는 객관object 이라는 이분법적 발상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인간이라는 주관이 사물이라는 대상을 파악한다는 일방적 사고방식,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명확하며 그 의도에 따라 선택한 소재가 정확하게 그 주제에 반응한다는 믿음을 버려야 한다. 어느 시인은 이미 확립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그에 걸맞는 소재를 찾고 변용하기도 하고, 어느 시인은 무정한 세상 풍경과 사물에서 영감을 일으켜 새로운 세계관을 적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시인으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도 있을 것이며, 시를 씀으로서 시인으로 형성되어 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칸트Kant의 철학은 물자체 things in themselves를 인정하고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통하여 통념적인 주관과 객관의 위치를 뒤바꿔 버린데 있다. 물자체의 인정은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경외와 반과학주의적인 절대적 존재에 대한 신뢰에 있다. 시의 자양분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생명에 대한 경외와 절대적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있다.
인간이 표현의 욕구를 가진다는 것은 추상화된 관념을 언어를 통하여 구상화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 또한 추상을 지향해 나가는 것이기에 결국 시는 이미지 또는 이미저리라는 주장에 근접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는 산문과 달리 메시지의 전달이 아니라 이미지의 분사에 더 친밀해지는 것이 아닐까?
예문에 든 세 편의 시는 한 사태에 반응하는 각기 다른 태도를 반영한다. 시의 틀이나 기법, 다루고 있는 핵심적 내용도 판이하다.
<예문.4>의 시는 동탑 보수공사의 현장에서 드러난 사실의 묘사로 가장 현실에 가깝다. <예문.2>와 <예문.3>에 기술된 바와 같이 서기682년에 완공된 감은사는 그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본격적으로 발굴이 이루어 진 것은 근래의 일이다. 이 시는 3 연으로 구성된 시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동탑의 해체 보수 공사 때 나온 순금 불상으로 보면서 천 년 전의 감은사를 회고하는 이 시는 의인법을 차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사실감을 확보하려고 하고 있다. <예문. 2>와 <예문. 3>을 읽은 후에 이 시를 읽으면 보다 정감 있게 이 시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감은사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독자에게 이 시는 어떤 의미로 다가설 수 있을까?
'살 풀리는 그리움', 신라계집을 안으리라'는 이 시를 풍류의 시로 읽게도 하고 고리타분한 회고의 시로 읽게 하게도 한다. 한 마디로 이 시는 시인이 어느 날 문득 마주친 대상 즉, 감은사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그 축으로 한다.
이 시는 독자들로 하여금 천 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끔 하게는 하지만 그 이상의 어떤 자극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예문. 5>는 보기에 따라서는 시인의 주관이 강하게 드러나 있어 구체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예문.4>가 리드미컬한 자수율에 맞춰져 있는 것에 비해 이 시는 지루할 정도로 긴 산문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의 1연은 가장 구체적인 사실의 기록이다. 감은사는 현존하는 절이 아니다. 그러므로 감은사 터 또는 감은사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도에도, 인근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보면 아 감은사가 어디 있느냐고요? 하면서 대답을 한다. 감은사는 없는데 감은사의 현존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연에 기술된 보랏빛 현호색을 통하여 감은사는 현현한다. 보라빛이 상징하는 애절함과 음울함이 시인의 삶에 대한 태도이다. 그 무엇으로도 분절할 수 없는 불안과도 같은 정서를 시인은 감은사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 사실과 시인의 주관적 느낌이 교묘하게 교차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감은사는 예문. 4와 같이 주제의 골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인의 정서를 전달하는 소재의 기능을 담당한다. 이 시에서의 감은사는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폐사지 이면서 폐허의 삶, 허무의 삶 그 일반인 것이다.
<예문. 6>은 사실적 묘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시인은 동탑과 서탑의 형상에서 가난한 걸인의 이미지를 찾아낸다. 황량한 겨울 햇볕을 쬐고 있는 걸인부부는 그러나 단지 현세의 걸인 부부가 아니라 천 년 전의 선덕여왕과 지귀로 거슬러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의 모티브는 사랑이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사랑이라는 지순한 감정은 이 세상을 아름답게 절망으로부터 구해내는 보물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사랑을 물질화하고 계량화한다. 현대인에게 사랑은 소모적이고 일회적이며 끊임없이 분출하는 소모성 욕망이다. 그래서 같이 간 동행은 끝내 걸인부부도, 선덕여왕과 지귀도 보지 못하고, 오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돌덩이인 석탑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고귀한 사랑의 모습을 두 탑에서 찾고, 그 두 탑을 걸인부부로 의인화시키며 나아가서 시공을 초월한 선덕여왕과 지귀로 까지 확대해 간다. 이 시의 또 하나의 층위는 사랑의 부재 현장인 오늘을 비판하는데 있다.
시인은 이와 같이 똑같은 대상에도 제각기 다른 반응과 인식을 나타낸다. 위에 든 세 편의 시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결론 삼아 말하고자 하는 것은 표현의 도구로서 언어에 대한 인식이 한 편의 시의 형식과 내용을 가름한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지시적 기능에 충실할 때 계몽적 메시지의 효력은 강화되는 대신 언어가 가지는 상상의 폭은 좁아진다. 언어의 함축적 기능에 역점을 두게 되면 <예문.5>와 같이 분위기만을 전달해 주는 애매성이 강화된다는 점이다.
과거와 달리 인식의 대상인 사물이나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식을 분열시키고 해체시키는 소비적 욕망이다. 이러한 사태 하에서 관조나 명상, 감탄의 어법은 통용될 수가 없다. 인간이 변하고, 사물이 변하고, 그에 따라 언어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시를 대하여야 할까? 그것은 시인 각자에게 주어진 숙명적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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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3년 6월에 발간된 미국 오레곤 문학회(회장 오정방 시인)의 청탁에 의하여 쓰여진 글이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하여 원문의 1/3 정도가 축약되어 있는데, 차후 기회를 보아 원문을 복원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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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1>은 감은사지의 사진인데 기술적인 문제로 게제가 되지 않았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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