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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오리 7층 석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2. 5. 28. 12:46

 

상오리 7층 석탑

․ 위치 :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699

지정 : 보물 683호(80년 9월 16일 지정)

 

 

 

 

 이 탑은 통일 신라시대에 창건한 장각사(長角寺)라는 사찰에 있었다고도 하며, 또한 고려 때 창건한 비천사(備天寺)라는 사찰 내에 있었다고도 전하는데 임진왜란 시 소실되었다고 하나 역사적인 실증자료는 없다.

 

 1975년도에는 직지사에서 이전을 시도 하였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1977년에는 국가 지정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상주시(당시 상주군)에서 복원하였으며 1980년에 보물 제 68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서쪽으로 법당 자리였던 곳에 주초석이 여섯 개 있는 것으로 보아 5칸 정도의 법당으로 추측된다. 석탑의 양식은 기단이 상하 2층으로

 

 사지의 동편에 위치하여 동탑서당의 배치에 따라 자리 잡고 있으며 법당이 세워졌던 지표보다 약 3척 가량 높은 자리에 세워졌는데 탑 주변으로 한 변이 8.4m 되는 세벌장대(세 층으로 포개어 놓은 댓돌)의 기단을 마련하였다.

 

 세벌장대로 기단을 모은 위에 한 변이 3.6m 되는 하층기단의 지대석과 면석을 쌓고 그 안통으로 두꺼운 지대석(기반석)을 1변 2.8m규모로 놓아 상층 기단을 받게 하였는데 면석은 6매 석이며 갑석은 2매로 되어 있다. 초층 탑신은 ‘ㄱ’자형석 두 개와 1매의 판석으로 구성되고 1층 옥개석부터는 1괴석으로 되어 있다. 노반까지는 남아 있으나 그 이상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구조는 하층 기단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인데 좀처럼 보기 드문 양식이라 하겠다. 세벌장대 중심에도 심초석이 있고 주변에 고운 황토로 입사 기초한 기법이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얕은 토단위에 2층 기단을 쌓고 다시 7층을 올렸는데 그다지 넓지 않은 상층기단 위에 1층 몸돌이 불쑥 솟아있다. 1층 지붕돌에서부터 줄어드는 비율이 일정해서 좀 불안한 듯하기는 해도 균형을 잃지는 않고 있다.

 

 하층기단의 갑석 위에는 별석으로 상층 기단굄이 있는데, 상층 기단의 중석은 6장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갑석은 4장의 판석으로 덮였으며, 갑석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초층이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3장의 돌로 짜는 불규칙한 결구수법(結構手法)을 나타내고 있는데, 옥신석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고 동쪽 면에는 문비형(門扉形)이 있으며 옥개석 받침수는 5단이다. 특히 옥신석은 상층기단 중석보다도 높아져서 균형을 잃고 있다. 2층 이상은 옥신석과 옥개석이 차례로 체감되어 상층부에서는 1장씩으로 되어 있으며, 옥신석에는 각 모서리마다 우주형이 모각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5층까지만 5단이고, 6·7층에서는 4단으로 줄었다. 기단부의 불안함을 미루고 생각해보면 전체적인 인상은 충주의 탑평리 칠층석탑과 닮아보여 신라 하대에 세워졌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고려시대에 파격적이고 지방적인 탑이 많이 세워졌기 때문에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1층 몸돌 동쪽면에 문고리를 잠근 모양이 유일한 장식으로 단정한 맛을 살리고 있다 전체높이 9.21m의 이 탑이 있는 자리는 비교적 옹색해 보인다. 일제강점기에 도굴되었다고 하는데, 무너져 방치되었던 것을 1977년에 다시 쌓아올렸다. 탑 현지의 절터에는 석탑과 주초석 들이 배열된 법당자리와 주변에 석등파편 등이 발굴되고 있어 규모가 큰 당대 거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할 수 있고 탑재로 쓴 돌은 이곳 주변에서 생산되고 있는 붉은 색 화강석재로 조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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