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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자락길 기행 � ___ 김덕우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6. 1. 21:05

소백산 자락길 기행 � ___ 김덕우

 

그냥 넘기엔 아직 가슴 아픈 고갯길

김덕우

 

아직 빗물을 머금고 매달려 있는 이파리가 힘들어 보이기보다 아직은 풋풋할 것 같은 것은 이 산속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몰려가는 구름 사이로 슬쩍슬쩍 비쳐주는 가을 햇살에 굴절되는 물방울은 그 빨간 잎들을 다시 파랗게 물들일 듯 싱그럽다. 손을 뻗어 그 싱그러움을 움켜잡아 본다. 새로운 기운이 가슴 속으로 밀려온다. 오솔길 옆으로 쌓인 잎갈나무 낙엽이 머금고 있는 물기만큼 더 붉다. 황토를 뿌린 것 같다.

여름부터 넘으려고 별러왔던 일이었다. 소백산 자락길 열두 자락을 다 돌고, 11자락과 8자락을 잇는 샛길을 새로 개척하자고 말만 먼저 내놓고, 새 길을 개척하던 날 오지 못해 벼르고 벼르던 일이었다. 또 다녀온 동료들이 어떻더라 하는 이야기에 같이 동참하지 못한 미안함이나 속상함 같은 것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변해 진 모습에 대한 궁금함이 더 컸었다. 이 고개는 20년 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걸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1994년 6월, 계간 『영주문화』 10집 발간을 자축하며 특별히 기획했던 사진기행이었다.

 

■순흥에서 영월까지 1박 2일

자라면서, 고향의 구석구석에 스며있는 정축지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문을 가졌던 것이, 금성대군이 하필이면 그 때, 순흥으로 유배를 왔던가? 하는 것이었다. 단종의 영월과 금성의 순흥 사이에 소백준령이 가로막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맞붙어 있는 고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성을 순흥으로 보낸 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그 사이에 서서 숙질간의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붙들어 보고 싶었다

──『영주문화』 10호(94년 7월 31일)

순흥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피끝’이라는 마을에 얽힌 이야기이다.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영남의 선비들과 단종 복위를 위해 비밀리에 계획을 하던 중, 관노의 밀고로 실패했고, 그 일에 가담했던 선비들을 청다리 근처에서 처형했다. 목을 벤 피가 10리를 흘렀고, 그 피가 끝난 곳을 ‘피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청다리 아래에서 거두어 기르게 되었는데, 아이가 울면 “청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말이 그 때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은 수 있을까? 얼마나 큰 고을이었기에 그 많은 사람이…. 순흥의 번성을 이야기할 때, 30리를 처마 밑으로 비를 피하며 다녔던 고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 이 고을에서 나고 자라 소수서원을 지키고 있는 박석홍(학예연구사)은 그 사건 이전의 순흥 향토지를 찾을 길이 없다며, 이곳을 연구하려면 주변 고을의 향토지를 찾아서 살펴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한다. 그렇다면 사람만 희생당한 것이 아니라, 문서까지 모두 불사른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더 억울하다.

토요일 오후 소수서원에서 길 건너편에 있는 금성신단에서 출발했었다. 두레골 서낭당, 고치재 산령각, 의풍 삼거리, 김삿갓묘, 대야리 관풍헌, 청령포 그리고 장릉으로 이어지는 순흥에서 영월까지 1박 2일을 걷는다는 기획에 동료들은 마치 전쟁터로 나서는 장병을 보내듯 환송했다. 아마 그 때 머릿속엔 이런 구상을 했던 것 같다.

“그래 이틀 동안은 금성과 단종 사이를 오갔던 그 때 그 밀사처럼 걸어가 보는 거야.”

그 사람만큼은 그 내막을 잘 알고 있을 것 같아서였다. 녹음이 한창일 때여서 산길을 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산을 뚫고서라도 걸어 가리라는 생각이 얼마나 무모했다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두레골 서낭당까지는 그럭저럭 갔는데 두레골에서 좌석으로 넘어가는 자작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길을 찾아보았지만, 꽉 찬 억새와 칡넝쿨이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하게 해버리고 만다. 그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 마을 아이들이 고개 너머에 있는 좌석분교까지 다녔다고 하는데, 이제 아이들이 없는데, 이제 그 길이 이 마을에 무슨 소용이랴. 할 수 없이 면소재지로 다시 내려가서 차량으로 고체재까지 이동해 버렸다. 그리고 17년이 지나 이 길을 개척했다. 소백산 자락길의 한 코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소백산국립공원이 들어선 후 30년 만에 옛길을 회복한 셈이다.

영월까지의 길은 생각보다 짧았다. 영주에서 단양을 거쳐 영월까지 간다면 거의 300리는 될 것 같은데, 고치재를 넘어 마락을 지나니 의풍이고, 의풍에서 물굽이를 몇 번 도니 김삿갓묘이고, 또 거기서 영월 소재지까지는 지척이니, 순흥에서 영월까지는 100리 정도이다. 어쩌면 그 옛날 인편이 된 그 사람은 하루에 이 길을 왕복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 때 들었었다.

 

■단종과 금성의 마음이 전달되던 길

아침부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소리도 없이 오락가락하던 비가 점심 때가 지나서야 멈추었지만 아직 날씨는 맑지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은 벌써 고치재에 가 있었다. “날씨도 그렇고, 날도 저물어 가는데….” 하면서 다음 날로 미루자는 아내에게 드라이브나 하자며 길을 나섰다.

영주에서 순흥 쪽으로 10여 리를 가면 피끝이다. 피끝에 서서 소백산을 바라본다. 소백산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면 소백산이 새처럼 보인다. 비로봉이 머리라면 국망봉과 연화봉은 날개이다. 봉우리 끝까지 오르고 있는 단풍은 한 마리의 붉은 새가 우리를 맞이하며 날갯짓을 하고 있는 듯 했다. 아내도 풍경에 빠진 듯 했다. 차창으로 지나는 은행나무는 비를 맞아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벚나무 이파리는 아직 붉게 물들어 가을을 뽐내고 있었다.

고치재는 좌석리에서부터 걸어서 오르려고 했었다. 하지만 큰 산 아래의 가을 해는 생각보다 짧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며, 잎갈나무와 그 낙엽이 펼치는 평화로운 풍경의 감상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고갯마루에 있는 산령각은 두 분의 신령을 모시고 있다. 한 분은 단종이고, 또 한 분은 금성대군이다. 여기 사람들은 단종은 태백산 신이 되었고, 금성은 소백산 신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월에서는 단종이, 영주 쪽에서는 금성이 신격화 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서낭당이 두레골 서낭당이다.

1990년 두레골 서낭제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정월 열나흘 새벽, 서낭당 앞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을 했다. 70고령의 어른들과 함께 24시간을 지내며 그들의 삶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금성대군을 보았었다. 200년 가까이 지내오는 제사였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그 때, 미신이다 뭐다 하며 서낭당을 부수던 그 때에도, 누가 뭐라고 하든 묵묵히 이 일을 지켜온 분들이었다. 정월 첫 장에서 중 소[牛]를 한 마리 사서 제삿날까지 정성을 다해서 먹이고, 마을에서 가장 정결한 집의 사람을 선별해서, 그 집 남자를 열흘 동안 합숙을 시켜가며 몸을 깨끗이 하여 보름에 제사를 드리게 했다. 그리고 제를 올리며, 나랏님(대통령)부터 마을의 집집마다 복을 달라고 그 분에게 빌었다. 뱃사람처럼 삶의 터전에 생사를 걸어둔 것도 아닌 산골에서 까다로운 의식을 지켜가며 이 일을 해온 그들의 삶은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의 의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참 많았다.

그 날 산령각에서 잔을 올렸었다.

“유세차 갑술년 유월 스무닷새, 임 앞에 머리를 숙여 예를 올리나이다. 만백성의 오열 속에 태백산 신이 된 대왕님, 소백산 신이 된 대군님, 임께서 가신 길은 너무나 억울한 길이었음을 잘 알고 있나이다. 그리고 저 세상에서도 백성들을 사랑하시어 아직까지 은총을 내리고 있음을…….”

‘오늘 술잔이라도 챙겨야 했는데….’ 뉘우쳐 본다.

마락으로 내려가는데 벌써 날이 어둡다. 전조등을 컨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깜짝깜짝 놀란다. 하기사 말이 떨어진 마을이라 마락馬落이라지 않는가? 경상도 오지인 마락, 여기서 흐른 물은 한양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임금은 한양에서 경상도 물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이 곳을 경상도로 편입시킨 것일까? 마락, 남대리, 의풍은 이미 그 이전부터 순흥 도호부 땅이지 않았던가?

전에 본 마락은 폐교가 된 학교를 고쳐 만든 야영장만 덩그렇고, 인가가 두어 채 뿐이었다. 그런데 새로 지은 집들이 몇 채 더 보인다. 외지 사람들이 들어온 모양일까? 아니면 팬션일까? 어두워서 식별이 안 된다. 아내는 빨리 돌아가자고 한다.

 

■다시 찾은 금성신단

돌아오는 길에 금성신단에 들렀다. 하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서성거리다가 압각수 아래로 갔다. 잎이 떨어진 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정축년 사건 이후 역모逆謀의 고을로 버려졌던 순흥.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웠던 주세붕도 가고 순흥을 사랑했던 이황도 갔지만 순흥 사람은 희망을 잃지 않았고 한다. 왜냐하면 죽어버린 한 그루의 나무 때문이었다. “압각수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군도 복위 된다.”는 말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흥사람들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영남 선비들의 목이 베어지던 날 함께 죽었던 나무가 숙종 7년 밑동부터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폐부된 지 228년(숙종 9년)만에 순흥부가 회복이 된다. 그래서 압각수鴨脚樹란 이름까지 하사下賜받고 이제 1,200년의 수령을 자랑한다.

이 은행나무와 함께 명예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 금성신단錦城神壇이다. 압각수 바로 아래에 설치된 금성단에서 전국에서 모인 유림儒林들은 봄·가을로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정축년에 희생된 의사義士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두레골 서낭제가 초군청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받드는 제사라면, 이곳은 유림의 제사이다. 금성대군은 그렇게 순흥 사람들에게 신앙적 대상이 되었다.

비석 위로 내린 은행잎을 손에 담아 후~ 하고 불어 본다.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화두가 다시 떠오른다. “정말일까? 금성대군이 거사를 준비하였을까?” 두레골 서낭제에 동행을 하면서도, 영월까지 1박 2일 기행을 하면서도 그 생각이었다. 그리고 1980년 광주에서 희생되었던 민중들을 생각하며, 이곳을 생각했었다. 오늘 광주는 민주성지로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순흥은 228년의 공백을 끝내 뛰어넘지 못하고, 옛 영화만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쓰라린 역사는 아직 우리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다. 그래서 지역 사람들은 풀지 못한 문제를 풀듯이 숙제를 한다. 시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창작연극도 몇 차례 만들어졌다. 올해도 새로운 연극을 만들고 있다. 제목이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라고 한다. 무성한 압각수처럼 새로운 문화가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 잉태할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압각수 가지가 바람에 일렁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옛사람이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같이 손짓을 한다. 오늘 저녁 「주계별곡」을 다시 꺼내 봐야겠다.

산세는 채봉이 날아오르려는 듯 지세는 옥룡이 빙빙 돌아 서린 듯, 푸른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을 안고,

향교 앞 지필봉과 그 앞에는 연묵지로, 문방사우를 고루 갖춘 향교에서는, 항상 마음과 뜻은 육경에 스며들게 하고,

그들 뜻은 천고성현을 궁구하며 부자를 배우는 제자들이여,

아! 봄에는 가악의 편장을 읊고 여름에는 시장을 음절에 맞추어 타는 광경, 그것이야 말로 어떻습니까?

──안축의 「죽계별곡」 3장 중에서

 

 

김덕우 / 2005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한국녹색시인협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 영주문화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