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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가고 싶다(신문 스크랩)

함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4. 7. 29. 12:07

경남 함안의 남강과 함안천 물길이 만나는 합수머리쯤에 세워진 악양루의 모습. 악양루란 이름은 중국 고대의 4대 명루(名樓) 중의 하나로 꼽히는 후난(湖南)성의 웨양러우(岳陽樓)에 못지 않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강을 끼고 숲 속의 벼랑에 서 있는 악양루에 오르면 하늘이 수면에 도장처럼 찍힌 강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경남 함안. 여행지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떠올려지는 선명한 이미지도 없을뿐더러, 지도에서 위치를 짚기도 쉽지 않습니다. 구분하자면 함안은 들뜬 휴가철 목적지라기보다는 ‘맑고 차분한 여행지’입니다. 화려한 비경이나 수다스러운 과시 따위는 거기에 없습니다. 그저 오래돼서 자연스럽게 낡아진 것들의 시간과 단단하고 곧은 마음을 가졌던 옛사람들의 시간이 모여 함께 흘러간 자취가 있을 따름입니다.

함안에서는 딱 한 곳의 여행지만 꺼내 들 수 없습니다. 함안의 길 위에서는 두서없이 주워담은 것들로 금세 주머니가 불룩해질 테니 말입니다. 여름날 함안의 길 위에서 만난 것들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낙동강과 남강의 물길을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서 굽어보고 있는 정자. 700년의 캄캄한 어둠의 시간을 건너와 피워낸 연꽃. 뜨거운 여름 볕을 당당하게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는 해바라기의 도열. 오래된 연못 곁에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수양버들. 절경의 산수를 마당으로 옮겨가서 지어낸 옛집. 권력의 탐욕을 목격한 뒤 세상을 버리고 칩거해버린 강건한 품성의 선비들,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 한복판의 솟은 가야 무덤의 시간들…. 함안 땅에서 만나는 것들은 풍경부터 이야기들까지 어쩐지 모두 다 차분했습니다.

함안은 피서 여행지는 아닙니다. 바다도 없고, 더위를 피할 깊고 어둑한 계곡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낙동강과 남강의 물길을 끼고 있긴 하지만, 강의 하류 쪽이라 몸을 담글 만한 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여름에 함안으로의 여행을 권하는 건, 그곳이라면 고요하고 또 여유 있게 여름을 보낼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해질 무렵에 걸음의 속도를 한껏 늦추고 긴 강둑을 따라 산보를 하거나, 쥘 부채 하나 들고 남강변의 초록숲 한가운데 세워둔 정자 그늘 아래 앉아서 한낮에 순한 매미 울음소리를 듣거나, 저물녘 강 너머로 장엄하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이 여름을 너끈히 보낼 수 있을 듯했습니다. 휴가를 즐기는 방법이 어디 일상보다 더 번잡스러운 피서행렬에 끼어들거나, 볼거리나 먹거리만 탐하는 여행을 감행하는 것뿐이겠습니까.

함안 법수면 강주리 강주마을 뒤편의 야트막한 구릉에 만개한 해바라기. 강주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스스로 심어 가꾼 것들이다. 마을에서 진행하는 ‘해바라기 축제’는 지난 20일 끝났지만, 이달 말까지는 활짝 핀 해바라기를 만날 수 있다.




# 남강의 정자에 올라 천리장제를 내려다보다

낙동강과 남강이 감아 도는 함안 땅에는 강을 굽어보는 소위 ‘명당자리’에 세워진 정자가 여럿이다. 지어진 내력과 깃든 이야기들이 깊거나 풍성하지 않지만, 정자가 차지하고 앉은 자연 속의 자리만큼은 감탄스럽다. 지금 새로 정자를 들인다고 한들 그만한 곳을 찾을 수 있을까.

함안 대산면을 굽이치는 남강의 물길이 함안천과 만나는 합수머리의 단애에는 정자 악양루가 있다. ‘악양’이란 이름은 같은 지명을 쓰는 중국의 이름난 명승지에서 따온 것. 중국 악양루는 산을 뒤로 두고 강을 굽어보는 자리에 세워져 예로부터 두보를 비롯한 시인과 문장가들이 앞다퉈 찾아들어 감탄사를 쏟아냈던 곳이다. 함안의 악양루가 ‘악양’을 정자의 이름으로 가져다 쓴 것은 풍류와 경치가 마치 중국의 악양루에 비길만 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조선 말엽 철종 때 지어진 것이니 악양루의 나이는 고작 160살이 조금 못된다. 그러나 그 자태가 비범하다. 정자는 밖에서 안을 볼 때와 안에서 밖을 볼 때의 풍경이 모두 다 빼어나다. 짙은 숲의 벼랑에 매달린 악양루의 모습도 근사하지만, 악양루에 들어서면 처마 아래로 펼쳐지는 남강의 물길이며 끝간데 없이 이어진 제방의 풍경도 훌륭하다는 얘기다.

남강과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는 강 건너편 저습지에는 누대에 걸쳐 긴 둑이 지어졌는데, 그 길이가 자그마치 338㎞에 달한다. 얼추 서울에서 함안까지의 거리만큼이다. ‘중국에는 만리장성이 있고, 함안에는 ‘천리장제(千里長堤)’가 있는 얘기는 그래서 나왔다. 하긴 함안의 제방 높이가 낮은 곳이 16m이고 높은 곳은 19m에 달하니 만리장성의 평균 높이인 9m보다 훨씬 더 높다.

악양루의 직벽 아래에는 남강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다. 이 나루에서 “낙동강 강 바람에 치마폭을 적시며…”로 시작하는 노래 ‘처녀뱃사공’의 가사가 만들어졌다.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 윤부길 씨(윤항기·복희 남매의 부친)가 함안의 가야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장으로 가던 중 여기 나루터 주막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그때 군에 입대한 오빠를 기다리며 배를 젓던 뱃사공 처녀를 만났다. 그날 쓴 노랫말을 품고 있던 윤 씨가 1959년 작곡가 한복남 씨에 의뢰해 노래가 만들어졌다. 이곳 나루터가 ‘처녀뱃사공’의 무대라는 사실은, 그러고 나서 40여 년 뒤에 밝혀졌다.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는 지난 2000년 노래비가 세워졌는데 제막식에 아들 윤항기 씨가 참석했다. 여기서 주민들로부터 전해 들은 처녀뱃사공의 뒷얘기 한 토막. 당시 처녀의 나이는 19살이었고 노래에 등장하는 ‘군인간 오라버니’는 23살이었는데, 뱃사공 처녀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오빠는 한 장의 전사통지서로 돌아오고 말았단다.

수생식물들로 가득한 운치 있는 연못가 바위 위에 세워진 정자 무진정. 진초록의 왕버드나무와 느티나무 사이에 들여놓은 정자가 멋스럽다.


# 강변의 정자에서 마음의 칼을 피하다

운치로 보자면 함안에서 악양루보다 한 수 위로 쳐줄 수 있는 정자가 바로 무진정이다. 함안면 한복판에는 왕버드나무와 느티나무 거목이 늘어선 아담한 연못이 있다. 연못은 저마다 채도가 다른 초록으로 가득한 비밀의 정원 같은 모습이다. 인상파 화가가 그린 그림처럼 날씨와 빛에 따라 연못의 느낌이 전혀 다른데, 개인적인 취향으로 보자면 촉촉하게 비 내리는 날의 풍경이 가장 운치있다.

조선시대의 문신 조삼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다는 무진정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 너머 바위 위에 숨듯이 들어서 있다. 담 너머 연못 전체를 정원으로 삼다시피 한 정자는 수생식물들로 가득한 수면 초록빛과 치렁치렁한 왕버드나무와 썩 잘 어우러진다. 정자를 모두 누마루로 설계해 창을 접어 사방으로 활개 치듯 열 수 있도록 한 정자는 소박한 듯하면서도 멋이 느껴진다.

이곳에서는 정자의 자태도 자태지만, 정자를 지은 함안 조씨 가문을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함안 조씨는 조선시대에만 모두 139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을 만큼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학문뿐만 아니라 대쪽같은 성품도 대를 이었다. 고려가 망한 뒤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조열. 그는 정종이 손수 편지를 보내는 정성을 보였으되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의 손자가 생육신 중의 한 명인 조려다. 조려는 세조가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통곡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백이산에 숨어 살았다.

조려의 손자가 바로 무진정의 임자인 조삼이다.

조려와 절친한 사이였던 고향 친구 김수로는 더 대쪽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이 있자 조려와 함께 벼슬을 버리고 함안 땅으로 돌아왔는데, 단종 승하소식을 듣곤 그때까지 쓴 글을 모조리 불태운 뒤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함안 출신 한 명 더. 고려말 성균관 진사였던 이오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함안 산인면에 거처를 정해 ‘고려동’이라 이름 짓고는 평생 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 함안박물관에 피어난 ‘아라홍련’. 유독 꽃잎이 크고 꽃잎의 끝이 선명한 붉은색을 띤다. 성산산성에서 발굴된 700여 년 전의 연 씨앗에서 틔운 꽃이니 고려 때의 연꽃이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뒤에 오는 이들’이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건 당대의 권력에 기대 서슬 퍼런 권세를 누리던 이들보다, 손톱만큼이라도 대의에 어긋나면 미련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줄 알았던 이들의 이름이었다. 생육신 조려의 자취는 그의 생가가 있는 군북면 원북리 일대에 성성하게 남아있다. 그의 위패를 모신 서산서원도, 그가 말년에 은거생활을 했다는 작은 연못을 갖춘 정자 채미정도 다 그곳에 있으니 따로 그의 행적을 따라가봄직 하다.

무진정 연못에서는 해마다 4월 초파일 무렵에 ‘낙화놀이’가 열린다. 연못에 철사로 바둑판 모양의 등줄을 걸어놓고 숯을 빻아 한지로 만 것을 촘촘하게 매달아 놓은 뒤에 불을 붙여 불꽃을 즐기는 놀이다. 호수 위로 떨어지는 화려한 꽃불이 장관을 이룬다. 올해 낙화놀이는 세월호 사고로 연기돼 오는 9월쯤 열릴 예정이라니 겨눴다가 찾아가 보길 권한다. 낙화놀이의 역사는 조선중엽부터 시작하는데, 가을에 낙화놀이를 하는 건 올해가 처음이다.

함안에는 악양루와 무진정 말고도 빼어난 자리에 들어선 정자가 더 있다. 낙동강의 물굽이를 바라보는 자리에 들어선 대산면의 반구정과 합강정이다. 반구정은 낙동강의 물길을 굽어보는 자리에 들어선 정자인데 본래 칠서면 용성리에 있던 것을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여러번 고쳐 지어 정자는 마치 여느 살림집처럼 볼품이 없어졌지만, 앉은 자리만큼은 훌륭하다. 남명 조식의 제자 이길이 반구정을 들렀다가 남긴 시 한구절. “명리의 마당에서 말(言)의 함정에 빠지느니 / 골짜기에 숲속에서 마음의 칼 피하리라 / 백구에게 짐짓 세상사를 잊은 듯이 / 화단을 바라보며 달을 보고 누웠네.” 함안에서 정자를 따라간다면 ‘골짜기 숲속’을 ‘강변의 정자’로 바꿔 읽는대도 뜻은 능히 통한다.

# 700년 전의 어둠 속에서 온 연꽃을 보다

이즈음 함안에서는 연꽃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아라(阿羅)홍련. 경남 함안의 함안박물관에서 한창 피어나고 있는 붉은 연꽃(홍련)의 이름이다. 매화나무 고목 중에는 제각기 이름을 가진 것들이 흔하지만, 연꽃에 이름을 붙여진 건 함안의 아라홍련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왜 이 연꽃에 이름이 붙여졌고, ‘아라(阿羅)’란 이름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아라홍련은 다른 연꽃과는 무엇이 다를까.

그 답이 이렇다. 함안의 성산산성. 삼국시대쯤에 세워진 함안의 산성이다. 몇 차례 발굴이 이뤄지면서 성 안의 연못 자리에서 연 씨앗이 발견됐다. 2009년 4월 함안박물관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로부터 보연 씨앗 10개를 넘겨받는다. 싹을 틔워 키워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박물관은 우선 이 중에서 두 알의 씨앗을 골라 국립지질자원연구원에 연대측정을 의뢰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한 알은 760년 전, 다른 것은 650년 전의 씨앗으로 나타났다.

본디 연 씨는 겉껍질이 워낙 단단해 자연발아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쩌다가 새들이 씨를 쪼아서 구멍을 내는 경우에 싹을 틔우기도 하지만, 그거야 극히 드문 일이다. 누군가 겉껍질을 깨주지 않으면 씨앗은 긴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이즈음 도처에서 피는 연꽃들은 다 뿌리로 번식시킨 것이다.

박물관 측은 농업기술센터와 함께 연 씨앗을 심어 씨담그기(침종)와 싹 틔우기를 시도했다. 그중 세 알이 기적처럼 싹을 틔웠고, 2010년 7월 6일 첫 꽃을 피웠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씨앗이 발아에 성공해 꽃을 피운 첫 사례였다. 700여 년 전의 씨앗이 시간을 건너와 꽃으로 피어난 것이었다. 그게 바로 ‘아라홍련’이다. ‘아라’라는 이름은 함안이 ‘아라가야(안야국)’의 옛 땅이라는데 착안해서 지어진 것이다.

아라홍련은 박물관에 여덟 개의 화분에도, 박물관 입구 한쪽에 조성해 놓은 연밭에도 심어져 있다. 박물관 담 안에서 키우는 것들은 형질을 보존하기 위해 세 알의 씨앗에서 나온 연의 뿌리로만 번식시켜 키운다. 자칫 교잡을 하게 될까 우려해 자식을 보지 않고 형제만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연 씨앗이 맺히면 빠짐없이 다 거둬들인다. 아라홍련이 어디선가 날아든 꽃가루로 수정해 씨앗을 만들고, 그 씨앗을 새가 쪼기라도 해서 발아한다면 자칫 700년 전의 과거에서 온 ‘아라홍련’의 형질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아라홍련은 개량된 이즈음의 연꽃과는 생김새가 좀 다르다. 다시 필 때마다 색깔이 옅어지면서 꽃잎 끝에만 선명한 선홍빛이 살아있다. 꽃잎의 수효가 적은 대신 하나하나가 길고 크다. 단정하고 우아한 느낌의 꽃은 고려 탱화나 불상에 그려지고 조각된 연꽃 대좌의 모습 그대로다.

함안에는 연꽃테마파크도 있다. 공설운동장 주변의 가야시대 제방터에다 조성한 테마파크에는 법수면 옥수늪에서 자생하는 만생종 홍련을 가지런히 심어두었다. 이 연꽃은 경주 안압지 연과 유전자가 동일하다고 밝혀진 것으로, 지난 2007년 서울 경복궁의 경회루 연꽃 복원 품종으로 선정돼 서울로 ‘시집’을 간 품종이다.

함안에는 또 해바라기밭도 있다. 법수면 강주리 강주마을의 구릉에다 촘촘히 해바라기를 심어 둔 곳이다. 낙후돼 가는 마을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주민들이 마을발전위원회를 만들고 4만5000㎡의 농토에 손수 해바라기를 심었다. 해바라기밭의 규모는 소박한 편. 60만여 송이에 달한다는데 그만큼은 안돼 보였다. 해바라기 마을축제는 지난 20일 끝났지만, 노란 해바라기가 구릉에서 물결치는 모습은 이달 말까지 볼 수 있다.


◆ 함안 가는 길 = 함안은 수도권에서 멀다. 교통체증이 없더라도 4시간 이상은 잡아야 한다. 경부고속도로로 대전까지 가서 대전∼통영선으로 갈아타고 진주갈림목까지 간다. 진주갈림목에서 부산 방향 남해고속도로로 바꿔 탄 뒤 함안 나들목에서 나가면 된다. 함안에는 명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니 미리 관광지도부터 숙지하고 움직이는 게 요령이다. 가야읍에서 시작해 함안박물관 아라홍련, 말산리고분군, 무진정을 둘러보고 북쪽의 반구정, 합강정, 악양루를 둘러보고 강주마을 해바라기밭, 어계고택, 채미정 등의 순서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도는 게 가장 효율적이다. 반구정과 합강정까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져 있지만, 내리막길이 워낙 급경사라 차를 놓고 걸어가는 편이 낫다.


◆ 어디서 묵고 뭘 먹을까 = 함안이 여행지로서의 가장 큰 결격사유가 있다면 그게 바로 숙소다. 함안에는 호텔이나 콘도가 없다. 민박이나 펜션도 드물다. 모텔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축협 근처 가야읍의 장미모텔(055-583-5898)이나 황실모텔(055-585-1515)이 그나마 시설이 나은 숙소로 꼽힌다.

함안에는 유독 국밥이나 해장국을 전문으로 내는 식당들이 많다. 한때 우시장으로 유명했던 전통 때문이다. 함안면 북촌리의 시장에는 한우국밥촌이 형성돼 있는데, 이들 국밥집 중에서 대구식당(055-583-4026)이 단연 압권이다. 선지와 한우를 넣어서 칼칼하게 끓여낸 국에다 밥을 말아서 내준다. 밥 대신 국수를 말아 주기도 하고, 밥 반, 국수 반을 섞은 ‘짬뽕’ 메뉴도 있다.

소불고기와 돼지불고기도 인기다. 악양루 들머리 쪽에는 너른 마당을 가진 악양루가든(055-584-3479)이 있다. 민물고기를 푹 고아서 내는 어탕으로 3대를 잇는 집이다. 어탕밥과 어탕국수, 참게탕 등을 내놓는다.

함안=글·사진 박경일 기자 parking@munhwa.com
게재 일자 : 2014년 7월 23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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