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언어여 침을 뱉어라 (선과 후기현대시의 방향)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3. 23. 16:54

 

 

언어여 침을 뱉어라 (선과 후기현대시의 방향)

이승훈

 

1. 후기현대와 시뮬라시옹

 

나는 그동안 우리 시의 새로운 방향이 선(禪)과 함께 선을 통해 선을 공부하면서 전개될 수 있고 전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몇 편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시는 무슨 영원한 게 아니라 언제나 시대의 산물이고 따라서 시대가 변하면 시 역시 변해야 하고 우리는 지금 이른바 21세기를 살고 이 시대를 일부에서는 정보화 시대 혹은 후기자본주의 시대라고 말한다. 20세기를 지배한 시가 이른바 현대시, 모더니즘이라면 새로운 시대의 시는 이런 현대성을 미적으로 극복하는 후기현대성을 지향하고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말이 쉽지 시의 경우 후기현대성의 미학, 철학, 세계관에 대해서는 주장들이 분분할 뿐이고 이것이 우리시 나아가 우리 문학의 한계이고 문제점이다.

 

이런 한계를 뚫고 나가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고 최근의 우리 시단이 생산하는 담론들은 이런 문제와는 담을 쌓고 아예 외면하고 아직도 19세기적 서정시론 아니면 20세기 모더니즘 시론 그것도 한물 간 신비평이다. 이런 시론들이 우리시의 새로운 방향, 말하자면 미적 현대성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무슨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고 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보수적인 발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내가 그동안 선과 관련해서 몇 편의 글을 쓴 것은 요컨대 우리시의 후기현대성을 선의 문맥에서 이해하고 그 철학적 사상적 토대를 거기서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런 노력은 그러니까 그동안 서양의 문맥에서만 읽어온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반미학을 동양적 문맥, 특히 선불교적 문맥에서 새롭게 읽고 우리대로의 새로운 미학/반미학을 세우려는 노력과 통한다. 공부하기에 따라서는 이런 노력은 21세기의 예술과 시의 방향을 제시하고 동양과 서양의 대화, 넘나들기, 경계 해체를 통해 서구 지배적이었던 현대시의 흐름을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새로운 논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서구 종속적인 문학 이론을 극복한다는 의미도 띤다.

 

미적 모더니즘은 기호의 자율성을 강조하지만 이 자율성은 내적인 모순을 드러내고, 말하자면 기호 자체가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비판되고 이때 기호 자체란 말은 현실과 관계없다는 것, 그리고 기호와 기호의 차이가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을 뜻한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이런 자율성의 공간은 이른바 탈영토화를 의미하고 기표들의 무한한 사슬 앞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무력감이고 기표는 아무 것도 생산할 수 없고 단지 우리를 억압한다는 점에서 비판된다. 따라서 모더니즘을 극복하는 문학은 다시 재영토화를 추구하지만 이 추구는 과거, 곧 영토가 있던 시대로의 퇴행, 말하자면 리얼리즘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나는 들뢰즈가 말하는 반기표작용적 체계를, 그러니까 기표작용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기호계를 선불교와 관련시켜 후기현대성을 해석한 바 있다.(이승훈, ‘선과 모더니즘’, 시선, 2003, 창간호)

 

물론 후기현대성에 대해서는 이론가들마다 주장이 다양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이른바 시뮬라크르simulacra로 정의한 보드리야르Baudrillard의 주장은 이제 거의 고전적 가치를 띠고 그만큼 설득력이 있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반미학의 이론 정립에 폭 넓게 적용된다. 시뮬라크르란 과연 무엇인가? 다음은 보드리야르의 말.

 

추상의 매력을 낳았던, 어떤 것에서 다른 것 사이에 개재되었던 지고의 다름이 사라져버렸다. 지도의 서정과 영토의 매력, 개념의 마술과 실재의 매력을 낳는 것은 다름이기 때문이다. 지도와 영토를 이상적으로 일치시키려는 지도 제작자들의 광적인 계획 속에서 절정을 이루고 또 수그러든 재현적 상상 세계는 시뮬라시옹 속에서 사라진다. 이 시뮬라시옹의 작용은 핵분열적이고 발생론적이지 전혀 사변적이거나 담론적이지 않다. 사라져버린 것은 모든 형이상학이다. 더 이상 존재와 그 외양을 나누던, 실재와 그 개념을 나누던 거울이 없다. 더 이상 상상적인 공통분모가 없다. ―실재는 이제 합리적일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실재란 더 이상 이상적이거나 부정적인 어떤 사례에 빗대어 측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재는 이제 조작적일 뿐이다.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크르들의 자전’, 시뮬라시옹, 하태환 옮김, 민음사, 1992, 15-16)

 

 

이 글을 옮긴 하태환도 지적하듯이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이 시대, 곧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은 다름, 차이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현대사회가 차이나 대립을 강조한다면 후기현대사회는 차이를 제거하고 그런 점에서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적 특성도 부정된다. 소쉬르에 의하면 의미는 기호들의 차이가 생산하지만 후기구조주의자들 예컨대 데리다는 의미를 생산하는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 말하자면 절대적 차이, 흔적, 차연을 강조한다. 그러나 보드리야르는 이런 절대적 차이마저 부정하고 제거한다.

 

그러므로 지도와 영토의 일치를 강조하던 재현적 상상 세계는 사라지고 재현 역시 지도를 그린다는 점에서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원본이 없는 시뮬라시옹의 세계는 하나의 세포로부터 그와 똑같은 다른 세포가 증식하듯이 코드의 무한한 복제가 가능한 세계이다. 모든 형이상학은 외양/본질, 사물/존재의 대립을 강조하기 때문에 시뮬라시옹 속에서는 형이상학도 사라진다. 시뮬라크르는 가상, 사이비실체, 가장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원본이 없는, 그러니까 원본/이미지, 실재/헛것이라는 2항 대립체계를 벗어나는 그런 이미지이고 보드리야르에 의하면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헛것이고 제 3의 현실이 된다. 시뮬라시옹은 이런 시뮬라크르가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나는 이 글에서 시뮬라크르를 가상적 실체라고 번역한다.

 

리얼리즘이 원본(현실)을 복제한다면 모더니즘은 복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언어 공간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지향하는 것은 이런 자율성을 전제로 자율성과 함께 자율성을 통해 존재 찾기, 의미 찾기이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은 표면/심층, 현상/본질, 언어/의미라는 2항 대립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경계를 허물고 원본이 없는 이미지, 2항 대립의 해체, 복제의 복제로 나타나는 가상적 실체의 세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뮬라시옹의 미적 실천이고 이런 실천이 동양적 사유, 특히 선불교와 맺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많은 이론가들이 지적하듯이 시뮬라시옹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자본주의적 허무의 세계이고, 자본주의와 손을 잡는 미학이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바우만Bauman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방가르드의 한계 혹은 아이러니로 요약된다. 그는 아방가르드가 의도는 현대적이었지만 결과는 후기현대적이고 혹은 의도는 근대적이었지만 결과는 탈 근대적이라고 말한다. 아방가르드는 이 시대에 오면서 상업주의와 결탁하고 따라서 최초의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공격, 위반, 투쟁을 지향하던 의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자기 파괴의 극한에서 더 이상 나갈 방향을 찾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포스트모던 아방가르드라는 말은 모순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이 모순을 극복하는 일, 그러니까 이 시대 아방가르드의 한계, 한국이든 미국이든 전위 예술의 한계를 돌파하고 전위 예술의 아이러니를 극복하고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출구와 방향을 선불교의 사유와 실천에서 찾자는 게 내 글의 주제이다. 따라서 에코Eco가 지적하고 에코의 지적과 암시와 제안을 따라 아방가르드의 한계가 라우센버그Rauschenberg의 이른바 백지 회화 혹은 공백의 회화로 나타나고 존 케이지Cage의 침묵의 음악으로 나타나고 이런 예술은 영원한 혁명을 꿈꾸지만 결국은 자기 파괴로 끝나고 더 이상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결국은 아방가르드는 종말을 맞는다는 게 바우만의 주장이다. (이상 Bauman, Postmodernity and Its Discontents, Polity Press, 1997, 98-100 참고)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서양 중심의 주장이고 동양적 사유, 특히 선불교적 사유에 의하면 이런 한계는 축복이 된다. 내가 존 케이지의 예술, 전위 예술, 포스트모더니즘을 선과 결합시켜 새롭게 해석한 것은 이런 문맥에서이다. (이승훈, ‘선과 케이지’, 시와 세계, 2003, 겨울호, 2004, 봄호)

 

 

 

2.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가 축복이라? 그렇다. 언제나 한계나 위기는 축복이고 축복은 축축한 게 아니다. 일찍이 나는 황지우, 이성복, 최승호, 박남철같은 1980년대 시인들의 새로운 특성을 이른바 해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하면서 다소 성급하게 정의한 바 있고, 아니 그 앞 세대 시인들인 김수영, 김춘수 같은 시인들에게도 그런 증후가 나타난다고 주장한 바 있고 이런 주장은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이런 정의나 판단은 어디까지나 우리시의 역사, 문맥, 전통을 전제로 한 것이지 서양의 문맥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시의 새로운 양상을 서양의 범주로 안경으로 들여다 본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이고 한국적 해체이다.

 

그 후 황지우는 시집 『게 눈 속의 연꽃』(1990)을 비롯한 여러 시집에서 1980년대적 실험, 파괴, 해체를 동양적 사유, 특히 불교적 사유에 의해 사유를 통해 사유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고 이성복은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2003)에서 상호텍스트성을 실천하고 최승호는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2003)에서 온건하긴 하지만 불교적 사유를 전개한다. 이런 사정은 우리시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이 일단 불교적 사유를 지향하고 이런 지향은 서양의 예술적 위기가 동양의 사유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말하는 선이나 선적 태도는 그동안 심심치 않게 논의되던 전통적 선시나 이런 선시를 모방하는 일군의 보수적인 시인들, 예컨대 오세영, 최동호, 조정권, 이성선 같은 시인들의 작업과는 관점을 달리 한다. 달리 한다는 것은 이들은 한때 최동호가 주장한 이른바 정신주의에 동의하는 것 같고 따라서 정신주의를 실천한다고 생각되고 내가 말하는 선적 태도는 이렇게 무슨 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점에서 무슨 본질을 강조하는 태도가 아니다.

 

나는 지금도 무슨 이 세계에 무슨 본질이 있고 더구나 정신이 본질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2항 대립 체계를 사유의 기본으로 하는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이런 부정은 이미 선 불교가 실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만시지탄은 있지만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방향, 특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시인들의 새로운 방향을 생각하면 晩時之歎이 아니라 早時之悅(?)이고 이제 비로소 때가 무르익었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철학이든 사상이든 예술이든 시대와 제대로 만나야 하고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방향이 선불교와 만나는 것은 이런 시대성을 전제로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가 선사상을 부르고 선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극복해야 한다. 어떻게?

 

 

 

처음 본 모르는 풀꽃이여, 이름을 받고 싶겠구나

내 마음 어디에 자리하고 싶은가

이름 부르며 마음과 교미하는 기간,

나는 또 하품을 한다

모르는 풀꽃이여, 내 마음은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된다,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고

흔들리는 풀꽃은 냉동된 돌 속에서도 흔들린다

나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황지우, 「게 눈 속의 연꽃」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시의 모티브는 김춘수의 ‘꽃’과 ‘꽃을 위한 서시’이다. 그런 점에서 황지우는 역시 황지우답게 남의 시를 그것도 그 유명한 김춘수의 시를 모티브로 하고 따라서 이 시는 김춘수의 시와 대화적인 관계에 있고 아니 투쟁적인 관계(?)에 있고 이런 기법이나 방법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후기현대성과 통한다. 그러나 이 시는 단지 후기현대성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김춘수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부정하고 그런 사유를 빈정댄다. 문제는 이런 빈정거림이 선적 사유와 닿아 있다는 것. 따라서 그는 이 시에서 우리시의 후기현대성을 선적 사유에 의해 일단 극복하려는 몸짓을 보여준다. 김춘수는 「꽃」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에서

 

 

김춘수의 경우는 꽃이고 황지우의 경우는 풀꽃이다. 전자의 경우 명명 이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이름을 받고 싶어한다. 말하자면 전자에선 명명 행위가 전적으로 주체, 나, 화자의 문제이고 후자에선 주체와 대상의 문제로 나타난다. 그렇다는 것은 풀꽃이 이름을 받고 싶어 한다는 표현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에 의하면 무슨 풀꽃이 그것도 하찮은 풀꽃이 이름을 받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이 풀꽃은 이름을 받고 싶어 한다.

 

다음 김춘수의 경우 명명 이후 꽃은 주체에게로 와서 비로소 꽃이 되고, 따라서 명명 행위는 생략되지만 황지우의 경우 명명 행위는 마음과 교미하는 일이고 마음과 섹스 하는 일이고 이런 시간에 그는 하품을 한다. 요컨대 명명 행위가 지겹다는 것, 권태스럽다는 것,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2연에 다시 나오는 ‘모르는 풀꽃이여’가 암시하듯 명명 행위가 있어도 사물은 그러니까 풀꽃은 알 수 없고 이른바 존재를 획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춘수의 경우에는 명명 이후 꽃은 존재를 획득하고 비로소 꽃으로 존재한다.

 

이름을 불러도 풀꽃을 알 수 없는 것, 풀꽃이 미지의 존재가 되는 것은 ‘마음’이 너무 빨리 ‘식은 돌’이 되고 ‘그대 이름에 내가 걸려 자빠지기’ 때문이다. 사물은 언어에 의해 존재를 획득하고 존재를 건설하고 이때 존재의 건설은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눈에 보이는 존재자들beings이 은폐하고 있는 존재, 대문자 존재Being를 건설하는 일과 통한다. 이른바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開始性, 비은폐성이 예술의 진리라는 것. 그리고 이런 진리 찾기, 본질 찾기, 의미 찾기가 모더니즘 문학의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황지우는 이런 탐구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명명 행위는 권태스럽고 명명 이후에도 사물은 알 수 없고 언어에 걸려 그는 넘어질 뿐이다. 요컨대 그에게 언어는 장애물이고 방해물이고 절벽이다. 그러므로 그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 된다. 김춘수는 「꽃을 위한 서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에서

 

 

김춘수가 이 시에서 노래하는 것은 하이데거적 의미로서 사물의 본질, 존재, 의미 찾기이고 결국 그는 사물의 본질을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가 ‘위험한 짐승’인 것은 미지의 세계를 추구하고 탐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지우는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짐승’이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짐승이지만 위험한 짐승이고 정신병에 걸리는 짐승이다. 물론 위험한 짐승과 정신병에 걸리는 짐승은 다르다. 전자가 사물에 대한 인식과 관계된다면 후자는 이런 인식이 불가능하고 따라서 인식 이전에 있는 인식에 절망한, 그러니까 언어에 절망한 언어 이전과 언어 이후에 있는 짐승이다. 정신병은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언어를 상실하고 망각하고 언어 능력을 상실한 경지이다. 이런 경지도 경지인가? 내가 황지우의 시를 분석적으로 읽은 것은 이 시의 표제가 「게 눈 속의 연꽃」이고 이 시의 마지막 행에서 그가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3. 언어에 속지 마라

 

모더니스트는 위험한 짐승이고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정신병에 걸리는/걸릴 수 있는 짐승이다. 정신병은 죄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언어가 의미를 상실하고, 기표가 기의를 상실하고,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상실하고 떠도는 이 시대, 이른바 후기현대, 포스트모던 시대는 정신병적(?) 시대이고 들뢰즈 식으로는 정신분열증적 시대이다. 이성만이 시대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이성만이 진리도 아니다. 도대체 나는 진리가 무엇이고 이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입장이고 이성이 있다면 이성은 그동안 우리를 억압하고 목을 조이고 이 멀쩡한 세계를 교활하게 파괴하고 자기 식으로 구성한다는 입장이고 그렇다고 정신병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가 이성이고 어디까지가 광기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구별 역시 이성의 조작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따지고 보면 아무 문제도 없다. 인간들이 공연히 문제를 만든다. 나무는 문제를 만들지 않고 돌도 만들지 않고 버섯도 만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선적 사유가 필요하고 선적 실천이 필요하고 결국 시인이든 예술가든 학자든 도를 닦는 심정으로 수행하는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작품을 만들고 공부를 하자는 것. 무슨 목적을 버리자는 것. 그러므로 정신병에 걸려도 걸림에서 자유롭고 걸려도 걸림이 아닌 삶을 살자는 것. 어떻게 사는 것이 그런 삶이고 경지인가?

 

황지우는 ‘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고 노래한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의 경우 언어는 장애물이고 언어는 존재의 집이 아니다. 김춘수는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한밤 내 울다가 그의 울음(마음)은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 스며 금이 된다.(4연) 그러나 황지우의 경우 돌 속에 있는 것은 추억의 바람이고 풀꽃이다. 말하자면 전자에선 돌 속에 마음이 있고 후자에선 돌 속에 풀꽃이 있고 이 풀꽃이 마음을 흔든다.(3연) 김춘수의 경우엔 마음이 의미를 찾아 언어를 찾아 돌 속으로 들어가고 황지우의 경우엔 돌이 마음을 흔든다. 그러므로 석기 시대를 매개로 ‘돌을 깨뜨려 불을 꺼내듯/내 마음 깨뜨려 이름을 빼내가라’고 말한다. 돌을 깨뜨리면 불이 있고 마음을 깨뜨리면 언어가 있다. 마음 밖에 언어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바로 언어라는 것. 그러므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뜨리고 언어를 빼내라는 것. 마음이 의미를 찾아가고 언어를 찾아가고 사물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의미이고 언어이고 사물이다. 언어에 속지 마라. 다음은 오대산 은봉隱峰 선사 이야기.

 

대사가 남전에게 갔다. 중들이 뵈러 들어오니 남전이 정병精甁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구리병은 경계요 병 속에는 물이 있으니 경계를 요동시키지 말고 나에게 물만 갖다 달라’ 하였다. 대사가 정병을 번쩍 들어 남전 앞에 부우니 남전이 그만 두었다.

 

(전등록 1, 동국역경원, 290)

 

이 공안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예컨대 물병은 과연 있는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실체가 있다는 말이고 이른바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이지만 자성이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인연이 있을 뿐이고 인연은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런 의존은 타성이 있음을 긍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사가 물병을 번쩍 들어 남전 선사 앞에 부은 것은 물병이 空이라는 것, 諸相非相이라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것. 물병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자성도 아니고 타성도 아니다. 한편 물병은 이름이고 언어일 뿐이다. 다음은 ‘금강경’에 나오는 말.

 

‘수보리야 네 생각엔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장엄하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야할 것이니라. 마땅히 색에 머무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성향미촉법에 머무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마땅히 머무는 데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금강경-장엄정토분)

 

보살이 부처님이 계시는 맑고 깨끗한 국토를 장엄하는 것, 곧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꾸고 꾸미는 것 역시 이름이 장엄이라는 것은 諸想無相을 강조하는 말. 따라서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쓰라는 것. 일자무식 나무꾼이었던 6조 慧能은 이 말을 듣고 깨달았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불토에는 世間佛土 身佛土 心佛土가 있고 장엄도 장엄이 아니고 이름이 장엄이고 물병도 물병이 아니고 이름이 물병이다. 이 물병을 건드리지 말고 물만 갖다 달라는 남전 선사의 말도 말이고 이름이고 언어일 뿐이다. 집착을 버리자. 머무는 데 없이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뜨리고 이름을 의미를 언어를 죽여야 한다. 김수영은 말한다. 시여 침을 뱉어라. 그러나 나는 말한다. 언어여 침을 뱉어라.

 

4. 無主의 시학을 위하여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이른바 시뮬라시옹으로 정의하고 그것은 복제의 복제의 세계이고 그러니까 원본이 없는 가상적 실체의 세계이다. 따라서 원본/이미지, 실재/헛것이라는 2항 대립 체계를 부정하고 철학적으로는 외양/본질, 사물/존재의 대립에서 본질을 찾고 존재를 찾는 이른바 서구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해체한다. 이런 부정과 해체가 왜 고민의 대상이 되는가? 절대적 초월적 시니피에를 상실한 시니피앙의 놀이, 유희, 표류를 이 시대 예술의 위기, 시의 위기라고 염려하고 근심하고 걱정하지만 이런 위기가 축복이다. 물론 위기는 우기가 아니지만 우기일 수도 있고 우기가 오면 우산을 쓰고 그대를 찾아가면 된다.

 

특히 이 땅에서 시를 쓰는 시쟁이들은 이런 위기를 축복으로 전환할 의무가 있고 그것은 마음을 버리는 시쓰기, 언어를 버리는 시쓰기를 지향하고 지향해야 한다. 도대체 최근의 우리시는 너무 촌스럽고 재미가 없고 지난 시절의 복창이 아닌가? 무엇보다 집착이 많다. 명예에 대한 집착, 시라는 장르에 대한 집착, 꽃에 대한 집착, 영혼에 대한 집착. 도무지 버릴 줄 모른다. 시쓰기는 집착이 아니라 집착에서 벗어나고 자아에서 벗어나고 답답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 그런 점에서 마침내 시라는 장르에 대한 집착도 시에 대한 집착도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다는 집착도 벗어나야 한다. 應無所住 而生基心이다.

 

이성복의 시집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이 문제가 되는 것은 최소한 그가 이 시집에서 전통적인 시 장르를 해체하고 무엇을 쓰는지 모르는 것을 썼다는 점이다. 그는 시를 쓰는가? 남들의 시를 해설하는가? 감상문을 쓰는가? 취미로 인용을 하는가? 자신의 시쓰기에 대한 철학적 미적 성찰인가? 과연 그는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면서도 그것을 사랑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 이것은 존재치 않는 짐승」

 

 

시의 첫 구절에 무엇이 들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무심코 지나가는 말이거나 심심풀이로 해본 말. 우리가 말하기 전에 제 빛깔과 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시의 둘째 구절은 無梁受胎―시의 마지막 구절에서도, 우리는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성복,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에서

 

결국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고 이 모름이 좋다. 모르는 것을 쓰고 모르는 것을 사랑하자. 이 땅의 시인들은 너무 아는 것만 쓴다. 안다는 것은 언어를 안다는 것. 시라는 장르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이런 시가 나오고 이건 시가 아니고 시이다. 시이면서 시가 아닌 이런 시쓰기는 모더니즘을 싫어하고 더욱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던 이시영의 시집 『은빛 호각』(2003)에서도 읽을 수 있고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너무 기분이 좋아 이시영 도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물론 내 글씨를 알아보는데 얼마나 고생이 심했으랴? 그건 그렇고 이 자리에서 일일이 분석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이 시집에서 내가 읽은 새로움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가 시가 아니라 산문을 썼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시단에는 산문시가 유행이지만 형식만 산문이지 내용은 시적인 것들이 거의 전부이던 터에 이런 산문, 말 그대로 시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는 이런 산문을 읽고 이게 시가 된다는 사실은 시와 산문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는다. 과연 시는 무엇이고 산문은 무엇인가?

 

서울역 앞에 아직 대우 빌딩이 없을 때 일만이 형 용만이 형은 양동여관에 터를 잡고 이불 장사를 하고 일만이는 재수를 했다. 양동여관이 어떤 곳이냐면 밤이면 아가씨들이 몰래 몸장사를 하고 낮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도부꾼들이 붕어 같은 눈을 뜨고 깜빡깜빡 잠드는 곳이었다. 그 좁은 복도에 옥상에 다우다 이불들을 산처럼 쌓아놓고 일만이 형은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선들바람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했는데

 

이시영, 「일만이 형」에서

 

신기한 것은 ‘자정이 넘으면 어제의 이불들이 사라지고 새 이불들이 산처럼 쌓인다’는 것보다 이런 산문이 시가 된다는 것. 말하자면 이시영은 무의식적인 전위이고 전위의 실천가라는 것. 물론 아직도 그의 시에는 이 사회에 대한 사라진 시대의 억압에 대한 유머러스한 풍자가 있다. 그러나 그런 비판이 문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산문, 전라全裸의 산문이 문제이고 결국 우리는 이제 시가 따로 있고 산문이 따로 있다는 근대 문학론의 해체와 만난다. 2항 대립의 해체이다. 시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이런 산문도 시가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조오현 스님의 책 『절간 이야기』(2003)를 시집으로 읽었다. 이 책은 시조집도 아니고 수필집도 아니고 사진집도 아니다. 물론 전반은 산문, 후반은 시조이다. 그러나 책 어디에도 시조집이니 수필집이니 혹은 시조-수필집이니 하는 장르 규정이 없다. 시조니 수필이니 하는 장르 구분이 부질없고 허망한 짓이리라. 이 책에선 수필이 그대로 시이고 시가 그대로 수필이다. 물론 수필은 수풀일 수도 있고 우리는 수필이 아니라 수풀을 읽을 수도 있다. 말이 되는가? 말이 되면 어떻고 말이 안 되면 어떤가? 도대체 말이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래 언어와 사물 사이엔 아무 내적 필연성이 없고 따라서 언어는 태생적으로 사기이고 허구이고 환상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도 언어 사기이고 시도 언어 사기이고 그저 사회적인 약속에 의해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쓸 뿐이다. 무슨 진리가 있고 깊이가 있고 본질이 있는가?

 

어제 그끄저께 일입니다. 뭐 학체 선풍도골仙風道骨은 아니었지만 제법 곱게 늙은 어떤 초로의 신사 한 사람이 낙산사 의상대 그 깎아지른 절벽 그 백척간두의 맨 끄트머리 바우에 걸터앉아 천연덕스럽게 진종일 동해의 파도와 물빛을 바라보고 있기에 ‘노인장은 어디서 왔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침나절에 갈매기 두 마리가 저 수평선 너머로 가물가물 날아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는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군요’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오현, 「절간 이야기 2」에서

 

다음 날도 그 초로의 신사는 거기 있고 아직도 갈매기가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스님의 질문에 그는 ‘어제는 바다가 울었는데 오늘은 바다가 울지 않는군요’ 한다. 이 신사 이야기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게 아니고 의미를 강조하고 의미를 찾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렇다고 선문답도 아니다.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김종삼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했지만 오현 스님은 내용 없는 삶을 이야기하고 이런 이야기가 시이고 시가 아니다. 시가 아니기 때문에 시이다. 無主의 시여. 나도 이제까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어여 침을 뱉어라.

 

-우리시 카페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