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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초를 씹는 계절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5. 7. 11:18

 

낙타초를 씹는 계절

동아일보 2013-05-03 03:00:00 기사수정 2013-05-03 04:58:24

 

 

문정희 객원 논설위원·시인

5월이다. 누군가의 시구(詩句)를 인용하여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부르던 미디어들이 일제히 “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상투적으로 부르고 있다. 상투어(cliche)는 신선함과 창의력을 둔화시키므로 문학에서는 지극히 경계하는 것 중 하나이다. 금년 5월은 더구나 여왕과 장미를 노래하기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사방에 치솟아 있음을 보게 된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隊商)들처럼 등에다 짐을 잔뜩 실은 개성공단 입주 기업의 자동차들이 뒤뚱거리며 도라산을 넘어오는 것을 보며 마음속에서 어떤 끈 하나가 쿵하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운전석의 시야만 겨우 동전 크기만 하게 뚫어놓고 자동차 지붕까지 짐을 쌓아올린 기업들의 철수 행렬은 경제적 손익만이 아닌, 오래 참고 견디던 비명이 터져 나온 것처럼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그 행렬 앞에 펼쳐진 길이 당분간은 사막처럼 메마른 모래 바람으로 뒤덮일 것 같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회생(回生)의 기미가 쉽게 안 보이는 나라 안팎의 문제들, 그중에서도 북쪽에서 들려오는 핵과 미사일 뉴스와 함께 이어지는 이런 정경은 진실로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저 무거운 짐을 실은 대상들이 사막을 무사히 건너 평화로운 마을에 도착할 날은 언제일까.

 

지금 이 순간이 사막의 낙타가 육봉(肉峰) 속에 간직한 물과 지방을 다 소비한 후 마지막으로 씹는다는 낙타초(駱駝草)를 씹어야 할 시점은 아닌 것일까. 이 눈부신 녹음의 계절에 메마른 가시풀 낙타초를 떠올리며 희망을 찾아보지만 복잡한 이념의 문제와 정치, 경제 논리를 한마디로 풀어 낼 묘안은 좀처럼 떠오르질 않는다.

 

낙타초는 사막에서 자라는 풀로 수분이 말라 줄기가 날카로운 가시로 변하고, 가시 끝엔 신경을 마비시키는 물질이 들어 있는 식물이다.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순간이 다가오면 드디어 낙타는 이 낙타초를 뜯어 먹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뾰족한 가시로 혀와 입과 목을 찔러 솟아나는 자신의 피를 마시며 절명의 시간을 이어간다고 한다. 낙타가 씹는 고통의 가시! 스스로 만든 상처에서 솟는 피를 마시며 끝까지 사막을 걸어가야 한다는 점에서 낙타초는 삶의 화두(話頭)로 삼을 만하다.

 

실제로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먼 길을 떠날 때면 마음속에 나만의 낙타초를 품고 떠나기도 했었다. 홀로 어떤 일과 부딪치며 혹은 낯선 곳을 떠돌며 낙타초를 삼켜야 하는 순간과 부단히 맞닥뜨렸으며 그것은 그 긴 여행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되기도 했다. 그렇게 타는 갈증과 스스로의 피를 삼키는 시간을 건너야만 당도할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스스로의 고통을 깊이 들여다보며 꺾인 무릎을 펴고 수없이 다시 일어서야만 하는 곳이 삶인 것 같다.

 

국가이건 개인이건 멀리서 보면 무사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지만 뜻밖에도 높은 절벽 앞에 가로놓일 때가 많고, 예상하지 못한 천 길 벼랑 앞에 아득하게 서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벼운 붕대 같은 위로와 치유의 처방만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깊은 근원에 이르는 아픔을 치르며 건너가는 벌판, 낙타초를 씹으며 피를 삼키며 건너고 건너서 비로소 당도한 곳이 진정한 성공이요,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 눈부신 계절에 떠올려보는 가시나무는 가장 본질적 질문인 동시에 대답 같기도 하다. 가시나무는 무엇보다 목적지가 곧 가까워 옴을 감지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감 같아 조금 설레기까지 한다. 연전에 나는 생명의 근원인 물을 주제로 한 시집을 묶으면서 그 첫 페이지에 물이 아니라 물의 부재(不在)로서의 시(詩) ‘낙타초’를 실었다.

 

‘사막에 핀 가시/낙타초를 씹는다/낙타처럼 사막을 목구녕 속으로 밀어 넣고/솟구치는 침묵을 심장에다 구겨 넣는다//마른 땅 물 한 모금을 찾아 천 길 뻗친 뿌리가/사투(死鬪) 끝에 하늘로 치솟아/허공의 극점을 찌르는/비장한 최후//뜨거운 모래를 걷는 날카로운 맨발로/어둠 속 별 떨기 같은 독침을 씹는다//새처럼 허공을 걷지 못해/제 혀에서 솟은 피/제 목에서 흐르는 선혈로 절명을 잇는/나는 사막의 시인이다’(시집 ‘카르마의 바다’ 중 졸시 ‘낙타초’ 전문)

 

 오늘 사방에 솟아 있는 날카로운 가시들은 그러므로 이제 사막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다시 강조하고 싶다. 아마도 낙타의 행렬은 접힌 무릎을 우두둑 펴고 무사히 목적지에 닿게 될 것이다.도라산을 넘어오는 행렬들…. 그 속에서 울먹이며 낙타초를 씹던 사람들, 그리고 세상 어느 사막에도 없는 이상한 행렬을 화면으로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눈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5월은 가시나무에서 장미가 피는 계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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