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이주자 간담회의 장면 ▲▲ <꿈꾸는 고물상> 오픈 (사진출처_ 제주문화예술재단 페이스북) |
어느 한 지역의 문화예술 지형을 단순하게 요약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문화예술의 범위가 워낙 광범위한데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 속도와 추세가 가감 없이 반영되는 탓에 '생물'처럼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문화유목민 급증
변화를 가장 실감케 하는 것은 최근의 문화이주 급증세이다. 주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지역에서 문화예술 관련 일을 하다가 지방으로 이주한 이들을 가리키는 신조어가 '문화귀촌자' 혹은 '문화이주자'이다. 제주에도 2~3년 전부터 문화이주자가 늘기 시작해 지금은 문화이주자들의 거점이 되는 마을이 여러 곳 생겼을 정도이다. 물론 이들이 기존의 문화예술계를 '장악'하거나 지역 여론을 리드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 숫자가 점차 늘고 활동영역이 다양해지면서 머잖아 제주 문화예술 지형을 바꾸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된다.
제주 문화이주자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 부류의 양상을 띤다. 하나는, '휴식파'이고 다른 하나는 '유목민'이다. '휴식파'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전면 파업'하고 제주에서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오히려 문화예술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어 보이는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등을 운영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는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유목민'들은 일하는 공간만 제주로 옮겼을 뿐 제주에 오기 전 해왔던 일들을 비교적 그대로 유지한다. 일주일에 한 두 차례 다른 지역에 강의를 나가기도 하고 제주에서 새로 기회를 얻어 관련 업무를 보기도 한다. 매력적인 제주의 자연, 인문 환경에서 얻은 새로운 활력으로 보다 창의적인 일을 하게 되었다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이를테면 '문화유목민'인 셈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바로 이 '문화유목민'이다. 실제로 2011년 제주문화예술재단(이하 재단)의 빈집프로젝트와 2012년 레시던시지원사업에 선정된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 <문화곳간-시선>은 도내 예술인과 문화이주자들이 함께 만든 거주·창작·전시공간이며, 2012년 빈집프로젝트에 선정된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1리 <꿈꾸는 고물상> 등은 6명의 문화이주자들이 감귤보관창고를 마을 커뮤니티 공간 겸 작가들의 창작·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곳이다. 문화기획,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여성 아티스트 다섯 명이 모여 만든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의 '선흘예술작목반'도 흥미롭다. 이들 중 한 사람이 만든 <카페 세바>는 중산간 마을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즈카페. 도내 재즈 마니아는 물론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는 이색문화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선흘예술작목반장 격인 미술치료사이자 작가이자 기획자인 정은혜씨는 마을 부녀회원들을 대상으로 요가교실을 열기도 하고 재단의 생태놀이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마을 축제 때는 미술치료프로그램을 주민들에게 선보이기도 한다.
변화하는 문화행정
여기에 또 하나, 새롭고도 반가운 추세는 제주 문화행정 마인드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이주자의 증가와 활약을 눈여겨 본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최근 읍면지역의 빈 집이나 빈 창고를 사들여 문화예술인들로 하여금 마을 문화공간으로 꾸미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청정한 자연경관에 힘입은 제주올레에 읍면지역의 빈 집이나 빈 창고를 활용한 문화공간들을 연결하는 문화예술올레를 결합시키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주도는 얼마 전 세계적 '물방울 화가'인 김창열 화백으로부터 200여 점의 작품을 기증받아 저지예술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협약을 맺었다. 지금까지 전시나 공연 등 단순히 행사 지원 위주의 문화정책에서 벗어나 제주섬 전체를 문화예술의 섬으로 만들겠다는 행정마인드로 읽히는 대목이다. 게다가 더욱 고무적인 것은 제주도가 섬 속의 섬 가파도에 건강한 자본을 끌어들여 일본의 나오시마 프로젝트와 같은 문화예술 섬 만들기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으나 어쨌든 지방정부가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확산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품게 된 것은 가장 적확하게 미래 비전을 설정한 것이라 평가할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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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문화를 디자인하다
지금 제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디자인 마인드'이다. 제주를 예술가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섬,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와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디자인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눈앞의 실적을 좇거나 관광정책의 일환으로 인위적인 인프라를 건설하고 그것을 관 주도로 끌어간다면 모처럼의 의미 있는 시도가 실패할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다. 죄다 동네 벽화만 그리는 것을 공공미술의 전부로 알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적어도 그 단계를 벗어났다. 이제는 도시와 시골, 섬 속의 섬들을 하나로 묶고 잇는 철학적 관점에서의 콘셉트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고민할 때이다. 왜 제주에 문화이주자들이 늘고 있는가, 그들을 불러 모으는 제주의 매력은 무엇인가를 철저하게 분석한다면 예술과 영감의 섬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담을까에 대한 보다 성숙한 고민을 전 사회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과정을 거쳐 인프라의 크기와 모양과 기능을 정해야 한다.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 행정, 자본(기업)의 역할 분담도 무척 중요하다. 기업의 투자와 설계는 글로벌 수준으로, 지역주민과 예술가의 창의성은 최대한으로, 행정은 충분한 지원과 최소한의 조정으로 각각 그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개발-협력-지원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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