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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향유한다는 것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3. 3. 5. 23:33

 

시를 향유한다는 것

尹 錫 山

 

1.

 

최근 어느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한시漢詩로 읽는 경기京畿』라는 책을 썼다. 젊은 연구자 세 사람과 함께 한시 작품들을 수집하고, 또 경기 지역에 관하여 조사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년 가까운 시간의 집필 과정을 거쳐 한 권의 책으로 냈다.

 

실은 이러한 책을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다. 우리의 조상들은 수많은 문학 유산을 오늘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특히 선인들이 남겨놓은 한시는 그 양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많은 분량이다. 옛날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면 그 어느 누구를 불문하고 시를 썼고 또 써야만 했다. 시를 읽고 쓰는 과정이 교육 과정 안에 있음은 물론, 지식인으로서 시를 읽고 논하며, 또 쓴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묵계된 필수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작은 모임이라도 갖게 되면, 으레 시회詩會라는 이름으로 시를 짓고 또 서로 시를 이야기했었다.

 

그만큼 우리의 조상들의 삶 속에는 시라는 문학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내가 살고 있는 경기도 일원의 여러 지역이나 많은 명소, 또는 인물이나 유물들에 관하여 우리 조상들이 쓴 한시가 많이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한시들을 수집하여 우리 선인들은 한시라는 문학으로 자신들이 사는 지역, 자신이 태어난 지역, 혹은 자신이 여행 중 지나는 그 지역을 어떻게 노래했는가, 하는 궁금함이 나에게는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를 얻어 이러한 일에 착수를 할 수가 있었다. 나는 먼저 경기 지역을 조사하였다. 경기 지역은 현재 4개의 군과 27개의 시, 그렇게 31개 권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렇듯 나뉜 이들 지역들은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 나뉜 것이다. 옛날에는 이와는 다소 다른 행정구역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 1914년 일제는 우리의 군현郡縣을 통폐합하였다. 예를 들어 양근陽根과 지평砥平을 합하여, 양근의 양楊 자와 지평의 평平 자를 따서, 참으로 창조성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짜깁기식 이름인 오늘의 양평이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영평, 진위, 통진 등은 포천, 평택, 김포 등에 포함을 시켜, 이들 군에 속한 하나의 면으로 격하시킴으로 군현을 통폐합시켰다.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지역과 관련이 있는 한시들을 수집하였다. 실질적으로 수집을 하기 전 막연하나마 우리 선조들이 많은 한시를 남겼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다. 어긋났다기보다는 기대를 훨씬 상회하는 그런 결과를 만날 수가 있었다. 어느 지역이고 한시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만큼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시를 짓고 또 시와 함께 생활을 했음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지금의 과천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살았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추사가 과천에 살면서 남긴 한시를 하나 들어보고자 한다.

 

작은 집 곁에 한 그루 오래된 버드나무

백발의 영감 할멈 모두 소연하구나

석 자 남짓 시냇가 길도 넘어보지 못한 채

옥수수만 먹으며 살아온 갈바람 속 칠십 평생

 

秃柳一株居數椽

翁姿白髮兩蕭然

未過三尺溪邊路

玉薥西風七十年

 

추사는 이 한시에 병서竝序를 부쳤다. 병서에 의하면 “길가의 마을 집이 옥수수 밭 가운데 있는데 두 늙은 영감 할멈이 희희낙락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영감 나이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일흔 살이라 한다. 서울에 올라가보았느냐 물으니 일찍이 관에는 들어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무얼 먹고 사는가 하고 물으니 옥수수를 먹는다고 했다. 나는 남북으로 떠다니며 비바람에 휘날리던 신세라 옹을 보니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추사가 우연히 만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를 그대로 시로 쓴 것이다. 서울이 지척인 과천에 살면서 서울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자신의 향리에서 그저 옥수수나 먹으며 살아온 70평생의 노부를 보며, 추사는 유배지를 따라 남북으로 떠돌았던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떠올린다. 우연히 만난 어느 늙은 부부의 삶을 시로 노래함으로, 잔잔히 살아온 한 생애,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고즈넉한 한 시골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추사 스스로 시 쓰기를 자신의 삶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살았음을 은연중에 느낄 수가 있다.

 

이러함은 비단 추사뿐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옛 분들, 문자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러므로 옛 분들은 자신이 관직에 있다가 치사한거致仕閑居하게 되면, 향리로 돌아와 살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는 것으로 그 일과를 삼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풍광이 좋은 곳에 별서別墅라도 마련하게 되면, 그 집에 택호宅號를 짓고, 또 이 택호에 맞는 시를 지어 남기곤 하였다.

 

김포 통진에 조선조 초기 문신인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가 별장을 지었다. 이름하여 ‘목안정木雁享’이라고 했다. 목안정이라는 이름은『장자莊子』에서 취했다고 한다. ‘기러기는 못가에서 울고, 나무는 산에 있는데, 무엇을 취할까.’하는 물음과 함께 재材와 부재不在사이를 말한『장자』의 한 구절에서 ‘나무와 기러기’, 곧 ‘목木과 안雁’을 취하여 별서의 택호로 삼았다고 한다. 이러한 양성지의 별장인 ‘목안정’에 관하여 절친한 친구인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대포곡 목안정 팔경大浦谷 木雁享 八景」이라는 시를 써서 남겼다. 그중의 한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올해는 벼와 기장 풍성하게 익어서

어느 곳 어촌에도 밤 등불이 환하구나

강 남쪽 가을 물이 줄었다고 말하는데

흰 농어 누른 게도 어망에 가득하네

 

今年禾黍足豊登

何處漁村耿夜燈

楊設江南秋水滅

白鱸黃蟹赤堪罾

 

목안정이 있는 인근의 어촌과 농촌의 풍경을 노래한 한시이다. 풍년이 들어 밤늦게까지 어촌의 마을에는 등불이 켜져 있고, 농어, 게 등 어물들 역시 그물에 가득하도록 잡혀 풍족하며 또 화락한 삶을 누리는 농촌과 어촌의 모습을 노래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선조들은 시를 자신이 살아가는 생활의 한 부분, 나아가 자신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는 ‘풍류風流’로 생각하며 시라는 문학에 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곁을 스치는 작은 일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로 쓰고 또 노래했었다.

 

2.

 

요즘의 많은 시들, 특히 시단으로부터 조명을 받는 젊은 시인들의 시들은 읽어도 잘 알 수가 없는 것들이 많다. 문학잡지에 발표되는 이들의 시작품이나, 또 보내준 이들의 시집을 읽고 읽어도 과연 무엇을 노래했는지 도무지 그 감조차 잡히지 않는 시들이 많다.

그래서 실은 고민에 빠졌었다. 시를 쓴다고 40여 년을 지내왔는데, 읽어도 알 수 없는 시들이 이렇듯 많고, 또 그 시들이 문학 전문지와 일부 평론가들에 의하여 평가를 받고 또 주목을 받고 있다는 이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젊은 사람들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대가 돼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정말 인정하기 싫은 그 ‘나이 많음’에, 그래서 새로운 시의 화법이나 언어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런 둔감해진 모습으로 이제 자연스럽게 편입이 된 것인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하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시라는 예술은 ‘고도화된 언어에 의한 예술’이다. 이때 ‘고도화되었다’라는 말은 언어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어주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언어가 숨 쉬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시인이란 기존의 관습적인 언어에 새로운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어 언어가 지닌 관습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시적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예술가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시가 ‘난해성’을 지니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 시의 본질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가 지니고 있는 통념적이고 또 관습적인 것을 벗어나 늘 새로운 호흡과 새로운 시적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그 본질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요즘 십 수 년 사이에 우리 시단에 나타난 난해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시들이다. 시가 지닌 중요한 특성인 언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라는 면을 십분 고려해도, 어려워도 너무 어려운 것이 요즘의 난해시들이다. 그러므로 나날이 난해해져 가는 요즘의 난해시들을 독자들은 따라잡지 못하고, 그래서 볼멘소리를 하게 된다. 시가 너무 어렵다. 독자와의 소통이 전혀 가능하지가 않다고 하며 불평을 한다. 실상 어느 결에 나도 이런 불평을 하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읽어도 잘 모르겠으니 어쩌란 말이냐.

 

복효근 시인은 이러한 ‘난해시’에 대하여 시로써 말하고 있다.

 

난 난해시가 난해시인이 좋다

죽었다 깨나도 나는 갖지 못할 보석을 걸친 여인처럼

나는 못 가진 것을, 못하는 것을 갖고 하니까

나도 난해시를 써보고 싶다

그들처럼 주목을 받고 싶다

평론가들이,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그들이 나는 부럽다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을 내려다보며

어깨에 당당히 힘을 모으며 살아가는 그들이 부럽다

-복효근,「난해시」마지막 연

복효근 시인이 시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실상 난해시는 아무나 쓰지 못한다(?). 그래서 죽었다 깨도 가질 수 없는 보석과 같은 것이 난해시인 모양이다. 난해시는 오늘 주목을 받는다. 특히 평론가들, 그것도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한다. 그래서 일컫는바 난해시를 쓰는 시인들은 ‘그런 것도 못하는 치들’이라고 깔보며 어깨에 힘을 당당히 모으고 있다. 시를 읽어도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것도 서러운데, 무시까지 당해야 하니 난해시를 쓰지 않거나, 쓰지 못하는 시인들은 더욱 서럽다.

 

난해시에 대한 공방은 우리의 그리 길지 않은 현대시사에 비하여 그 연원이 아주 오래고 깊다. 일찍이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오감도烏瞰圖」가 발표되자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이 난해시의 기원이 된다. 이후 1950년대, 일컫는바 모더니즘을 표방한 일군의 시인들의 시에 대해서 ‘알 수 없다’, ‘어렵다’라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시가 늘 고독 속을 걸어가야 한다는 일은 시의 비극이며, 동시에 영광일 것이다.”라는 김기림의 언급이 인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1960년대 말에서부터 1970년대 초까지에도 난해시에 대한 공방이 우리 문단 일각에서 있었다. 특히 당시 새롭게 창간된 계간지에서 그들 스스로 일군의 시들을 난해시라고 지정해 놓고, 이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었다.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언어에 대한 조탁彫琢이나 하며 시대에 대한 인식이나, 현실의 문제를 시에 담지 않으면, 마치 ‘시대의 배반자’나 된 듯 취급하던 때이다. 그러므로 일컫는바 순수시의 많은 작품들이 난해시로서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상이 이런데 뭐 말라죽을 언어의 예술이냐는 식이 당시의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은 오늘 소위 난해시를 공격하던 그 계간지에서 발간하는 시집들에 실려 있음이 대부분이다. 이래서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복효근 시인이 시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평론가들이, 그것도 매우 지적인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난해시와 난해시를 쓰는 시인들. 이들은 독자를 향해 쓰는 것이 아니라, 평론가들을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때로는 들기도 한다. 실은 시단의 실세들이 바로 평론가들이 아닌가.

 

10여 년 이상 계속되고, 계속되며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난해시들을 읽으면서, 모든 난해시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모국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언어에의 실험이라는 미명 아래, 난해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려운 때가 종종 있다.

 

3.

 

오늘 한국사는 그 폭이 매우 다양하다. 풍요로운 서정성을 견지하며 현대적 서정의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자리하고 있는가하면, 삶의 여러 모습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냄으로 생활 속에서의 깨달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또한 자리잡고 있다. 그런가 하면, 가벼운 인생철학을 서정적 터치로 그려냄으로 보다 쉽게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 오늘의 일반적인 정서로는 도저히 해독이 어려운 시들 역시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한국의 시단이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다양한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다양한 시의 모습이 펼쳐지고, 또 다양한 시라는 이름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그런지, 오늘 우리 시단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단군 할아버지 이래로 가장 많은 시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아무 아파트 단지에나 들어서서 “시인분들 나오시오.”라고 확성기를 대고 소리치면 아파트 각 층에 한 사람 이상은 나온다고 하는 이야기까지 있다.

 

살다보면 어쩌다가 이름도 알 수 없는 문학잡지에서 시를 청탁하는 편지가 올 때가 있다. 그래도 시단에서 기웃거리며 살아온 지가 몇 십 년인데, 그 이름조차도 알 수 없는 문학잡지라니, 내가 견문이 없어도 너무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은 이런 문학잡지들이 우리 문단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상당히 많이 있는 모양이다.

 

낯모르는 사람들과 패키지 해외여행이라도 떠나게 되면, 그 그룹 중에 시인이라는 사람이 한 사람 정도는 늘 끼어 있다.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시인을 이렇듯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 이제는 다반사이다. 이렇듯 만난 대부분 그 시인은 이름도 알 수 없는 잡지를 통해 등단을 했고, 우리나라의 한다 하는 시인들의 작품은 고사하고, 그 시인의 이름조차도 잘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엄밀히 말해서 시에 대해 일반적인 식견조차도 없으면서 시인이 된 사람들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문학단체와 또 문학잡지, 문학을 공부하는 그룹이 있다. 정말로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 민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들 단체나 그룹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문학을 사랑하기는 하는데, 어째 다소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을 삶속에서 향유하려는 것이지, 문학이라는 이름을 누리려고 하는지 잘 구분이 되지를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를 삶의 중요한 무엇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삶 속에서 향유함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려는 것인지, 시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누리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 두 가지 모두일 것이다.

 

‘시인’이라는 이름은 어느 의미에서 시에 관한 전문가, 곧 프로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바둑의 프로 기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프로’는 프로로서의 자격이 되어야 한다. 바둑의 프로 기사는 아마추어 기사가 몇 단이라고 해도 바둑을 둘 때 맞두지 않는다. 아마추어 기사는 당연히 몇 점을 깔고 대국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상대가 프로이기에 아마추어로서 행하는 예의가 아니다. 몇 점을 깔아야 비로소 그 대국의 상대가 되기 때문이다. 바둑의 프로에 입단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고도의 무엇이 요구된다.

 

텔레비전을 보면, 가끔 격투기에 관한 것이 방영이 된다. 이 격투기 프로그램 중에는, 소위 한 동네에서 싸움 꽤나 한다는 사람이 신청을 해서 프로 선수와 격투기 대결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바둑 아마추어 기사가 몇 점을 깔아놓고 대국에 임하듯이, 이때도 동네 싸움꾼은 머리를 보호하는 헬멧을 쓴다. 물론 프로 선수는 아무런 보호대고 하지 않고 그냥 싸운다. 치고받으며 아마추어 선수인 동네 싸움꾼이 그 싸움에서 3분을 버티면 통과다. 지방의 한 도道를 떠들썩하게 했다는 싸움꾼도 이들 프로 선수 앞에 서면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일 뿐이다.

 

시는 이들 바둑이나 격투기마냥 이기고 지는 승부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그 진위를 가린다는 것은 어렵다. 제 눈의 안경에 따라 자신이 쓴 시가 최고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가. 시인이라는 전문가가 되는 과정이 너무나 허술한 곳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많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에는 ‘문청文靑’, 곧 ‘문학청년’이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곤 했다. 시인이 되기 위하여, 소설가가 되기 위하여 머리를 싸매고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에 매달려 있는 아름다운 이름 ‘문청’, 그러나 지금 그 이름은 찾아보기 그리 쉽지 않다. 오늘의 많은 시인들이 문청의 시절 없이 그냥 시인들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은 그렇지 않은 시인들도 많지만, 오늘 우리의 문단에는 문청 시절 없이 시인이 된 한량한 시인들 또한 많고도 많다.

 

4.

 

독자들에게 거의 소통이 불가능한 어려운 시들이 시단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그저 습작 정도의 시들이 시단의 일각에서 지속적으로 생산이 되어 문학잡지에 버젓이 실리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 시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것은 좋은 현상인가, 아니면 그렇지 못한 모습인가. 참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어디를 가도 시인이 넘치고 남는 현상,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오늘의 모습이 옛 분들이 시를 자신의 삶 속에서 향유하며, 어느 자리 어느 곳에서라도 시 한 수 지을 수 있던, 그런 모습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무엇인가. 단안하기 참으로 어렵다.

 

시라는 예술을 향유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의 많은 시들을 읽으며, 또 지난 시대 우리 선조들이 남겨놓은 시들을 읽으며, 진정으로 향유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체육교사를 하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와 오랜만에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체육과를 나와 체육교사가 되었으니, 운동을 좋아해서 체육대학에 들어갔을 것이고, 또 체육교사도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 친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전혀 뜻밖이었다. ‘체육 선생들은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사니, 정말로 운동이라고 하면 넌더리가 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일인데, 아마도 그 일이 다만 밥벌이를 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지만, 이 친구의 말이 꼭 맞는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시 읽기를 좋아하고 또 쓰기를 좋아해서 시인이 된 사람은 매일 시를 읽어야 하고 또 써야 하고, 시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시 가르치는 것이 밥벌이가 된 사람은 시라면 넌더리가 나야 하는 것인가.

 

운동이고 시고, 이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나아가 이를 통해 현실적인 무엇을 얻으려고 할 때, 또 이 얻으려는 것으로부터 괴리감을 느낄 때, 혹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자칫 이 자체가 싫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쓰고 싶다는 순수한 열정을 잃지 않는 한 시 쓰는 자체에 질력을 느끼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오히려 운동을 한다거나 시를 쓰는 일에 더욱 마음이 가고, 또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쓰고 싶어 쓰는 사람들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를 씀으로 해서 스스로 행복해지고, 그러므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시들 역시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일컫는바 난해시를 쓰는 사람이나, 또 그렇지 않은 시를 쓰는 사람이나 모두를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시를 쓰는 사람들, 이들 모두 다만 쓰고 싶은 마음의 움직임에서부터 시를 쓴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창작에의 기쁨을 누린다고 생각한다. 또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진정 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오늘 나 역시 진정 시를 향유하고, 또 향유할 수 있는 그런 한 사람의 시인이고 싶다.

 

* 尹錫山 시집 『나는 지금 운전 중』 푸른사상시선 26 / 푸른사상사(2013.01.28)

* 구재기 시인의 산애제  카페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