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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낸 박준… 특유의 연애풍 덜고 후회 드러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5. 5. 15:10

사랑기 빠진 '앓는 詩'… 예쁜 말 대신 미안한 마음 담았어요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낸 박준… 특유의 연애풍 덜고 후회 드러내

입력 2025.04.29. 00:51
 
 
 

적막 속에서 말을 삼킨다. 삼킨 말은 속을 깊게 베어 상처를 낸다. 속으로 피 흘린다. 시인 박준(42)이 7년 만에 낸 세 번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창비)는 여백이 많다. 그러나 생략된 문장 사이로 언뜻 보이는 심연이 깊고 검다.

지난 15일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박준. 어디서 사진을 찍고 싶은지 묻자 시인은 "저쪽에 라일락이 피어있던데요"라며 라일락 나무로 향했다. /김지호 기자

 

박준 특유의 연애풍을 덜어냈다. 22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의 서정을 기대했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시는 섬어(譫語)에 가깝다. 앓는 사람이 정신을 잃고 중얼거리는 말. ‘그해 나의 말은/ 너에게 닿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말은/ 나와 가장 멀어진 셈입니다’(‘섬어’ 전문).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시인은 “고열을 앓으며 악몽 끝에 내뱉는 말은 해방이자 돌파구이면서, 별안간 일상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어감이 예쁘잖아요. 섬에 혼자 사는 말[言] 같기도 하고, 유배 보낸 말이기도 하고요.”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그다. 시인은 여전히 예쁜 말을 좋아했지만, 예쁜 시는 턱없이 부족해졌다. “지금까진 현실보다 시가 더 아름답길 바랐어요. 그래서 연시풍으로 장면이 풀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상황이 너무 절박하면 그게 좀 어렵더라고요. 시선이 발끝을 벗어나지 못하죠. 사랑기가 빠진 각박한 시집이에요.”

박준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에는 “장례처럼 생물학적인 죽음도 있고, 돌아가지 못하는 시간으로부터의 죽음도 있다”고 했다. /김지호 기자

대신 미안한 마음이 뭉근하게 배었다. 박준은 “지난 7년 동안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식구’라고 칭할 만큼 가까운 사람들이 세상을 많이 떠났다”며 “무릎이 꺾여서 끝없이 밀려드는 후회 속에서 미안한 감정이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나의 슬픔은 나무 밑에 있고/ 나의 미안은 호숫가에 있고/ 나의 잘못은 비탈길에 있다’(‘지각’).

 

두 번째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까지만 해도 박준은 요리로 당신들을 보살폈다. 겨울무를 어슷하게 썰어 내놓고, 쑥과 된장을 풀어 국을 끓일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먹을 것은 고작 미음 아니면 장례식장의 상차림뿐. 시인은 “요리도 살 만할 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 (중략) 진득하게 남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마음을 미음처럼’). 이번 시집의 정수다. 한동안 시집의 제목도 ‘마음을 미음처럼’ 또는 ‘미음’이었다. “몸져눕고 크게 앓고 나면 가장 순한 것부터 먹기 시작하잖아요. 가장 맑고 묽은 것부터. 스스로를 돌보는 데 가장 큰 목표가 맞춰져 있었어요.”

박준 시인이 살짝 웃어보였다. /김지호 기자

시인은 ‘마중도 배웅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들 앞에서는 그냥 양손을 펴 보일 거야’(‘손금’)라고 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인 동시에 “외면하진 않을 거야”다. 슬픔에 취해 비뚤어지려는 마음과 상실을 직면하려는 마음이 한데 섞였다. 박준이 엷게 웃었다. “비뚤어지면 또 얼마나 비뚤어지겠습니까. 다시 백지(白紙) 앞으로 와야 하는데….”

이번 시집은 “안녕을 찾기 위한 몸부림”. 다음은 어떨까. 박준은 “앓는 시가 아니라 누가 봐도 ‘호시절이네’라고 하는 시를 쓰고 싶다”고 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을 잘 애도하고 있으니 다음 시집은 꽃구경 가듯이 마냥 좋고 아름다운 것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런 삶이 펼쳐지길 바라는 염원도 있고요.”

 
황지윤 기자  
문화부에서 문학·책을 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