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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성, 생산성으로서의 몸의 귀환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8. 23. 21:13

생명성, 생산성으로서의 몸의 귀환

 

 

정유화

 

 

1. 성의 문학은 위반의 시학

 

인간의 본성에 대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상호 다른 관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양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세계는 동일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지녔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지만,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악한 본성을 지녔다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 본성을 ‘선한 본성/악한 본성’으로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전제로 한 것이 된다. ‘선한 본성’으로 주장한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이성적 욕망을 주된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며, ‘악한 본성’으로 주장한 것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감성적 욕망을 주된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선한 본성의 발현은 다름 아닌 이성적 욕망의 산물이다. 이에 비해 순자가 말하는 자기 이기적인 악한 본성의 발산은 감성적 욕망의 산물이다. 하지만 양자의 이런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본성을 후천적인 교육[禮]으로서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 교육에 의해 인간은 윤리·도덕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 대신에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은 윤리·도덕에 의해 지속적으로 억압당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선설과 성악설은 그 기본적인 차이가 노정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국에는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을 억압하는 동일한 코드로 작용하게 된다. 물론 순자가 인간의 감성적인 욕망을 본성으로 보긴 했지만, 그 본성을 긍정하지 않고 부정함[惡]으로써 정신주의에 귀속당하고 만다. 이와 같은 정신주의의 승리는 필연적으로 육체주의를 억압하는 결과를 산출하게 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코드를 성sex의 코드로 치환해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인 성에 대한 의식을 보면, 거기에 육체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주로 정신성을 부여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의식도 사회적 제도에 의한 무의식적 소산물이다. 그래서 성, 다시 말해 섹슈얼리티는 하나의 동물적 본능으로써 경계하고 억압해야 할 열등한 기호로 자리 잡게 된다.

문학이 추구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 탐구이다. 그것을 위해 문학은 사회적 제도를 위반하기도 하며 정신주의에 의해 억압된 육체주의를 복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본질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예의 성이다. 문학 속에 성을 대상으로 한 주제가 시공간을 초월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정신주의 입장에서 보면, 성은 육체적인 기표로서 동물적인 것, 열등한 것, 본능적인 것, 감정적인 것, 맹목적인 것 등의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성은 이성理性으로서 제어하고 훈육해야 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정신성 속에 육체성이 감금되면, 육체성은 무의식이 되어 의식 깊숙한 곳에 내장內藏하게 된다. 이와 같은 성의 억압은 인간 본질을 왜곡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문학이 위반의 시학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문학은 오히려 감추어진 것, 억압된 것, 왜곡된 것을 귀환시키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의 문학은 요컨대 몸(육체성)의 귀환을 요구한다.

이 글에서는 문학에 나타난 성, 즉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물론 성性의 의미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살펴 볼 수도 있으나, 이 글에서는 거기까지 외연을 확대하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남성성과 여성성의 대립항을 전제로 하여 본성으로서의 성적 욕망과 성적 행위의 의미 및 성적 세계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살펴볼 것이다.

 

 

2. 우주적 유기체로서의 성적 욕망

 

주지하다시피 서정주의 초기시에는 성에 대한 소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예컨대 그의 첫시집 『화사집花蛇集』(1941)에 실려 있는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가령, 「화사花蛇」라는 작품을 보면, 성적 욕망에 대한 관능적 열기가 시 텍스트 공간을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물론 성적 욕망은 화사花蛇 즉, 꽃뱀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시적 화자의 감정 가치는 양가적兩價的이다. 예를 들면, 성적 욕망에 대한 시적 화자는 ‘미/추, 선/악, 이성/감성, 정신/육체, 유혹/저주, 이상/현실’ 등의 대립 속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시적 화자로 하여금 자기 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서정주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도 육체적인 성적 욕망을 전적으로 긍정하려는 강한 의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서정주 시인이 정신주의, 이성주의에 의해 열등한 기표로 전락한 육체적인 성을 시 텍스트 공간으로 호명하여, 그것이 추구하는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몇몇 시 텍스트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적 욕망에는 육체적인 성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탐색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예의 육체적인 성에 대한 정신과 이성의 판단을 모두 괄호 속에 넣고서 말이다.

 

따서 먹으며 자는듯이 죽는다는

붉은 꽃밭새이 길이 있어

핫슈 먹은듯 취해 나자빠진

능구렝이같은 등어릿길로,

님은 다라나며 나를 부르고…

强한 향기로 흐르는 코피

두손에 받으며 나는 쫓느니

밤처럼 고요한 끌른 대낮에

우리 둘이는 웬몸이 달어…

                                  ──「대낮」 전문

 

*핫슈 : 아편阿片의 일종.

 

 

이 텍스트에는 대립에 의한 갈등이 모두 소거消去되어 있다. 성적 욕망과 행위에 대한 선악善惡의 판단은 중지된 채, 오직 성애性愛에 대한 황홀경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 해방과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 동안 사회 문화적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억압되어왔던 성적 본능의 세계, 육체적인 몸의 세계가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다.

이 텍스트에서 ‘붉은 꽃밭’은 모든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은 자유의 공간이다. 그 공간은 ‘피’로 상징되는 생명의 본능이 거리낌 없이 분출할 수 있는 곳이다. ‘피’는 정신성의 기표가 아니라 육체성의 기표이다. 서정주가 여러 꽃밭 중에서 ‘붉은 꽃밭’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러한 꽃밭의 ‘붉은색’은 곧바로 코피의 ‘붉은색’으로 전환되어 ‘피의 세계’를 구체화하게 된다. 생명의 피를 가진 몸, 이는 현실원칙에 지배되기를 거부하고 쾌락원칙에 지배되기를 소망한다. ‘자는 듯이 죽는다는 꽃밭’, ‘핫슈 먹은 듯 취해 나자빠진 등어릿길’이 예의 쾌락원칙을 실현해 주는 언술이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유혹하고 있는 ‘님’도 동일하게 쾌락원칙을 욕망하는 자이다. 물론 이 쾌락원칙에는 생生과 사死가 동시에 공존한다. ‘나와 님’이 함께 몸이 달아서 섹스를 하는 것은 생명의 분출이지만, 동시에 코피를 흘리는 것은 죽음을 향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정주가 성적 욕망의 세계를 긍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성을 담보로 하는 형이상적 원리보다는 감성을 담보로 하는 형이하적 원리가 인간 내면에 깊숙이 잠복한 억압된 욕망을 해소하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적 욕망이 계급을 중시하는 남성지배적인 사회, 자본이 지배하는 근대사회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정주가 대상으로 한 성적 욕망과 그 성적 공간을 보면 쉽사리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대낮」에서 ‘나’를 유혹하는 인물은 여성인 ‘님’이다. 신화적 세계에서 여성은 대지모신으로서 생산성, 다산성 등을 상징한다. ‘내’가 그 ‘님’을 쫓아가며 성애性愛를 욕망하는 것은 곧 대지모신의 세계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여성주의 세계로의 회귀인 셈이다.(여성 주체의 세계) 가령 “땅에 누어서 배암같은 계집은/ 땀흘려 땀흘려/ 어지러운 나-ㄹ 엎드리었다”(「맥하麥夏」)에서도, ‘계집’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애의 공간도 도시나 마을이 아니라 ‘등어릿길로 난 붉은 꽃밭’, 즉 자연적인 공간이다. 이것 역시 자연주의 세계로의 회귀이다. 따라서 성적 욕망 및 성적 행위는 여성주의와 자연주의 세계로의 몸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가시내두

콩밭 속으로만 작구 다라나고

울타리는 막우 자빠트려 노코

오라고 오라고 오라고만 그러면

사랑 사랑의 石榴꽃 낭기 낭기

하누바람 이랑 별이 모다 웃습네요

풋풋한 山노루떼 언덕마다 한마릿식

개고리는 개고리와 머구리는 머구리와

구비 江물은 西天으로 흘려 나려…

땅에 긴 긴 입마춤은 오오 몸서리친

쑥니풀 지근지근 니빨이 히허여케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 달드라 우름가치

달드라.

──「입마춤」 전문

 

 

여성주의와 자연주의는 남성중심주의와 달리 타자를 종속하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또한 그 삶의 원리가 우주적 순행원리와 닮아있다. 부연하면 이성적 논리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 삶의 원리를 변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합해 보면, 여성주의와 자연주의의 삶은 모든 사물들이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체로써 평등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우주공동체적 삶을 체현體現하고 있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 ‘시적 화자와 가시내, 석류꽃, 하누바람, 별, 노루, 개고리, 머구리’ 등의 존재는 바로 여성주의와 자연주의적 삶을 체현하고 있는 기호들이다. 이들은 우주를 구성하는 유기체적 존재로서 타자의 삶을 억압하거나 배제하지 않은 채 각기 독자적인 삶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예컨대 ‘개고리는 개고리대로 머구리는 머구리대로’ 성적 욕망을 실현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땅에 긴 긴 입마춤”을 하며 “즘생스런 우슴은 달드라”라고 한 의미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성적 행위와 동물의 성적 행위를 다른 차원으로 보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 인간 우월주의에 해당한다. 이때 성은 억압받기 마련이다. 시적 화자가 인간의 성행위를 동물적 차원으로 전환시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요컨대 그 이유는 인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한 존재에 지나지 않다는 유기체적 사유가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정주는 인간의 섹슈얼리티를 기존의 사회·문화적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기표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몸의 회귀야말로 우주공동체적 삶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서정주가 초기시를 거쳐 중·후기로 갈수록 ‘정신/육체’라는 이원론적 세계를 극복하고 일원론적 세계로 안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시적 사유에 기인한다.

 

 

3. 섹스를 통한 상생의 기쁨과 생산성의 의미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성에 대한 본능적 욕망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그 본능적 욕망이 시대적 상황과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배출되는 양태가 달라질 뿐이다. 말하자면 그 성적 욕망에 대한 의미 부여가 다르다는 점이다. 가령, 40년대의 서정주가 사유한 성적 욕망과 80년대의 이성복 시인이 사유한 성적 욕망을 보면, 그 시대적 편차에도 불구하고 그 본능적 욕망에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예의 성적 욕망에 대한 배설 방법과 그 의미 부여이다.

80년대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가 양적으로 성숙하고 팽창하던 시기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있어서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외형적으로는 물질과 자본의 풍요를 구가謳歌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풍요를 가능케 한 것은 도구적 이성을 담보로 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체제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을 점유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 역시 자본주의 체제 방식대로 배설·소비될 수밖에 없었다. 즉 생산과 소비의 방식대로 그렇게 성도 하나의 물질로서 생산─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질화 도구화된 성적 욕망은 윤리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성적 타락은 자본주의 체제의 병폐를 고착화하는 동시에 이에 순응하는 사회적 기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성복은 윤리 도덕적으로 타락한 성적 욕망을 통해 두 가지 의미를 포착해 내고 있다. 하나는 ‘부/가난’의 대립항을 고착화하는 자본주의의 병폐성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성이 소거된 불모의 육체성이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이 욕망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병폐성을 반성하는 동시에, 생명의 신비성이 내재한 몸의 세계를 복원하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성적 욕망에 대한 시적 표현과 장치가 서정주의 그것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생명성’에 귀착된다는 점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거기 꺼지지 않는 불이 있었다 가슴인지 엉덩인지 모를 부드러운 것이 어른거렸고, 잡힌 손과 손이 풀렸다 다시 잡히고 꼼짝할 수 없었다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크게 소리치거나 고개 떨구면 소리없이 불려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눌러앉아 밥을 먹고 변을 보았다 지치면 가족이나 옆사람을 괴롭혔다 쉽게 노여움이 들었고 발 한번 밟아도 불구대천 원수가 되었다 어떤 녀석은 사촌누이의 금이빨을 뽑으러 달려들었다 목을 졸랐다 조금 더 밝아지거나 어두워지기도 했다

조금 더 밝아질 때 희망이라고 했다 다시 어두워졌을 때 희망은 벽 위에 처바른 변 자국 같은 것이었다 천장은 땀에 젖었고 처녀들의 가슴에선 상한 냄새가 났다 까르르, 처녀들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졌을 때 사내들은 눈꺼풀이 내려온 처녀들을 향해 바지를 내렸다 욕정과 욕정 사이, 영문 모를 아이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아, 꺼졌으면 하고 중얼거렸다 꺼지지 않았다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전문 1)

 

이성복의 표현을 빌리면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은 유곽遊廓이다. 이곳에는 몸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처녀들이 기거起居하고 있다. 이 기거 공간을 보면, 서정주 시에서처럼 ‘붉은 꽃밭’, ‘콩밭’ 등의 열려진 자연공간과 달리 도시의 어느 밀폐된 허름한 ‘방’ 공간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미 ‘유곽’은 인위적인 장소로써 몸을 감금하고 억압하는 폐쇄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유곽은 그 자체로써 비정상적인 삶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유곽 안에서 이루지는 행위들이 모두 정상을 일탈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예컨대 ‘가슴인지 엉덩인지 모를’ 정도라는 언술,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라는 언술이 바로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눌러앉아 밥을 먹고 변을 보’는 이상異常행위, ‘가족이나 옆사람을 괴롭히는’ 폭력행위, ‘발 한번 밟아도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배타排他행위, ‘사촌누이의 금이빨을 뽑으러 달려드는’ 배금拜金행위 등도 그러하다. 또한 “크게 소리치거나 고개 떨구면 소리없이 불려나갔다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행위도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곽의 처녀들이 타자의 조종에 의해 기계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성적 욕망만 배설되는 이 유곽은 희망을 전혀 내포할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래서 육체적 욕정만 배설될 뿐, 섹스를 통한 더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부연하면 처녀들의 몸과 사내들의 몸은 ‘돈’을 매개로 하여 상호 욕망을 교환하는 도구적인 몸이 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내들이 처녀들을 향해 바지를 내리는’ 폭력적인 욕정은 ‘처녀들의 가슴에서 상한 냄새가 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처녀들의 몸은 사내들의 욕정을 배설해 주기 위한 용기容器로서의 몸으로 존재하게 된다. 말하자면 생산성이 없는 부패의 몸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복 시인이 사내들의 욕정만을 부정하고 처녀들의 욕망(돈)만을 긍정적으로 수렴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내들과 처녀들은 병폐를 지닌 자본주의 체제의 희생자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가령, “어느날 갑자기 재벌의 아들과 고관高官의 딸이 결혼하고 내 아버지는/ 예고 없이 해고된다”(「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체제는 재벌과 고관의 정략적인 결합에 의해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물론 부조리한 자본주의 체제로써 말이다. 그리고 이 자본에 의해 희생되는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힘없는 사내들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이들의 사회적 불만을 일소一掃하기 위해 유곽이라는 성적 배설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이들로 하여금 성적 욕망을 해소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는 곧 사회적 불만을 성적 욕망의 배설을 통해 교묘하게 해소하려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내들도 희생자들인 것이다. 처녀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이들이 사내들과 달리 이중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자본’과 ‘사내들’에 의해서 말이다. “언제부터 젖가슴은 무덤을 닮았는가”, “누가 소녀들의 가랑이를 벌리고 말뚝을 박았는가 언제부터 창녀들은 같은 길 같은 골목에서 서성거리고 초라한 사내들은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가”(「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에서처럼, 소녀와 창녀는 ‘자본과 남성’에 종속되어 불모의 몸이 되고 있다.

이성복 시인이 성적 욕망을 통해서 비판하고자 한 것은 바로 자본에 의해서 윤리·도덕적으로 타락한 성, 곧 불모화된 몸에 있다. 분명히 남녀 간의 섹스는 육체적 욕망의 소산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섹스를 통해서 상생의 기쁨을 창조해야 한다. 이것이 섹스에 대한 이성복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그렇다면 남녀 간의 섹스에 의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는 상생의 기쁨은 어떤 것일까.

 

 

그대가 결혼을 하면 여인은 외부로 열린 그대의 창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 그대가 그 여인에게서 아이를 얻으면 그대의 창은 하나둘 늘어난다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을지 모른다 그처럼 또한 그대는그대의 아내와 아이들의 외부로 열린 창 그대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도 그대를 만나지 않을 때 그대는 벽이고 누구나 벽이 된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8」 전문2)

 

 

결혼은 섹스를 전제로 한 남녀 간의 성적 결합으로서 하나의 사회적 제도에 속한다. 하지만 그 사회적 제도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결혼에 대한 의미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령 자본과 권력을 지배한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결혼은 남성적 세계에 종속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남편을 하늘이라 칭하고 아내를 땅이라고 칭하는 세속적 언사가 바로 그 예이다. 이렇게 결혼이 주종主從의 관계를 형성하게 될 때 ‘지배/억압’이라는 폭력적 의미구조를 산출하게 된다. 이에 따라 섹스 또한 남성의 성적욕망과 종족본능만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여성의 몸은 그러한 섹스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게 된다. 이성복에 의하면 이러한 결혼, 이러한 섹스는 단절과 고립, 어둠과 죽음의 세계만을 낳을 뿐이다.

 

사랑과 결혼은 이성異性에 대한 ‘나’의 신비한 체험이다. 이성은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존재로서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의 이성적 판단에 의해 그 이성의 본성을 다 탐색할 수가 없다.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부연된 성의 의미가 허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런 점에서 이성과의 섹스는 단순한 성적 욕망의 배설을 넘어서 신비한 세계에 대한 체험이 되는 것이다. 이 텍스트에서의 ‘결혼’이 바로 이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즉 이성과의 체험은 닫혀진 세계에서 열려진 세계로 나가는 ‘창’을 발견하게 해준다. ‘나’는 그 ‘여인의 창(몸)’을 통해 영원히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여인의 창(몸)’을 통해 얻어진 ‘아이’들은 또 다른 창을 ‘나’에게 마련해 준다. 물론 그 아이들 또한 ‘나’의 종족본능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 아니다. 사랑에 의한 섹스의 결실로 태어난 것이다. 예의 아이들도 나의 종속물이 아니다. 아이들 역시 나와 다른 존재[他者]로서 고유한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나에겐 신비한 존재이다. 주지하다시피 아이들은 미래시간의 기표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이들’의 창을 통해 신비한 미래까지 체험할 수 있게 된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외부로 열린 ‘나의 창(몸)’을 통해 그들이 알지 못했던 신비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섹스를 전제로 한 이성과의 결혼은 단순한 성적 욕망의 산물이 아니다. 이성과의 섹스는 그러한 육체적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주는 정신적 차원에까지 이르게 한다. 섹스를 통한 이러한 상생성相生性과 생산성生産性은 인간 존재에게 무한한 기쁨을 선사해 준다. 이런 점에서 이성과의 섹스를 통한 신비체험이 없다면 인간은 영원히 벽 속의 어둠에 갇힌 존재가 될 것이다. 상생과 생산성은 윤리 도덕에 기초한 것으로써 이성을 전제로 한 평등성을 요구한다. 이성과의 다름을 전적으로 인정한 가운데 ‘평등성’이 마련되어야 그것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sex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이다.

 

 

정유화 / 1962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했으며 1987년 『동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떠도는 영혼의 집』,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인 편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