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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의 시창작론

排泄(배설)의 아름다움 / 나호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8. 20. 23:34

排泄(배설)의 아름다움 / 나호열

1.

숨을 들이키고 내쉬지 않으면 우리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의 원리는 이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생명의 원리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표현의 욕구는 배설의 매카니즘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체적 배설이 생명순환운동의 중요한 기능이듯이 표현은 정신의 배설물이면서 정신을 淨化하는 기능입니다.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지금까지 시를 써오면서 시가 무엇인지/시로써 무엇을 이룰지/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헤매어 여기까지 왔다/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한여름 뜨락에 발돋음한 상사화/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한줄기에 나서도/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끝없이 저잣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   정희성 -詩를 찾아서

 

 

  위의 시는 올 6월에 발간된 시집 『詩를 찾아서』에 수록된 시입니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시 읽기를 즐겨하고, 습작을 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현재 詩作을 하고 있는 시인들에게도 끊임없이 다가오는 話頭 입니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정도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 하나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시의 구성력을 검토해 보는 일이고 또 하나는 '시의 주체가 시인인가, 독자인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해서 '도대체 시의 기능은 무엇인가?, 시로서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수한 定義의 숲 속을 헤매고 있으며 무수한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져 자신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위의 시는 바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무형의 형식으로서의 시를 찾아가는 시인의 태도가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시인이 보통의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우주 만물의 그 모든 것에 촉수를 들이대는 탐구의 소유자라는 점일 것입니다.

이 시집의 마지막 부분, 시인의 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현실주의자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는 자들에게 맞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우리의 낭만적 환상을 가로막기 있었기 때문이지 현실주의 자체가 문학적 이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은 불가피하게 현실주의자가 되기는 하여도 본질적으로는 천진한 낭만주의자라는게 나의 생각이다.

 

위의 글에서 등장하는 현실주의라든지, 낭만주의하든지 하는 용어에 대해서 상세히 이야기할 수 없는 자리이기에, 그 개요만을 살펴본다면 대충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현실주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내 앞에 주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에 조응하므로서, 문학이 현실문제에 계몽적으로, 전투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짐을 뜻하며, 낭만주의란 내 앞에 주어져 있는 時空의 제한을 풀고 보다 본질적인 인간의 정서를 노래하므로써 아름다움을 향수하는 인간 존재의 발견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서 바로 낭만주의적 이 시론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뽕잎을 먹은 누에가 명주실을 자아내듯이, 현실 속의 존재가 경험하는 사건과 세계를 또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대하여 나가는 것이 시이며 시인의 할 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루 중에도 무수한 행동과 사건을 겪고 있습니다. 이 경험 자체가 너무 반복적이고, 평범해서 시심을 일으키는데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들은 보다 특수한 사건이나 환경 속에서 자신이 써야할 재료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한 예를 들어서 이야기 해 봅시다. 금강산은 명산입니다. 기암괴석이 즐비한 풍광이 수려하여 나는 금강산에 갔습니다. 금강산을 다녀와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시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시로서 그 아름다움을 시로 옮기려는 순간부터 절망하게 됩니다. '금강산은 아름답다'라는 구절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아온 많은 여행시들이 자신의 여행을 미화하거나 자랑하는 글로서 밖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금강산에 갔었다라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경험한 주체인 나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는 쉽게 실패해 버리고 말까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메타포어metaphor에 대해서 잠깐 생각을 해봅시다. meta는 轉移를 뜻하고 phor는 움직임을 뜻하는 phora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메타포어는 한 명칭이 원래 지시하던 사물로부터 그것이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는 다른 사물의 명칭으로 전이되는 현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A는 B이다'의 형식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원 관념인 A와 그것을 표현하는 보조관념인 B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서 詩作의 성패가 갈라진다고 보여집니다.

 

 

우리는 금강산을 원 관념으로 하고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보조관념을 구할 때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그 무슨 소재로, 사건으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겠습니까? 잠시 생각을 돌려서 원 관념을 금강산으로 하지 않고 보조관념으로 돌려놓으면 어떻겠습니까?

 

원 관념을 내가 사모하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로 설정하고, 그 어렵고 긴 사랑의 길을 가는 모습을 금강산을 찾아가는 행위로 표현한다면 읽는 사람들은 훨씬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 앞에 하염없이 흘러가는 사물과 현상을 놓고,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게 아니라 그 일상의 무의미성 속에 자신을 비추어보고 몸 섞는 일을 하면서 자아의 반성을 촉구하는 시인은 어떤 소재를 놓고도 누에처럼 아름다운 시의 선율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정리해 봅시다.

 

 1) 시는 현실로부터 주어지는 정서적 반응의 매개물이다.

 

2) 시의 효용은 정서의 낭만적 표출에 있다

 

 3) 낭만적 표출은 현실체험의 미적 탐구이다.

 

2.

 

 

우리는 우리를 감동시킨 많은 시인들 속에서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기억합니다. 1994년도 「창비시선 121」로 발간된 이 시집은 찬사와 폄하를 동시에 받은 시집입니다.

 

정영자 교수는 '최영미의 시 세계'라는 짧은 평론에서 이 시집이 성공한 요인으로 다음의 8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1) 시인이 **대학교를 졸업하였다는 화려한 학벌

 

2)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시인이라는 점

 

3)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자유와 민중적 삶에 고뇌한 세대

 

 4) 시집 제목이 주는 단호한 청산주의와 호기심 유발

 

 5) 출판사의 상업적 전략

 

6)비평계의 엄호 사격

 

7)80년대의 청산을 통한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8) 여성 시단의 맥을 잇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 필요성.

 

 

 

위와 같은 평가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가 필요한 사항임에는 틀림없으나, 시를 새롭게 써보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덕목을 두루두루 갖추고 있음도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쓴 이 시집의 발문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난 여기서도 시대가 어쩌고저쩌고 오늘이 어쩌고저쩌고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만큼 거침없고 솔직하고 자유분방하며 확실하고 현실을 정확하게 그려내는 것을 보고자 한다. 최영미는 응큼 떨지 않는다. 의뭉하지 않으며 난 척 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직할 뿐이다. 정직하다는 것은 세상을 종합하는 눈이 정확하다는 뜻도 된다. ...중략

그의 시에서는 또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자기와의 싸움이 짙게 배어있다. 무차별하게 자기를 욕하고 상대를 욕한다.....중략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직이며 사회에 대한 솔직한 자기 발언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솔직하며, 피 비린내 나는 자기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시인의 자세입니다. 주어진 소재를 자신의 현실 체험과 맞물리면서 피 흘리는 자신을 드러내고, 비판하는 자세 속에 삶의 아름다운 자세 하나가 옹골차게 뛰쳐나오는 것 입니다.

 

우리가 좋은 시를 쓰고자 한다면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자세와 부끄러운 자신의 알몸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는 두려움의 극복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추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기존의 상식을 뛰어넘으려는 百尺竿頭의 실험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하나의 덕목입니다.

 

이 시집은 우리 일상에 널브러진, 상식의 더께에 함몰하는 조그만 소품과 생각들을 상식 저 너머로 집어던지는데 그 의미가 있기도 합니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지는 건 잠깐이더군/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내 속에 피어날 때 처럼/잊는 것 또한 그렇게/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어도/잊는 건 한참이더군/영영 한참이더군

                                                                                          시, <선운사에서>

 

위의 시는 시집의 첫 자리에 있는 시입니다. 단순한 구조를 가진 사랑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군'의 어미로 여성적 톤을 절제하고, 냉소적이면서도 처량한 이별의 정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선운사는 동백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동백에 초점을 맞추지않고 '산 넘어 가는 그대'를 원경으로 삼으므로서 직정적인 感傷의 위험을 피해가면서 이별의 정감을 반어법으로 배설해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다 참신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라는 체험과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보았다'라는 체험 중에 어떤 것을 시의 모티브로 삼겠습니까? 선운사에 가서 동백꽃을 보니까 떠나간 사람이 그리워집니까? 아니면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기 위해 동백꽃을 보러 갔습니까?

 

시는 글쓰는 사람이 뱉어내는, 그러나 결코 더럽거나 추하지 않은 절절한 외침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를 짓기 전에 내가 들여마셔야 할 공기와 내 뱉어야 할 공기가 어떤지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