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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준경의 시 - 인간의 겉과 속을 잇는 사랑의 탐구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1. 1. 27. 19:29

 

<윤준경 시집 - 『새의 습성』 >

인간의 겉과 속을 잇는 사랑의 탐구

 

나호열 (시인)

 

■시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흔히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누구에게나 시심 詩心이 있다는 말과 통할 것이다. 그럴싸 한 말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도대체 '시'란 무엇이고 '시심'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시인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하는 존재이다.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상식으로 물든 보통의 사람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시를(정답이 없는) 쓰는 것이다. 그래서 씌여진 시는 증언, 묘사, 고백의 형식으로 독자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사원이든, 마음과 뜻을 전하는 도구이든 무슨 상관이랴! 시가 랑그 langue가 아니라 빠롤 parole이라는 것 즉,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정서의 전달이라는 기초적 이해를 상기할 수만 있다면 '시'를 쓰는 '시인'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 어렴풋하게나마 그 윤곽을 잡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탁월한 자,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 지 또 그 아름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구하기를 열망하는 자,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증언하여 범인 凡人들을 일깨우는 자,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나가고 싶은 자가 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 주변엔 재능이 뛰어나나 그 재능으로 권세를 노리거나,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세상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편벽함을 드러내는 시인들을 자주 목도 目睹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시인은 자신으로 향하는 냉엄한 고발과 반성을 바탕으로 세상의 질곡을 넘어서서 궁극적으로 삶의 아름다운 경지로 이행되어가는 변증법적 삶을 지향하는 존재일 것이다. 이와 같은 뜬금없는 생각은 윤준경 시인의 『새의 습성』을 읽으면서 더욱 강렬하게 줄곧 따라온 문제이다. 이미 윤준경 시인은 시집 『다리 위에서의 짧은 명상』(2009)을 통해서 시인이란 어떤 존재이고, 시를 통해서 우리가 거두어야 할 소중한 심성이 무엇인가에 나름대로의 발언을 뚜렷하게 밝힌 바 있다. 그런 까닭에 시집 『새의 습성』은 『다리 위에서의 짧은 명상』의 연장선상에서 읽고 음미할 때 시의 향기와 시인의 풍모를 뚜렷하게 가슴으로 안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증오를 넘어설 때 사랑은 찾아온다

 

"시인은 섬과 같아서 겉으로는 사람을 멀리 하지만 속으로는 사람을 그리워 한다" 고 섬의 시인 이생진은 설파했다. 이 말을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증오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의미로 확대된다. 마치 에로스eros가 풍요의 신 폴로스polos와 빈곤의 여신 페니아penia 사이에서 태어난 것처럼 양립 불가능한 모순이 이 세계를 존재하게 만든다. 섬은 고립의 상징인 동시에 가닿아야 할 이상향이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구원은 결국 인간으로, 인간에게로 다가가서 이윽고 하나가 되는 접점에서 이루어진다. 시인은 이와 같은 자각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존재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변증법적 극복을 통해서, 증오의 항項을 넘어서서 사랑의 통합을 이루고자 열망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시인은 과학자의 사유를 닮아 있다. 과학이 가설의 실제적 증명을 통해서 진리를 얻어내듯이 시인도 쟁취하고자 하는 이상의 쟁취를 위하여 자신의 체험을 가다듬고 그 체험에 반성과 극복의 사유를 힘겹게 보탬으로서 비로소 진실한 논리증명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에서의 진정성이란 선사 禪師의 고매한 일갈이 아니라 고매한 일갈에 이르는 도정의 답습에 있는 것이다. 『새의 습성』 에 수록된 많은 시들이 인간에 대한 툴툴거림과 냉소를 뿜어내고 있으므로 겉으로 보아 비난과 비판으로 얼룩져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불화는 말할 것도 없이 '나'와'너' 그리고 '나와 너'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의 관계로부터 발생한다. 남지이든 여자이든 시인의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비루하기 이를 데 없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나'에게 피해와 상처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고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를테면 나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타자 他者들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무한한 각성이 온다. 각성은 '죽은 채로 오늘을 사는' 나에 대한 추파와도 같다. 타자에 대한 빈정거림은 '나'에 대한 각성으로 오고 '나'에 대한 아픈 반성으로 이어진다. '아무도 인생의 황혼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인생은 태양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낙조를 기다리며」)'라거나 ' 갈대는 이미 생각하는 갈대인 것이다' ( 「갈대숲에서」) 사이에서 시인은 자신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왈가왈부 하려면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맹목적 신앙이 폭력이듯,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아둔함은 맹목적 불신을 야기한다. 그런 까닭에 시인이 스스로에게 걸어야 할 주문은 "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주인을 종 부리듯 하는 힘,

그것이 바로 명품 아닌가

- 시 「명품」 마지막 부분

 

갈수록 길어지는 속죄의 시간, 길어도

어린아이와 같아질 수는 없다

천국에 가려면

빨지 말아야 한다

 

- 시 「빨래 」 마지막 연

 

명품은 무엇인가? 비싸고 희소한 그래서 소수만이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다. 그 물건은 "소비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는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우리의 자화상을 대변한다. 가짜 명품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대리만족의 일장춘몽을 통해 주인을 종으로 부리는 현실을 깨닫게 되고 살면 살수록 속죄의 시간이 늘어나는 빨래에 불과한 자신을 차라리 그대로 놔두어야 한다는 통렬한 자각이 자신에 대한 고백을 당당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맹렬한 공격의 힘을 배가시키는 것이다. 살아온 흔적을 적으려니 삼류에 불과한 이력 (「딱 세 줄」), 공짜라면 사죽을 못 쓰다가 낭패를 당하는(「공짜」), 쓸모없어 버려진 백화점의 마네킹처럼 (「버려진 여자」), 유명해지고 싶고 혜성처럼 세상에 드러나고 싶어하는 「뜨지 못하는 자의 변명」)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자기해부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 고백에 이르게 된다.

 

 

 

두 여자가 나에게 돌을 던졌다

어디서 본 듯도 하지만 전혀 모르는 두 여자가

내 앞으로 달려오며 마구 돌을 던졌다

맞으면 죽거나 다칠 크고 날카로운 돌

정신없이 쫓기다가

돌아서서 소리쳤다

대체 내가 맞아야 하는 이유가 뭐죠?

 

두 여자는 돌 던지기를 멈추었고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돌을 던진 여자는 누구일까

왜 나는 꿈에서라도 돌을 맞아야 했을까

정말 나는 돌에 맞을 이유가 없는 것일까

 

꿈 - 사고와 의식의 관계 및 억압과의 관계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표출

돌을 든 여자는 나였다

돌을 맞은 여자도 나였다

 

의식은 포기포기 무의식에 창궐하여

깊은 잠에 이르면 돌을 집어든다

선善의 한계를 시험한다

누구도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없다

- 시 「돌을 든 여자」 전문

위의 시는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적 층위가 보편적 인간의 심리임을 암시하면서 상처에 대한 방어로서의 타자에 대한 공격이 화해의 양상으로 변모될 것이라는 징조를 보이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이와 같은 이중적인 심리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의 습성』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비루한 인간군상에 대한 조롱이 조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완숙에 다다르려는 열망의 첫걸음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면인심 獸面人心과 인면수심 人面獸心

 

『새의 습성』에 등장하는 타자(인물)들은 대체로 인면수심의 갈등을 야기한다. 한 마디로 겉과 속이 다른 것이다. 돈을 경멸하는 듯하나 알고 보면 돈의 노예이고 유교무류 有敎無類를 외치면서 일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며 자신의 자유를 빌미삼아 타인에게는 구속으로 변명하는 이율배반을 밥 먹듯이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돌을 든 여자」) 그와 같은 존재는 '나'와 병립하고 있는 타자인 동시에 '나'속에 들어와 있는 또 하나의 '나' 즉 무의식이다. 시 「비」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 '돈을 돈답게 못 쓰는 사람/ 힘을 힘답게 못 쓰는 사람, /양심을 양심답게 못 쓰는 사람, /지식을 지식답게 못 쓰는 사람'을 인면수심의 범주에 넣는다면 '나' 또한 그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 때 인심 人心에 대한 시인의 정의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수면인심獸面人心 1」과 「수면인심獸面人心 2」는 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시이다. 100살이 넘은 코끼리거북이가 함께 살던 코끼리거북이가 죽자 식음을 전폐했으나 2살 짜리 코코아티너구리와 같이 살면서 의욕을 되찾았다는 내용이고 「수면인심獸面人心 2」은 늙은 숫사자와 젊은 암호랑이가 사랑을 나누나 수호랑이에 의해 늙은 숫사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바람난 암호랑이를 수호랑이가 뺨을 후려친다는 내용이다. 습성과 피가 다른 이종 異種간의 교감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더불어 늙은 숫사자에 대한 동정 탓에 저항하지 않고 뺨 맞는 암호랑이의 행동이 시인이 전하고픈 인심이라면 여기에는 교조화되지 않은 보다 유연하고 성숙한 의식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한 마디로 '한 번쯤 넘어지고, 미안해 라고 사과하는 여자'( 「허점이 있는 여자가 아름답다」)처럼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시인은 인심 人心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려는 의지가 '사랑'이라고 주장한다면 너무 멀리 나간 추측일까?

 

■자유를 꿈꾸다

 

시로서의 완결성을 따져보기 전에 「수면인심獸面人心 1」과 「수면인심獸面人心 2」는 시집 『새의 습성』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연계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동물'과 '인간'의 본질적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시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감정과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인간답지 못한 '자기기만'을 폭로하는 기제로 보고 있다는 것이 타당하다. 사르트르 Sartre는 의식이 없으므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즉자적 존재와 의식을 가지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대자적 존재로 구분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자유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해방구이면서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매 순간 확인하는 실존은 자유의 결단에 다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인면수심으로 불리우는 자기기만은 행동의 결정권을 사회와 타자에게 되돌림으로서 발생하는 삶의 회피이며 굴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의 극복은 이런 타자들의 습성을 용인하고 그들로 하여금 증오를 극복하는 '사랑'이나 화해가 개별적 타자의 선택의지에 달려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새를 동경한 것은 막연한 욕심이었을 뿐

날 수 있는 힘의 논리를 연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끔 그의 가벼움이 부러웠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부러웠을 뿐

나르는 연습조차 해 보지 않았고

나뭇가지 위에 납죽 앉아 보지도 않았다

인간 이상의 습성을 가지고 싶은 욕심에

나는 다만 새가 되고 싶었다

 

생각하면 새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부글부글 밥물이 넘치는 전기밥솥을 버리고

찍찍거리는 티브이를 버리고

책을 버리고, 옷을 버리고, 옷장을 버리고

지금 막 꽃피기 시작한 화분을 버리고

내장을 비우고, 머리를 비우고

아주 작아진 몸과 머리가 되어

오래 익힌 인간의 습성을 버리면

날개는 저절로 돋아날 것이다

 

나무가 새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가 나무를 받아들인다

방금 저 멧새가

아무도 찾지 않는

대추나무 가지를 흔드는 것을 보아라

대추나무는 비로소 집이 되는 것이다

- 시 「새의 습성」 전문

 

 

「새의 습성」은 이번 시집의 완성을 향해가는 첫머리 이면서 의미의 종결을 이루는 마지막 시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 시는 인간의 꿈과 그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존재의 쓸쓸함을 아름답게 그려낸 수작 秀作으로 생각한다. 조금 더 꼼꼼이 시를 읽어보기로 하자. 새는 자유의 상징으로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진다. 마음대로 창공을 날 수 있고 멀리 날아갈 수 있다. 그러나 실존주의 철학의 입장에서 새는 즉자적 존재일 뿐이다. 자신이 새 인줄 모르는 새는 그것만으로 충족된 완벽한 존재이다. 반면에 새를 바라보는 인간은 결핍을 인식하는 불만을 가진 존재인 까닭에 새를 자유의 상징으로 동경한다. 자유는 대자적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이자 고통인데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 시의 2연은 대자적 존재가 어떻게 즉자적 존재가 되는 지, 변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의식이 없을 때, 자유가 소멸할 때 우리의 궁극적 자유는 소리 없이 온몸으로 받아들여진다. 해탈이 이런 경지일까? 천국의 문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일까? 마지막 연은 움직이는(변화하고 유랑하는) 새가 부동의 인식(나무를) 포옹하는 광경을 눈부시게 포착하고 있는 순간을 보여준다. 과도한 욕심을 버릴 때, 자신을 타자와 상대화하지 않을 때 당신은 하늘을 나는 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멧새의 집이 되는 대추나무가 될 것인가?

 

■새의 습성

 

『새의 습성』은 윤준경 시인의 세 번 째 시집이다. 두 번 째 시집 『다리 위에서의 짧은 명상』이 나온 지 일 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시인의 육성이 가감 없이 깔려 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역경 逆境이 침전되어 거울처럼 반짝이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시집 속에 들어박힌 시편들이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때때로 아픈 화살이 되면서 시인의 성숙을 기약하는 것이라면 『새의 습성』은 증오에서 사랑으로 이행하는 도정 道程의 기록일 것이다. 가시밭길을 걸어가 보지 않으면 평탄하고 순연한 길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새의 습성』은 새로운 길, 맑고 부드러운 길을 향해가는 디딤돌이자 도약대가 될 것이다 .

 

필자의 단견과 욕심으로 『새의 습성』에 숨어 있는 서정적 자아가 표출된 작품들을 언급하지 못했다. 몇몇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평자들의 주목을 받은 바 있고 노래로 불러도 좋을 가편 佳篇들도 곳곳에 숨 쉬고 있음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놓친 가편 佳篇들은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 두기로 한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동안 과정이 모호한 직선적 사유에 너무 길들여져 있었던 것, 화려하고 광대한 지식의 날갯짓에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낯설고 복잡한 미로를 너무 오래 걸어온 것은 아닌가 하는 뼈아픈 반성도 함께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시인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노래가 되는 시는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멧새가 전해주는 말과 기꺼이 가지를 흔들며 멧새의 집이 되어준 대추나무가 무작정 그리워지는 날이다.

 

 

                                            시학시인선 041 (시와 시학, 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