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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숙 시집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정중동(靜中動)의 시간을 탐색하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6. 4. 7. 17:03

정중동(靜中動)의 시간을 탐색하다

나호열 (시인 · 문화평론가)

 

사물과 세계를 낯설게 사유할 때

고장관념은 비로소 부서진다

르네 마그리트

 

1. 오늘은 누구인가?

 

일 년은 365일이고, 하루는 24시간이다. 우리는 반성 없이, 아무렇지 않게 그 굴레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9시까지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며 11시 안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가득 찬 강박으로 삶을 꾸려간다. 이렇게 시간은 우리를 종(從)으로 부리며 흘러갔다. 그러다가 어느날 우리는 문득 ‘한때는 기둥이 될 줄 알았고 / 누군가의 악기가 될 줄 알았’(「대기자」부분) 으나 이제는 쓸모를 다한 방부목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 때, 속절없이 늙어가고 사회적 소명을 다한 다음에 찾아오는 임서기(林棲期) - 인도 힌두의 풍습에서는 50이 넘으면 숲으로 들어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 에 자신을 돌아보고 존재의 의미를 묻게 되는 시간을 뒤늦게 갖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삶이다.

 

하이데거는 ‘존재는 시간이다’라고 하였다. 즉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마주친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응답하는 본질이 존재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개별적 모든 사물들을 존재자라고 한다면 ‘존재’는 존재자들을 있겠끔 하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존재자로 살다가 어느 순간, 존재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특히 예술적 감각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땔감도 못 된다는 목공의 말에 / 눈빛이 잠시 휘청거’(「대기자」부분)리는 순간에 일어나는 자각이 존재와의 조우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조우는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아니다. 개별적 존재자인 나는 유한한 삶에 함몰된 나머지 회한이나 절망에 빠지기 쉬우며 짐짓 달관의 달콤한 환상 속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위무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아무튼 ‘존재’는 시간과 함께 흘러가지만 결코 소멸하지는 않는다. 흘러가면서 머무르는 모순 관계 속에서 시간과 존재는 쉽게 장악할 수 없는 커다란 슬픔이다.

 

김재숙 시집『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는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의 다른 이름인 존재 탐구의 시작첫 걸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자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주도적으로 시간을 통제함으로써 이윽고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미완성의 염원을 시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2. 화중유시(畵中有詩)의 길

 

‘그림 속에 시가 있다(화중유시畵中有詩)’는 말은 ‘시 속에 그림이 있다 (시중유화詩中有畵)’와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송대 (宋代)의 소식(蘇軾)이 당대(唐代)의 왕유(王維)의 작품을 평한 말인데 이를 요약하면 시와 그림 모두 이미지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미지lmage는 관념이다. 실체가 없는, 그러면서 감각을 초월하는 어떤 느낌이다. 그리하여 모든 예술은 단순한 복사를 벗어나서 재현(再現), 즉 추상(抽象)의 세계로 나아간다. 회화(繪畵)가 지닌 추상성은 현대시가 추구하는 이미지의 구축과 일맥상통한다. 시집『플라멩코의 저녁』에는 많은 화가들의 그림과 그 그림들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 등장한다. 김환기, 살바도르 달리, 모네, 고흐, 세잔, 르네 마그리트 등 서구의 인상파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보여지는 현실계 너머 혹은 그 속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역으로 추상을 통해 현상을 재현하는 시(詩) 의 영역으로 이끌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집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 1, 2부에 수록된 시들,「그림자 없는 세계」,「오선지 위의 까치」, 「별이 빛나는 밤」,「머무는 파랑」,「느린 시계의 노래」 연작시 등은 시인이 목도했던 그림들을 통해 인식하게 된 관념들을 다시 자신의 생활 속에 이입하고 시화(詩化)하는 작업을 통해 삶의 의미를 규명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몇 편을 읽어보자.

 

녹아내리는 시계* 위에서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춘 채 꿈을 꾼다

 

뒤틀린 그림자의 끝에서

늘어나기만 하는 순간을

주워 담는다

 

기억은 바람에 흩어지고

실체는 유리 조각처럼 부서진다

거울 속 나를 찾으려다

문득,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초현실의 시계는

무한히 돌아가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 「그림자 없는 시계」 전문

 

「기억의 지속은」은 1931년 제작된 살바도르 달리의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현상을 감각기관에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꿈틀거리는 세계를 오가는 그의 그림은 녹아내리는 회중시계를 통해서 시간의 왜곡을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시간은 균일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환경에 따라 –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참조- 절대적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시인에게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킨다.

 

한 때

분과 초가

나를 매달고 있었다

 

정확히 7시 25분

출근길의 신호등 아래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제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바늘은 여전히 돌고 있지만

시간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하략)...

 

늦는다는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시간이 숨을 쉰다

 

- 「느린 시계의 노래 1」

 

남들의 시간표가 아니라

내 안의 박자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느린 시계의 노래 2」 3연

 

지금의 나와 지나온 내가

한 겹으로 포개지고

그 사이에 아직 쓰이지 않은 하루가

얇게 끼어 있다

 

「느린 시계의 노래 3」 2연

 

인상파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서 얻게 된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발견과 그로 말미암은 의식의 확장에서 기인하는 여유- 지금의 나와 지나온 내가 한 겹으로 포개지는-는 물질적 기반에서 이루어진 안락한 삶에서 유발되는 자유와는 그 궤를 달리하고 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시인은 오랜 공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다. 정해진 규율에서 벗어나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생활로 이주를 한 셈이다.「느린 시계의 노래」 연작시는 주체적으로 시간을 제어할 수 있다는 정신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이런 정신적 자유는 개별적 존재자로 살아오던 삶에서 절대적 존재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 의존이라 하지만

나는 연결이라 부른다

붙잡음이 있어야 확장도 있는 법

 

어쩌면 삶은

서로의 표면에 스며들어

천천히 얽히는 일

 

- 「아이비의 생존법」 4.5 연

 

아이비는 우리말로 담쟁이이다.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어디에든 서슴없이 몸을 기대는, 어찌 보면 줏대가 없는 식물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이비의 행태를 통해서 다른 마음을 드러낸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서로 얽히고 스며들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버릴 수가 없다. 시집에서 유일한 산문시인「봄을 태우는 굴뚝」은 평범한 진술 같으면서도 그 속에 만물일체의 얽힘이 아름다운 시로 읽힌다.

 

몸을 이루는 흙은 경회루 연못에서 왔어요 물을 비워낸 자리에서 한 줌의 흙으로 피어났죠 물은 궁궐의 낮을 비추고 나는 밤의 온기를 올렸어요 한쪽은 깊어지고 한쪽은 쌓이고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숨을 나누어 가졌어요 몸에는 두루미와 봉황이 새겨졌지만 어디로도 날지 못해요 교태전 그녀가 한 번쯤 바라보았을 문지방을 스치던 연기 그게 전부였지요 꽃이 지는 소리 궁녀의 옷자락이 문풍지처럼 흔들리는 저녁을 보았어요 물을 기억하는 흙, 불을 품은 벽, 말하지 않은 자의 말이 되어 그녀의 봄을 태우던 나는 아미산의 굴뚝

 

- 『봄을 태우는 굴뚝』전문

 

모든 사물에는 플라톤이 말한 바, 절대적 관념, 즉 이데아가 있다. 흙, 물과 같은 질료들은 벽이 되고 굴뚝이 되지만 결코 자신들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물을 기억하는 흙, 불을 품은 벽은 말하지 않은 자(존재)의 말인 동시에 그들은 시인이 말하는 연결, 또는 얽힘이다.

 

이런 연결과 얽힘은 시집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 에서는 세세한 생활인으로서의 신고(辛苦)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얼핏 시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목을 술회한 시「계영배」를 보면 시인의 심성이 드러날 뿐이다. 계영배 (戒盈盃)는 잔에 구멍이 뚫려 있어 술을 부어도 잔이 차지 않는 잔이다. 시인은 아버지로부터 잔을 물려받고 ‘ 다 채울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말씀을 듣는다.

 

욕심을 비우면서

욕심을 다시 비우면서

잔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

푸르고 견고한 마음으로

 

- 「계영배」끝 연

 

몬스테라는 잎에 구멍이 나 있는 관엽식물이다. 시인은 ‘누구나 지워지지 않는 / 구멍 하나를 안고 살아’가는 것임을 받아들인다. 그 구멍은 결핍이고 불완전함이며 따라사 완벽하지 않음을 뜻한다. 계영배에서 배우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시「몬스테라의 말」을 빌어 ‘어쩌면 / 자신 안에 작은 틈을 내어 / 빛이 머물 자리를 슬며시 준비하는 일‘이라고 다짐한다.

 

이와 같은 희로애락에 오염되지 않은 심적 토로는 시집 곳곳에서 산견되고 있는 바「금전수의 반란」,「설강화」,「라벤더」,「스투키」와 같은 시에서 드러나는 작은 생명력에 대한 관심은 구차한 욕망에 기대지 않은, 꾸밈이 없는 시인이 지닌 본연의 미덕에 닿아 있다고 본다. 아런 식물적 사유에서 더 나아가 보다 동적인 이미지를 구사하며 삶의 활력을 찾고자 하는 시심도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이다.

 

흐른다는 것은

심장 사이로 길을 내주는 일

 

「샛강의 속삭임」 부분

 

묶인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다른 바다를 익히는 일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배우는 시간

 

「정박의 시간」 부분

 

흐르고, 묶이고, 흔들리는 삶을 이겨내는 길을 내주고, 익히고, 중심을 배우는 태도는 교언영색의 차원에서는 빚어낼 수 없는 시인만의 순정함이며, 시인의 생애를 빛나게 하는 상생의 세계로 고양(高揚)된다.

 

 

3. 시간을 멈추고 상생을 꿈꾸다

 

절대적 시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신앙의 차원과는 다른 존재 자체를 탐구한다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전복(顚覆)되는 낯선 세계를 발견한 시의 여정은 이제 부동(不動)의 케렌시아에 도착한다. 케렌시아는 투우 경기장에서 소가 잠시 쉬면서 숨을 고르는 장소’라는 뜻으로, 자신만의 피난처 또는 안식처를 이르는 말로 정의되어 있다. 피난처, 안식처는 어디에 있을까? 시「번역된 언덕」은 오래 전 이디오피아의 칼디라는 소년이 기르던 염소가 붉은 열매를 따먹고 나서 힘차게 뛰어다니는 것을 보고 식용으로 쓰기 시작한 커피의 기원을 기억하면서 커피를 마시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커피 열매를 따먹은 염소와 칼디처럼 시인은 커피를 마시며 카렌시아를 느끼고 그 곳에 도착한다.

 

향기로 번역된 언덕 위

몸과 마음이 풀리는 자리

나만의 케렌시아

커피 한 잔.

가장 느린 시간 속으로

 

- 「번역된 언덕」 끝연

 

부동(不動)이면서 그 안에 케렌시아를 품은 존재는 무엇일까? 어디에 있을까? 두 편의 시가 눈에 밟힌다.

 

시집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 에 객관적 상관물을 광물적 이미지로 차용한 시는「산의 방식」과 「바위」두 편 밖에 없다. 이 시편들은 화자(話者)의 감정이입도 영탄도 없이 그들의 지닌 상징성을 객관적으로 묘사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글에 주제로 삼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이끌어가는 묘미가 있다. ‘산은 기억하지 않는다 / 받아들일 뿐’(「산의 방식」3연)이라는 포용이 존재의 근원임을 넌지시 이야기할 뿐이다. 케렌시아는 이렇게 부동의 자세로 시간을 내면으로 승화시키면서 단단해지는 기다림에 있음을 , 말보다 깊어지고 침묵보다 깊어지는 언어도단 (言語道斷), 또는 판단중지의 순간임을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말이 없다는 건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뜻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기다림도 단단해진다

 

흘러간 물소리

부딪혀 상처 입은 것들까지

 

모른 척

등에 얹어 준다

 

그렇게 바위는

말보다 무겁고

침묵보다 깊어진다

 

- 「바위」 전문

 

상생은 이렇게 연결과 얽힘인 스며듦인 동시에 현실계와 환상계의 중첩이다. 이익의 평화로운 분배나 양보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의 겹침의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겹침의 세계와의 만남을 그린 시「고정관념 탈출기」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금지된 재현> 앞에서

전류처럼 감각이 요동친다

암흑이 걷히고 , 성안이 펼쳐진다

젊은 여행자들의 소음이

이질적인 세계를 두드린다

 

- 「고정관념 탈출기」 3연

 

시인은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전시회에 갔던 모양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우리에게 평범하지 않은, 형상을 왜곡하거나, 우리의 감각을 혼란에 빠트리는 엽기적이면서 새로운 작품들을 보여준다. 시에 언급한 <겨울비>,<집합적 발명>, <헤겔의 휴일>, <연인과 사람의 아들>과 같은 작품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쾌감(?)을 선사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는 다양한 분석과 이해가 필요하기에 이 자리에서는 시인이 ‘새 알을 보고 있을 뿐인데 / 새는 저만치 날아가는’(「고정관념 탈출기」 5연) 인식의 전복을 경험한 점만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시인이 토로한 대로 논리와 합리성을 따지는 일상의 경험 너머에 예술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서 시 쓰기의 결심이 서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하게 된다.

 

4. 어디로 갈까?

 

『순록의 울음이 흰 숲을 가른다』 는  김재숙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인은 시를 접하기 전에 그림에 먼저 입문을 했다. 현대회화의 흐름인 추상성과 각 작품들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것은 시 쓰기에 큰 보탬이 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시는 언어의 자의성에 따른 ‘의도의 오류’를 허용하고 낯섬의 세계를 탐색하는 일이다.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들은 시인의 의도와는 다른 한 장의 그림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재숙 시인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멀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남아 있고 / 슬픔이라 부르기엔 닳지 않은’( 그늘 아래 쓴 글)유한한 시간 속에서,

‘걷는다 / 아무도 향하지 않는 쪽’(「산책」)으로 힘든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김재숙 시인의 시는 담백하고 위장(僞裝)의 허세가 없다. 이 점은 시인의 장점이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이기에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변화를 꿈꾸되, 초심을 잃지 않기를!

 

지나간 것을 불러오는 일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

 

「시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