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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이라는 이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11. 10. 09:37

‘문인’이라는 이름

유금호 (소설가 ․ 「문학의 집․ 서울」이사)

주변의 딸 가진 부모가 사위 후보로 온 청년에게

“자넨 무슨 일을 하는가?”

라고 물어서

“시를 씁니다.”

혹은

“소설가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때 덥석 청년의 손을 잡으며 반가워할 수 있는 부모가 몇 퍼센트나 될까.

특별한 사례를 빼고는 어느 시대에도 문인들이 사회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가깝게 조선조 선비들 역시 대개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외로웠던 듯 싶다.

그러나 그때는 적어도 정신적 자존감이 있었다.

끼닛거리가 없어도 ‘에헴’ 큰 기침으로 버텨 낼 읿반인들의 존경과 선비로의 자긍심이 있었지만, 오늘날 가치의 다양화, 경박화, 속물화 속에 글을 쓴다는 행위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 속에 내팽개쳐 가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한 때 김관식 시인이 ‘대한민국 시인 김관식’명함으로 통했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었지만, 글을 써도 읽히지 않고 책을 내도 팔리지 않는 불모의 시대 속에 ‘문인’이라는 명칭이 자꾸 왜소해진다.

그런데 다른 차원의 이야기 두 개.

얼마 전 일본의 인기작가 하루키의 신작이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선인세가 15억 이상이었다는 소문이다. 그 책이 많이 팔려 출판사가 얼마나 이익을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가 하면 금년도 노벨문학상이 캐나다의 여류작가 앨리스 먼로라는 발표가 있었다. 단언컨대 가까운 날, 몇 출판사가 경쟁적으로 그의 책들을 번역 출간하여 쏟아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 문단에서도 일부 잡지에서 신진 문인이 몇십 명씩 무더기로 나오고, 그 신인들이 선거로 연결된다는 소문도 있다. 문인이라는 이름이 장식으로 필요한 사람이나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문인’이라는 호칭이 오늘은 별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그것이 축복이고 저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랴.

딸 가진 부모에게 우선 인기가 없어도 스스로 자존감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위무의 세상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