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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름다운 머리/문숙자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5. 21. 18:22

 

너무 아름다운 머리

 

문숙자

 

딸아이 옷장 서랍을 정리하다 흰 봉투 하나를 발견했다. 무엇을 이렇게 소중하게 숨겨 놓았을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모근이 상하지 않게 뽑혀진 머리카락, 싹둑 자른 머리카락이 꽤 많이 들어있다. 아, 그렇지. 기억 나. 내 머리카락이야! 4년 전 내 머리를 빡빡 밀기 전에 딸아이가 간직해 두었던 것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엄마, 걱정 마. 병이 다 나아도 머리카락이 다시 나오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이식해 줄게. 그러려면 지금의 엄마 머리카락을 잘 간직해야 한다며 뽑고 자르고 해서 깊이 넣어둔 것이다. 이젠 웬만한 일로는 눈물 흘리지 않으리라 작정했건만, 아이의 지극한 마음을 떠올리며 청승맞은 내 눈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다. 이제 필요 없으니 그냥 버릴까?

 

예전부터 나는 머리 결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가끔씩 결이 좋아지는 제품을 따로 구입해서 쓰기도 하고, 모근이 튼튼해지도록 검정깨나 검정콩을 먹는 언니의 것을 한 주먹씩 몰래 먹기도 했다. 덕분이었는지 따로 미장원에 다니지 않아도 늘 윤기가 흐르는 건강한 머리카락을 갖고 살았다. 어느 날부터 머리를 감을 때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졌다. 누군가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머리부터 쉽게 빠진다는 말을 해주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머리를 말린 후 손으로 쓸어내리면 기분 좋은 부드러움을 손으로 만지작거렸고, 빛을 받으면 더 차랑차랑하게 흔들어 주는 머리카락 이었으니까.

4년 전 가을날이었다. 호된 감기 몸살을 앓다 훌훌 털어내고 외출을 했는데, 이마에 내려앉는 햇살이 심하게 반짝거렸다. 그 반짝거림에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햇살은 나를 낚아채듯이 잡아끌었다. 세상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나를 안아주다니! 보드라운 비단 같은 햇살에 저절로 몸을 기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나를 가뿐히 들어 올리더니 거칠게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해 바른 양지에 나는 그만 주저 앉아버린 것이다. 팔을 뻗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빛의 흩날림을 잡으려 허우적거렸으나 꼼짝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간격으로 햇살은 나를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즈음 머리카락이 쉽게 빠지고 어지럼증을 느낀다 했을 때 몸에 이상이 있었음을 눈치 챘어야 했는데, 괜찮겠지 하고 한 계절을 보내고 그 해 성탄 이브 날에 나는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빛을 피하면 무엇보다도 안전함을 느꼈다. 어두운 데 앉았거나 누워있으면 수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금은 살 것 같았고, 수근덕거리며 내 말을 하는 수많은 입술이 보이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빛이 사라진 검은 방에선 검은 시계의 그림자가 죽은 듯이 검은 발자국을 찍으며 제 자리 걸음을 했고, 창문 밖에선 여전히 반짝거리는 맑음이 나를 불러내었다. ‘부르지 말라고. 나만 보면 아주 잠시 안아줬다가 금방 바닥에 던져버릴 거면서…….’ 아무래도 좋았다. 오래도록 나의 삶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끔 검은 방에 사는 더듬이가 긴 벌레처럼 외롭고 헐렁한 말들을 더듬더듬 더듬거리는 습관이 늘어났다.

“만약에 딱 하루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하겠니?” 더듬거리며 꾸역꾸역 독한 약을 먹고 구역질을 견뎌야 했다. “그렇다면 누구와 함께 있고 싶니?” 내가 나에게 끝없이 더듬거렸으나 이 질문에 답을 내기는 싫었다. 그것은 내 생이 딱 하루 남았을 것을 예감 했을 때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을 하며 지내는 사이, 독한 약을 견뎌내지 못하고 머리카락은 뭉텅뭉텅 빠져나가 어느새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통과 쓰라림으로 눈시울이 붉어진 한 마리 외로운 몽상가로 변해가는 동안 얼마 남아있지 않는 머리카락마저 꺼실한 지푸라기 같았다. 마치 털갈이를 하는 짐승마냥 스윽 손길만 스쳐도 후두두 쏟아져 내렸다. 이 때 즈음 딸아이가 내 머리카락을 뽑아서 간직해 놓았을 무렵이었다. 이까짓 머리가 뭔 대수라고. 이렇게 나는 죽어 가는데 무슨 미련이 있어 검은 털 따위에 집착하는가 싶어 내친 김에 숭덩숭덩 가위질을 시작했다. 허락도 없이 내 몸을 빠져나가는 예의 없는 검은 털을 지켜보고 있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쫓아내 버리는 것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다. 그리곤, 곧장 미장원으로 달려가 삐죽삐죽 제 멋대로 남겨진 머리의 마무리를 부탁했다. 기계음소리가 멈추고 심호흡을 길게 내뱉은 다음 눈을 떴다. 기다렸다는 듯이, 거울 속으로 마중 나온 머리와 얼굴의 경계선이 없는 사람. 드디어 눈이 짓무른 사람끼리 마주 앉았다. 휘청거리지 말자. 아, 눈물 머금고 산다 해도 세상에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은 필생의 마지막이 남아 있을 줄 누가 알랴. 삶이 별건가. 기약 없이 나는 독한 약을 먹고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고, 병자의 무거운 몸으로 젖은 바람에 동그란 머리를 대어 주는 것도 괜찮겠다. 나는 가끔 혼자 쓸쓸히 앉아 검은 하늘을 걸어 다니는 달의 행로를 추측하며 살면 되는 것이다. 남은 생을 이런 모습으로 살라 해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찰랑거리던 나의 청춘이 훅 지나갔다 해도 억울해하지 않기로 했다. 문득문득,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의 그림자가 여자였던가……?’

 

거울 밖의 사람이 거울 속의 사람에게 말을 걸을 때마다 딸아이는 반지를 귀걸이를 두건을 가발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랬다. 절대고독의 순간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딸아이가 늘 옆에 앉아 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어쩌면 그리도 나를 향한 초점을 벗어나지 않으려 했는지. 아이의 촉이 온통 내게로 쏠려 있음을 수시로 느끼고도 남았다. 이런 관심이 번번이 귀찮기도 했지만 절대고독을 이겨내게 만든 아이를 품에 안을 때마다 검게 그을린 내 가슴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숨을 놓아버리고도 싶었던 고독의 순간에 정녕 내 인생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깟 머리카락쯤이야, 이런 아픔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일깨워 주기도 했다. 이렇듯 사랑이 많은 아이의 불안을 없애 주는 것 또한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4년이 지난 지금 나의 머리는 어깨 밑으로 내려올 만큼 많이 자랐다. 세 번을 빡빡 밀고 다시 얻은 소중한 머리카락을 빗질 할 때마다 떠오르는 지나간 시간의 아우성. 참 오래오래 아이의 옷장에서 살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호흡들이 숨죽이고 있었을,

 

‘너무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배웅한다!’

 

 

 

 

 

 

문숙자 : 2002년 문학세계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