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비를 찾아서(2)
나호열(시인·문화평론가)
사람의 마음 속엔 두 가지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그 하나는 표현의 욕구로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 살아감의 의미를 찾으려 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은폐의 요구로, 세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소위 악플로 불리는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과 일에 날을 세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이 이를 말해 줍니다. 드러냄과 감춤의 두 가지 욕구는 즐겁기도 하고 괴로운 일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가까이에 도봉산이 있습니다. 그 중턱 숲 속에 시비가 하나 있는데 이병주 작가( 1921- 1992)의 「북한산 찬가」입니다.
나는 北漢山과의 만남을 계기로
人生이전과 人生이후로 나눈다
내가 겪은 모든 屈辱은
내 스스로 사서 당한 굴욕이란 것을 알았다
나의 挫折 나의 失敗는
오로지 그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親舊의 背信은 내가 먼저 배신하였기 때문의 결과이고
愛人의 變心은 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의 결과라는 것을
안 것도 北漢山上에서이다
- 「산을 생각한다」에서
도봉산 천축사 오르는 길 도봉서원터 아래 숲
소설가로 일세를 풍미한 작가가 어진 사람은 변함없이 굳건한 산을 좋아한다는 인자요산 仁者樂山의 이치를 자신의 삶에 비춘 글로서 모든 희로애락이 자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읊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에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고 때로는 본심을 감추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뜻하지 않은 풍파에 휩싸이게 되고 마음엔 원망이 기득 차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수많은 송덕비, 불망비를 만납니다. 후세에 길이길이 정신적 유산을 남기고 싶은 드러냄의 욕구가 없음에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비석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비석에 아무 글자도 새겨 넣지 않은 비석이 있으니 이를 무자비無字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라 부릅니다. 현존하는 이런 비석은 대부분 묘비로서 일곱 개 정도가 있는데 그 중 전남 장성 출신 박수량 (1491 – 1554)의 백비白碑가 있습니다. 24세에 관직에 올라 6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청백리의 삶을 살면서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실천했던 그는 묘비에 아무런 행적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의 곧은 마음은 마땅히 실천해야하는 것으로 공적功績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이런 묘비와는 달리 충북 진천 보탑사에는 백비가 있습니다. 사찰이기 때문에 오래 전 어느 스님의 행적을 기린 비석으로 보이는데 애시당초 아무런 글자를 새기지 않았거나 후대에 글자를 지워버렸거나 둘 중에 하나일텐데, 중론은 처음부터 무자비 無字碑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가끔 이 백비를 친견하면서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이병주처럼 내가 겪은 굴욕, 좌절, 실패, 친구의 배신과 변심이 모두 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에 이름을 드높이고자 하는 욕구도 따지고 보면 짧은 인생의 초로草露임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이 백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경이와 부끄러움의 기억이 한 편의 시로 남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보물 404호 석비
백비 / 나호열
큰 길 버리기 주저하는 나에게
슬쩍 옆모습 보여주는 오솔길을 따라
연꽃골로 가네
꽃술 자리 인적 뜸한 그곳에
참 이상도 하지
누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되돌아오고
또 누구는 그 뜻을 알겠다는듯이 웃음 흘리며 오고
나도 그 자리에 서 보네
비석이기는 하되 아무 글자도 적혀있지 않은 백비
풍상에 시달려 글자가 몽땅 날아가 버렸다거나
애시당초 글자는 한 자도 새겨지지 않았다거나
설왕설래 생각도 많았지만
지팡이 짚고 구부정 허리를 펴지 못하고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 노인을 보면서
백비를 세운 그 사람의 마음을 설핏 본듯하여
가슴이 서늘해졌다
- 인간을 읽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글자가 없고
영원을 읽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한갓 돌덩이에 불과한 것을
*백비
충청북도 진천 연곡리 보탑사 경내에 있는 비석
서천신문 2025년 5월 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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