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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의 쓸쓸함과 보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4. 10. 00:27
 

시 쓰기의 쓸쓸함과 보람

  이승하

  

  내가 아는 대다수의 시인이 등단하기보다 시집 내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시인이 시집을 내고 싶다고 어느 출판사에 연락을 했을 때, 흔쾌히 시집을 내드리겠다고 말하는 편집자가 있으면 좋으련만 대개의 경우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한다. 전통과 명예를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계속해서 시집을 내는 시인은 복 받은 소수의 사람이다.


  몇 년 동안 고심한 결과 시집을 낸다. 주변 사람들 가운데 시집을 사서 내게 갖고 와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가? 제자들 중에도 거의 없다. 선배나 손윗사람은 “자네 이번에 시집 냈다며? 나 한 권 안 줘?”라고 말한다. 소설집은 그렇지 않을 텐데 시집은 책이 작아서 그런지 그저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몇 년 동안 내심 고심참담한 밤들을 보내며 각고의 노력 끝에 낸 시집에 대해 세상의 반응은 이렇듯 싸늘하다.


  고향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여긴 시집 같은 것 서점에서 안 판다. 네 시집 한 권 부쳐주라. 내 주소는 말야……” 괘씸하긴 했지만 우정에 금이 갈까봐 시집을 부쳐주었다. 몇 달 뒤에 다시 전화가 왔다. 왜 시집 안 부쳐주느냐는 항의조의 전화였다. 배달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또 한 권의 시집을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서 깊이깊이 한숨을 내쉬었던 일이 기억난다.


  출판사마다 사정이 다른데, 시집이 다 나간 것이 분명한데도 새 판을 안 찍어주는 경우가 있다. 초판(혹은 재판)은 다 나갔지만 새롭게 1천 권(혹은 5백 권)이나 찍어 잘 나간다는 보장이 없어 그만 절판을 해버리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출판사에 따져 묻기도 무엇하여 그 시집에 대한 마음의 장례식을 올리게 된다.


  재작년부터 나는 수감자 두 사람과 펜팔을 하고 있다. 내가 낸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이란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며, 시를 몇 편 썼는데 봐달라고 시와 함께 편지를 보내와 답장을 해주다보니 펜팔 친구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은 무기수로서 이제 10년의 형기를 보냈고 또 한 사람은 12년 형기 중 10년을 채워 2년을 남긴 분이다. 두 사람 모두 내 시집을 읽고 편지를 보내온 분이 아니어서 마음 한편이 씁쓸하긴 했다. 하지만 교도소란 높은 벽 안에서 시상을 떠올리고 시심을 가다듬는 두 분에게 내가 힘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부지런히 답장도 보내고 책도 부쳐드리고 있다. 무기수로 있는 분은 시 쓰기 실력이 일취월장 발전하여 등단을 모색해도 될 지경에 이르러 있다. 이 분이 등단하면 제자가 등단한 것 이상으로 기쁠 것이다. 최근에 온 편지를 보니 이번 신춘문예에 또 떨어져 낙심이 큰 것 같았다.


  올해 대학 신입생 중 절반과 편입생 등 25명 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었다. 첫 시간이었다.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시인입니다. 대학교수란 것은 직업을 뿐, 저는 언제나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죽는 날까지 시를 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인이 되고 싶어 이곳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학생이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물어보니 나머지 학생들은 시나리오 작가, 방송드라마 작가, 소설가의 순으로 장래 희망을 말한다. 아아, 시인으로 살아가는 일의 쓸쓸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