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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과 원경왕후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5. 2. 6. 15:55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 한국사]

'킹메이커'에서 '정적'으로… 부부도 피하지 못한 권력 다툼

태종과 원경왕후

 
 

요즘 ‘원경’이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요. 조선왕조 3대 왕 태종(1367~1422·재위 1400~1418)과 그의 왕비 원경왕후(1365~1420)가 주인공인 사극이에요. 고려 말 권문세족의 딸로 태어난 원경왕후가 남편을 직접 고르고 임금이 되게 한 데다 직접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여걸’로 묘사됩니다. 원경왕후의 ‘원경’은 죽은 뒤 생겨난 호칭이며 생전에 쓰던 이름은 아닙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의 역사 속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래픽=이진영

싸움터에 나가 남편과 함께 죽겠다

“저 말이 왜 돌아온 것이냐? 우리가 싸움에 진 것이냐! 내 직접 싸움터에 나가 공(公)과 함께 죽으리라!”

1400년(정종 2년) 1월, 이렇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의 부인 민씨였어요. 훗날 왕비가 돼 원경왕후로 불린 그 여성이죠. 이때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시점이었습니다. 왕자의 난이란 1392년 조선왕조가 개국한 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골육상쟁(가까운 혈족끼리 서로 싸움)을 말합니다.

태조 이성계는 조강지처인 신의왕후 한씨에게서 이방우, 이방과, 이방의, 이방간, 이방원, 이방연 6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신의왕후는 조선 개국 1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 태조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된 사람은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였는데, 그는 이방번과 이방석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낳은 이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습니다. 다른 아들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죠.

서울 서초구에 있는 헌릉. 태종(왼쪽)과 원경왕후 민씨(오른쪽)의 능이 함께 있어요. 원경왕후는 태종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태종은 원경왕후 능을 만들 때 그 옆에 자신의 능 자리를 만들었답니다. /국가유산청

 

1398년(태조 7년) 이방원의 주도로 정변이 일어났으니,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이때 왕세자 이방석이 살해됐습니다. 곧 신의왕후 소생의 둘째 아들인 이방과가 즉위했으니 조선의 2대 왕인 정종이었습니다. 이후 왕세자 자리를 노린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간과 이방원의 군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중, 이방원의 수하 한 사람이 화살을 맞아 말에서 떨어졌는데, 그 말이 도망쳐 이방원 집에 있던 마구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걸 본 이방원의 부인 민씨는 ‘우리 편이 졌다’고 생각해 “나도 싸우다 죽겠다”고 밖으로 나섰어요. 시녀 등 다섯 사람이 말렸으나 소용없을 정도였다고 해요. 제2차 왕자의 난은 결국 이방원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민씨가 대단한 강단과 용기를 지닌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왕이 되도록 도운 ‘18년 내조’

그런데 여기서 좀 살펴볼 점이 있습니다. 조선 개국 시점에 27세였던 민씨는 조선 여인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고려 여인’이었다는 것이죠. 고려 여성은 재산 상속을 받거나 제사를 지낼 수 있었을 만큼 가족 제도에서 조선 시대보다 차별을 덜 받았고, 정치적 활동 범위도 넓었어요. 또 하나, 민씨는 이후 조선 왕비들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왕이나 세자·왕자의 부인으로 ‘간택’된 것이 아니라, 고려 말인 1382년(우왕 8년) 유력한 가문의 자녀들끼리 혼인한 ‘대등한 관계’였다는 것이죠.

 
tvN 드라마 '원경'의 스틸컷. 남편 태종 이방원(왼쪽)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TVING

 

당시 여흥 민씨 가문은 고려의 유력 명문가였고, 이성계는 변방 출신의 무장이었습니다. 혼인 당시 민씨는 만 17세, 이방원은 만 15세였습니다. 민씨는 신혼 때부터 내조에 적극적으로 힘썼습니다. 남편이 세상을 경영할 뜻을 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는데, 민씨는 능숙히 살림을 이끌어 남편이 공을 세우도록 도왔다는 거예요.

이방원의 집에는 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기엔 부인 민씨의 빼어난 음식 솜씨도 한몫했다고 전해집니다. 민씨는 외모와 재주가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문신 변계량은 민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어요.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

조선 개국과 함께 후계 분쟁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민씨는 남편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남동생인 민무구·민무질 등 4형제가 모두 매형인 이방원의 심복이 돼 활약하도록 했습니다. 개국공신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私兵)을 없애려 하자 몰래 집 안에 무기를 숨겨 놓아 훗날을 대비했다고 합니다.

왕비가 되자 불행이 시작됐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조선의 권력은 마침내 남편 이방원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1400년 12월 이방원이 조선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자 민씨는 왕비 자리에 올랐죠.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태종의 후궁 간택을 둘러싸고 매우 큰 갈등이 일어났고,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를 폐비(廢妃·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함)할 생각까지 했지만 형인 상왕 정종이 말려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아들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쫓은 일로도 큰 고통을 겪었죠.

하지만 원경왕후 입장에서 가장 큰 비극은, 태종이 민무구·민무질 등 자신의 남동생 4형제를 모두 죽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태종과 원경왕후 부부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이죠. 태종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다음 임금 때 외척(外戚·어머니 쪽 친척)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철저히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대해선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해 반대파를 척결한 것’이라는 긍정론과 ‘권력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행태’라는 부정론이 엇갈립니다.

남편보다 두 살 많았던 원경왕후는 남편이 상왕으로 물러나 자신도 왕대비가 된 뒤, 남편보다 2년 먼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이 왕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한 ‘킹메이커’였지만, 정작 왕이 된 뒤 두 사람은 정적이 됐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 협력과 갈등 모두 신생국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잡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고, 권력은 부부 사이라 해도 나눌 수 없다는 냉혹한 진실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막장 드라마’ 주인공 같은 부부를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들은 세종대왕의 친부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