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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권하는 사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08. 3. 2. 10:23
최근에 시집을 내고 출판사에 가서 수백 부의 사인 판매본에 이름을 적었다.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팔려나갈 거라 했다. 몇 시간 동안 똑같은 글자를 쓰고 나니 오른쪽 집게손가락이 쪼개질 듯 아렸다. 이 짓을 왜 하나 싶어 잠시 툴툴거렸지만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시집을 한 권이라도 더 팔아주겠다는데!

시를 쓰고 가르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정작 시의 효용성이나 대중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드높은 정신의 영역을 다루는 자가 그런 사소한 주제에 매달리면 안 된다고, 시인은 그저 점잖고 고매하게 창작에만 매진하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가 어떠한 경로로 독자에게 전달되고, 시집의 주요 독자층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일은 천박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곤 했다.

문화예술위원회의 사이버 문학광장(www.munjang.or.kr)에서 운영하는 ‘문학집배원’ 노릇을 1년간 하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현역 시인들의 시를 골라 매주 한 편씩 e-메일로 배달하는 게 내 임무였다. 나는 시를 기다리고 찾아 읽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놀랍게도 우리 국민들은 ‘아직도’ 시를 즐겨 읽고 있는 것이다. 일간지에 간간이 시가 실리는 나라, 한 해에 수천 편의 시가 발표되는 나라,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에 헤아릴 수 없는 시가 헤엄치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밖에 없다. 분명 우리는 풍성한 시의 나라에 살고 있다. 어찌 보면 우리 시인들은 미디어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시는 형태의 특성상 다른 장르의 창작물이 따라올 수 없는 기동성을 갖추고 있다. 길이가 짧기 때문에 독자의 입장에서 가독성은 또 배가된다. 누구나 카페나 블로그에 옮길 수 있고 메일로 쉽게 보낼 수 있다. 마치 유격전에 능숙한 게릴라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저 1980년대에 각종 대자보나 유인물을 통해 시가 어떻게 활용되었던가를 떠올려 보면 인터넷 공간은 하나의 통로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시가 ‘속도’에서 먼 곳에 존재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시가 배타적으로 생각하는 속도를 활용하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이것이 시를 발표하는 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저작권이나 전송권의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특정 인터넷 사이트가 상업적 이득을 염두에 둔 게 아니라면 시인의 입장에서는 저작권에 대해 당분간 관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독자들이 시를 산소로 생각하고 들이마시고 싶어 한다면 산소에 대한 소유권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시를 소외시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종이매체로 발표되는 시의 엄숙성이나 전문성 자체를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은 그동안 시를 써온 시인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인터넷에 마음을 열고 개입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인터넷상의 시 발표의 장은 설익은 아마추어리즘이 지배해온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최소한의 능력과 품격을 갖추지 않은 시인의 양산, 숙성되지 않은 시와 내용 없는 ‘삿대질 비평’의 범람, 그리고 시의 무분별한 이동 과정에서 숱한 기형이 생기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맞춤법이 뒤틀리고, 행이 꼬이고, 연이 떨어져나간 자신의 시를 두 손 놓고 바라보기만 해서는 시의 앞날이 불행해질 뿐이다.

한 발자국 더 나가 보자. 한국 문학의 세계화를 소리 높여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늘 기죽은 듯이 번역과 해외출판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첨병으로 인터넷과 시를 활용할 수는 없는 것일까? 만약에 한국 시를 번역하고 소개하는 번듯한 사이트가 하나 있다면? 그 누구든지 좋아하는 시를 번역해서 올릴 수 있다면? 그 번역시에 대한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토론의 장이 거기에서 마련된다면? 한국어로 쓰인 시의 번역이라고 해서 미리 겁먹고 빗장을 걸어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머지않아 시가 새로운 한류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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