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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없는 집(2023.09)

염결한 고독자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4. 9. 30. 17:28

염결한 고독자의 시

 

정병근 (시인)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아침이 전해준 새 소리전문,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결이 없다

 

나호열 시인은 살아온 이력만큼 다채로운 경험을 지닌 시인이다. 시라는 화두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걸어온 긍지가 시와 인품에 배어있다. 이 글은 나호열 시인이 37세부터 55세까지 상재한 8권의 시집에서 뽑은 109편의 시를 읽고 느낀 바를 쓴 것이다. 30대~50대는 인생의 황금기이고 시인으로서도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시기라서 애착이 많이 가는 시편들일 것이다. 귀한 시 선집에 내 글이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든다.

나호열 시인의 시를 한 마디로 가벼이 말하기는 어렵다. 한 편 한 편의 시를 넘어서 40년 시 인생을 담지하고 반영해야하기 때문이다. 세월에 따라 인심과 말법이 바뀌듯이 시도 끊임없이 자기변화를 모색한다. 그의 시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흐름 속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나호열 시인의 시에 흐르는 주요 정서는 고독과 슬픔이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이 두 가지 정서를 축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고독과 슬픔을 품은 시적 자아상은 인생을 되짚고 성찰하는 서정시에서 많이 목격된다. 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과 수필을 포함한 문학 일반에서 ‘지켜보는 자’로서의 사명을 짊어진 서술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슬픔을 품고 방황하는 자아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고 격리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불행한 현실에 던져진 ‘피투자(被投者)’로서의 상실감과 염세적인 정서 안에서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세계를 꿋꿋하게 지키며 저 너머를 향해 가려는 초월의지를 보인다.

나호열의 시는 차이성과 분열성을 옹호하는 모더니즘보다는 과거를 성찰하고 융합하는 동일성의 세계관이 더 가깝게 작동하며, 사회적인 기여보다 개별자의 삶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의 시에서 보이는 고독과 슬픔의 정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생득적인 존재의 쓸쓸함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각 시집의 표제작을 중심으로 감상해보려고 한다. 시인은 시와 인생을 함께 사는 사람이고, 시에 인생을 실을 때 시인이라는 호칭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담쟁이덩굴은 무엇으로 사는가 (1989)

 

나호열의 이 시집은 자본주의의 하에서 소비되고 유통되는 인간의 무분별한 편의 욕구와 몰각된 매너리즘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모기향이 타는 것을 보고 아우슈비츠를 생각하고 “살의를 실현하는 이 손”(「모기향을 피우며」)이라는 표현대로 자신도 동참자임을 자백한다. 사육당하는 젖소는(「젖소」) 무반성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안일한 태도와 닮아 있고, 오징어의 비극을 자신의 비극으로 동일화하면서(「오징어를 씹으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낸다. 시인은 ‘담쟁이덩굴’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던져진 존재’로서의 실존적 지향과 초월의지를 보인다.

 

혼자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가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 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붉은 담장 기어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냐

흡혈귀처럼 붙어있는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냐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 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

 

ㅡ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는 생명의 원심력 ㅡ

 

-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전문

 

시인은 ‘담쟁이덩굴’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긴다. 스스로 혼자 서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담장 너머를 향해 뻗어가는 담쟁이덩굴의 생명력을 발견하고 그것에서 자신의 지향점을 찾는다. “지금 이 높다란 붉은 담장 기어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냐/ 흡혈귀처럼 붙어있는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냐/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 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는 표현은 삶에 임하는 시인의 각오이며 시적 자아의 필연성과 정체성을 선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시의 마지막에 붙인 추가 구절 “태어난 곳을 그리워하면서도 더 멀리 달아나는 생명의 원심력”은 양면모순을 동반하는 우주 만물의 생명 원리를 통찰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꿈속의 장면을 통해 ‘일하는 소’의 하루를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면서 고단한 생활을 한탄한다. 그 꿈의 연장선에서 ‘언덕에 비스듬히 앉은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마지막에 꾼 꿈은

푸른 하늘 비스듬히 내려앉은 언덕에

더욱 비스듬히 앉은 나의 모습

누군가 그 풍경을 액자에 담아갔는데

아직도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바로 오늘 일이다

 

- 「어떤 하루 1」 부분

“언덕에 더욱 비스듬히 앉은 나의 모습”은 앞으로 전개해나갈 시의 시적 화자 즉, 시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늘 “바로 오늘 일”이 될 것이다.

 

사진 시집,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1991)

 

연작시의 형식을 띤 두 번째 시집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는 사진과 시를 함께 편집한 시집인데, 요즘 ‘디카시집’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풍경을 찍은 사진에다 시를 붙인 개념이다. 이미지 사진과 시적 문장을 조합한 ‘디카시’는 휴대폰 카메라가 일반화되고 있는 요즘 추세에 맞춰 이미 시의 한 장르로 발전하고 있다. 시인은 이런 형식적 모색을 통해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심정으로 낯선 풍경에 시의 혼을 불어넣는다. 아무도 보지 않는 풍경은 곧 버려지고 잊힐 테니 지나가는 시인이 아니면 누가 노래를 불러줄 것인가.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여인

손바닥 만한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여윈 등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말없이 하루 종일 베틀이 움직이는 숨소리

가득 차는 밤

조심스럽게 허공을 휘저으며 찾는 햇살

그녀의 손길이 베틀위에 걸리고

철커덕거리며 베틀이 돌아가는 동안

그녀는 살아있다

태양 옷을 지어 입으면 나는 이 방을 나갈 수 있을거야

밤이 되면 베틀에는 한숨이 어리고

기도는 눈물로 가득 찼다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눈 먼 그녀만이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베틀은 자꾸 낡아져 갔지만

아직도 태양 옷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세상보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데

베틀은 무위無爲의 움직임으로

여인의 생애를 끌고 간다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여인

불 꺼진 부화장의 무정란처럼

 

- 「아무도 부르지 않는 노래. 49」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할머니나 어머니가 베틀에 앉아서 베는 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필자도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서양으로부터 직물과 직조기술이 들어오고 의복이 대량생산되면서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 되고 말았다. 시인은 어떤 장소에 보존되어 있는 베틀을 사진에 담으며 베를 짜던 여인의 모습을 살려낸다. “말없이 하루 종일 베틀이 움직이는 숨소리/ 가득 차는 밤”을 밝히는 여인은 시인의 어머니라 해도 좋을 것이다. “베틀은 자꾸 낡아져 갔지만/ 아직도 태양 옷은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아직도 미완성인 옷 한 벌을 기다리고 있는 심정이 된다. 이제 “베틀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은 “불 꺼진 부화장의 무정란처럼” 가버린 시대의 부재를 되새기는 유물이 되었다.

 

망각은 하얗다 (1991)

이 시집은 생활 속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시편들로 구성되어 있다.

 

먼 길을 돌아서 가는 중이다

따뜻한 가슴에 닿기 위하여

바늘 끝을 건너뛰고 있는 중이다

 

- 「길」 전문

 

걸음은 공간에 길을 만들고 삶은 시간에 길을 닦는다. 인생은 시공이 걸어가는 길이다. 그대의 “따듯한 가슴에 닿기 위하여” 시인은 일부러 먼 길을 택해 돌아간다. 가까운 길은 가시밭처럼 험난하기 때문이다. ‘바늘 끝을 건너뛰는‘ 이유는 날선 말들을 피해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까운 길일수록 돌아서 간다‘는 말이 생각난다. 그래야 안전하게 그대 앞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를 맞은 자리가

자꾸 부풀어 올랐다

벌을 준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 「매화를 생각함」 부분

 

매화가 피는 지점을 ‘매를 맞은 자리’로 표현 한 점이 절묘하다. 봄의 초입에 가장 먼저 피는 매화는 절개의 상징을 품고 있다. ‘매화’를 발음하면서 때리는 ‘매’가 생각났을 테고, 매로 “벌을 준 그 사람”의 행방이 궁금해진다. 그러니까 매화는 여자이고 매를 든 사람은 남자일 듯. 그렇다면 이 시는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봄이 오자 제일 먼저 꽃을 피웠으나 이미 그 사람은 가고 없는 현실을 한탄 하는 시로 읽힌다. 매우 낭만적인 애절함이 배어있다. ‘매화’는 ‘때리는 매로 핀 꽃 -> 매화’라는 중의적 언어유희를 기반으로 한 시로 읽힌다.

 

거품이 인다

적당한 향기와

백색의 거품 속에서

천천히 나는 마모되어 간다

사랑하겠노라고

온 몸으로 천만번 약속해도

지켜지지 않는

사는 일

망각은 거품처럼

거품은 망각처럼

때를 지운다

늘 물의 이치를 생각하면서도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위한

속죄양인가

날마다 나는

천천히 마모되어 가면서

나는

 

「비누」 전문

 

위의 시는 시인 자신을 비누에 비유하고 있다. 누군가의 몸을 씻어주는 용도를 가진 비누는 쓰면 쓸수록 마모되어 없어진다. 이때 거품은 시인의 욕망이고 언어이다. 비누는 미끈대는 속성과 거품으로 인해 대상의 몸에 완전하게 접촉할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대상을 향한 모든 언어는 미끄러진다‘는 라캉의 말이 생각난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의 언어는 미완의 결핍(불만)을 쌓게 되고 결국 균열 끝에 붕괴한다. 욕망을 품은 모든 언어는 실패하게 되어있다.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위한/ 속죄양인가/ 날마다 나는/ 천천히 마모되어 가면서/ 나는” 우리는 그런 상황을 견디며 살 수밖에 없다.

 

칼과 집 (1993)

 

시집 『칼과 집』은 40대 초반에 접어든 시인의 묵직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집과 밖을 오가며 부지런히 살아온 내공이 중후함을 더해가는 시편들이다. 방랑자로서의 이력이 쌓이고 개별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찰하는 내면을 보여준다. ‘칼과 집’에서 칼은 치열한 생활전선에 나가 싸우는 무사의 칼을 은유하고, 집은 개별적인 삶의 비애가 서린 공간일 테다.

 

샅바를 잔뜩 움켜쥐고

쓰러지거나

쓰러지지 않기 위하여

부딪치는 힘의.

하염없는 눈물을 본다

 

- 「장사의 꿈」 부분

 

위의 시는 바깥의 험난한 삶을 씨름 경기에 비유하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시적 자아는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서 “하염없는 눈물을” 목도하고 모든 생활인의 삶에 연민을 보낸다. ‘눈물’은 나호열의 시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여서 특별한 정서를 형성한다.

바깥을 떠도는 시인의 시적 자아는 가축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소모품에 불과한 가축의 삶을 확장하면 결국 개인도 사회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 소비되는 소모품일 뿐이라는 인식에 닿는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적 정서는 패배자나 약자의 삶과 쉽게 동일시된다. “등에 꽂힌 무수한 창칼에도 아픔을 모르는 채/ 또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는/ 늙은 소들” (「투우」) “생각은 무겁고/ 갈 곳이 막막한 노인처럼/ 캄캄한 과거에/ 뒷발질을 해 본다” (「노새의 노래」) “눈 가린 오리들의 미래/ 가끔씩 봉합되지 않은 생애의 틈새 사이로/ 조금씩 빠져나오는 깃털을 보며/ 없는 날개를 몸서리로 친다” (「오리털이불」)

 

어머니는 가슴을 앓으셨다

말씀 대신 가슴에서 못을 뽑아

방랑을 꿈꾸는 나의 옷자락에

다칠세라 여리게 여리게 박아 주셨다

 

(멀리는 가지 말아라)

 

말뚝이 되어 늘 그 자리에서

오오래 서 있던 어머니,

 

 

나는 이제 바람이 되었다

함부로 촛불도 꺼뜨리고

쉽게 마음을 조각내는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칼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서

길 잃은 바람이 되었다

 

어머니,

 

- 「칼과 집」 전문

 

바깥을 떠돌던 시인은 문득 어머니를 생각하며 회한에 젖는다. 어머니는 집을 지키는 사람이고 시인을 기다리는 사람이고 시인이 돌아가야 할 고향 같은 품속을 가진 존재이다. “어머니는 가슴을 앓으셨다” 한 자루 칼을 품고 바람처럼 떠도는 시인을 걱정하며 가슴앓이를 하는 어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다. 시인은 바람과 칼이 되었으나 “(멀리는 가지 말아라)// 말뚝이 되어 늘 그 자리에서/ 오오래 서 있던 어머니,”는 생사를 넘은 지점에서 시인의 가슴에 포원을 만들며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바깥세상에서 먹이를 구하는 시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저녁에 닿기 위해 새벽에 길을 떠”나는(「집과 무덤」) 존재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997)

 

앞서도 말했지만 고독과 슬픔은 나호열 시인의 시적 정서를 관통하는 주요 단어이다. 고독은 배제와 소외에서 비롯된 실존적 감정이고, 슬픔 혹은 쓸쓸함은 모든 시의 바탕을 이루는 배경음과도 같다. 시를 쓸 때 시인은 고행을 마다않는 고독한 구도자와 같은 역할을 스스로 떠맡음으로써 시의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유한한 세계에서, 고독과 슬픔은 사회적인 연대에서 얻는 기쁨보다 더 근원적이며 세상의 아픔을 서슴없이 껴안고 그 껴안음에 기꺼이 깃들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시는 혼자 쓸쓸하게 가는 것이다. 나호열 시인은 그런 시론을 체화하고 있는 듯하다.

 

누가 이렇게 힘든 자세를 견뎌낼 수 있겠는가

 

(...)

 

누가 이 못난 가슴에 소주라도 가득 부어줬으면 해

 

- 「빈 화병」 부분

 

넉넉히 백 년만 기다리거라

 

온몸을 부딪쳐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울음을 들려주겠다

 

- 「울진 적송」 부분

 

시인은 고독한 상태에서 ‘빈 화병’이 되고 ‘적송’이 되어 누군가를 기다린다. 누구일까? 타자의 호응과 상호작용에 메말라있는 시인의 처지와 심경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시인 스스로 택한 숙명에 가깝다.

 

평생을 배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슬픔

병도 깊으면 친구가 되는데 슬픔

아니다, 아니다 북풍 한설로 못을 박아도 푸르게 고개를 내미는

젊은 날의 부스럼꽃 토막토막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강물에 피어

미워할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슬픔은 문장이 되지 않는다

 

빈 손을 내민다

나전에서 봉평 가는 길에서 마주친 물길

하늘 끝자락을 잡아당기자 속살 깊이 그려낸 몇 필의 비단

생살로 또렷이 파고드는 꽃말,

슬픔은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1」 부분

 

시인은 “평생을 배워도”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회한한다. 슬픔은 “북풍한설로 못을 박아도 푸르게 고개를 내미는 젊은 날의 부스럼 꽃”처럼 힘이 세서 미워한다고 해결되지 않으며 “잊을 수 없는 슬픔은 문장이 되지” 못하고 “구절구절 꺾이고 젖혀지는 길 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시 속에서 슬픔의 원인을 밝히지는 않고 있지만 큰 슬픔을 당한 기억이 시인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음을 짐작한다. 시인의 개별적인 슬픔은 모든 타자와의 관계로 번지며 존재론적 ‘슬픔論’을 완성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2001)

 

이 시집은 개별자의 삶을 연민하고 옹호하는 시편들이다. 개별자의 삶은 결국 시인 자신의 삶인 셈이다.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전지적 자아의 관점으로 자타의 경계마저 무화함으로써 안정감을 찾고 밀도 높은 시적 성취를 보인다.

 

오늘도 느릿느릿 걸었다

느릿느릿 뛰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릿느릿 걸었다

성급하게 인생을 내걸었던 사랑은

온몸을 부벼댈 수밖에 없었던

세월 앞에 무릎을 꺾었고

나에게는 어차피

도달해야할 집이 없다

나는 요가수행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잠을 구겨 넣는다

언제나 노숙인 채로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 「달팽이의 꿈」전문

 

자신을 달팽이에 비유하고 있다. 시인 스스로 ‘성급했던 사랑’과 ‘안달했던 세월’을 인정하고 나자 인생은 어차피 도달해야 할 집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자신은 “요가수행자”임을 공표하며 “노숙자”로서의 숙명을 받아들인다. 신독/자겸/자족하는 태도를 다잡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까지 체념하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나는 꿈꾼다/ 내 집이 이인용 슬리핑백이었으면 좋겠다.” 시인의 옆자리는 여전히 비어있고 비워둠으로써 희망 가능한 미래를 열어놓는다. 그런 희망이 없으면 시가 너무 재미없지 않은가 말이다. 시 「달팽이의 꿈」은 가장 ‘나호열다운 시’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

내가 어디 있나

길 잃고 두리번거릴 때

여기 있어 하면서

내 마음에 못 박혀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다

 

- 내 마음의 벽화. 1

 

방랑자인 시인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처를 찾는다. “내 마음의 벽화는/ 말하자면/ 거실 한 쪽 벽에/ 못 박혀 있는/ 동양화 액자와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시적 자아를 통해 대자적 실존을 구현한다. 시인은 시적 자아가 있는 곳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다. 시인의 시적 자아는 푸른 하늘과 마을로 가는 오솔길과 밭가는 농부와 소와 텅 빈 여백을 품고 있는 벽화 속에 각인되어 있다.

 

출렁거리는

억 만 톤의 그리움

푸른 하늘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혼자 차오르고

혼자 비워지고

물결 하나 일지 않는

그리움의 저수지

머리에 이고

물길을 찾아갈 때

먹장구름은 후두둑

길을 지워버린다

어디에서 오시는가

저 푸른 저수지

한 장의 편지지에

물총새 날아가고

노을이 지고

별이 뜨고

오늘은 조각달이 물위에 떠서

노 저어 가보는데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주소가 없다

 

-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전문

 

‘저수지에는 물길이 없다’는 깨달음의 명제를 달고 있는 이 시는 저수지 자체를 하나의 유동체로 보고 있다. 저수지를 그리움을 일으키는 전 규모의 덩어리로 인식한 발상이 이채롭다. 저수지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리움에 전적으로 몰입하는 공간이다. 물결, 먹장구름, 물총새, 노을, 별, 조각달 등등이 저수지에 관여하지만 그것은 저수지라는 편지지에 쓰이는 작은 사연들에 불과할 뿐 그리움이라는 저수지 전체의 존재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저수지를 건너는 것조차 물길의 흔적이 없고, 그리움이라는 저수지의 심연에 닿을 수 없다. 그리움은 지울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슬픔의 원덩어리’라는 점을 깨우쳐준다.

 

낙타에 관한 질문 (2004)

 

이 시집은 풍경과 사물에 대한 사유가 담긴 시편들이다. 「화병」은 전 시집의 「빈 화병」,「달팽이」는 그 전 시집에 나오는 「달팽이의 꿈」의 연장선에서 더욱 심화한 내용인데, 그만큼 시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주제라는 의미로 읽힌다. 여러 상황에 처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편들에서 지천명에 접어든 시인의 초월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내가 오랫동안 해온 일은 무릎 꿇는 일이었다

수치도 괴로움도 없이

물 흐르는 소리를 오래 듣거나

달구어진 인두를 다루는 일이었다

 

「수행」 부분

 

아, 나는 탑이 되지 못하고

벽이 되었구나

얼굴에 가득한 낙서

급전대출과 주점 안내문

가까운 것은 주검이고

그대의 하늘을 가리고만 있구나

벽 속에서

파도가 소리치며 운다

벽 속에서

가슴을 치는 종소리가 운다

 

- 「탑과 벽」 부분

 

나는 개처럼 살고 싶다

혀를 끌끌 차면서

사람으로 살기가 너무 어렵다

 

- 「개 같은 날의 오후」 부분

 

어디서 오는지 묻는 이 없고

어디로 가는지 묻는 이 없는

인생은 저 푸른 물과 같은 것이다

높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어리석음이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임을

짧은 인생이 뉘우친다

 

- 「병산을 지나며」 부분

 

살아온 인생이 ‘무릎 꿇는 일이었고, 달구어진 인두를 견디는 일이었다’는 시인의 뼈아픈 고백에 깊이 공감한다. 존경받는 ‘탑’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되었음을 한탄하며 차라리 ‘개처럼 살고 싶다’고 토로하는 시인의 심정은 오죽할까... 인생은 “결국은 먼 길을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목마를수록 물은 천천히 마셔야 하는 법이다

생의 갈증은 절망도 천천히 가라앉혀야 하는 법이다

주전자에서 물을 끓는 소리

말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침묵이 왜 금보다 귀한지 알 것 같다

수증기로 사라져버리는 말의 독

눅신거리는 말의 뼈를 바르고 난 뒤

조금씩 식혀 마시는 물맛은

오랜 세월 죽은 듯 살아온 노인의 흰 웃음처럼

향기를 뒤로 남기는 법이다

 

- 「물을 끓이며」 전문

 

물과 말의 속성을 등치시킨 발상이다. “목마를수록 천천히 마셔야하는” 물과 같이 말도 한꺼번에 쏟으려고 하면 목이 막힌다. 뜨거운 물은 입으로 불어서 식히면서 마시듯이 끓어오르는 말도 식혀가면서 뱉어야 조리 있게 설득할 수 있다. 말을 잘 갈무리하는 사람은 내공이 높은 사람이다. 조금씩 식혀 가면서 하는 말은 “오랜 세월 죽은 듯 살아온 노인의 흰 웃음처럼/ 향기를 뒤로 남기는 법이다.” 시인의 이런 생각은 「안개」라는 시에서도 잘 나타난다. 선명한 것보다 때로는 모호한 것이 더 좋을 때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그 자리에 놓인 것들 탐내지 않고

손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 안을 줄 아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어

처음에는 더듬거리고 막막해 하다가

한 걸음씩 고개 숙여 걸어가다 보면

엷은 슬픔의 축축한 옷 안개의 속마음을 알게 되지

껴안을수록 나의 두 손은 허허로운 가슴께로 모아지고

헤쳐 나가면 나갈수록 무겁게 다가서는 생을 사랑하게 되었어

한 걸음 벗어난 아득한 벼랑 너머에도

하늘과 땅 밑에도 길이 있음을 눈감고 알게 되었다

 

- 「안개」 전문

 

안개는 낭만적인 소재로 잘 쓰인다. 우리는 가요를 통해 ‘안개 자욱한 밤’과 같은 상용구를 접한다. 그런가하면 기형도의 시 「안개」에서처럼 안개는 억압된 사회를 상징하기도 한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을 ‘안개정국’으로 빗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안개는 가시거리를 뿌옇게 흐려서 희미하게 만드는 날씨 현상으로 장애의 의미를 띤다. 이 시는 안개의 장애를 매력으로 치환하는 역발상이 담겨있다. 놓인 것을 탐내지 않고 다치지 않게 하고 부드럽게 감싸주는 ”안개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노화를 겪으면서 점점 흐려지는 시야와 기억력이 오히려 좋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밝고 선명한 것만을 좇는 요즘 세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불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족하는 시인의 태도가 드러나는 시이다.

 

풍경 소리가 곱기로는

 

파계사 원통전이 으뜸이지

 

염불하다 인기척에 살짝

 

문 열어보다 눈빛 마주친

 

비구니 고무신 끄는 소리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나는 알겠다

 

- 「홍도화紅桃花」 전문

 

이 시는 ‘파계사把溪寺’의 ‘파계把溪’라는 한자를 순간적으로 ‘파계派系’로 오독하면서 홍도화의 고혹적인 자태를 도발한다. 한 호흡에 읽히는 짧은 시지만 시적 탄력을 내장한 좋은 시로 읽힌다.

 

당신에게 말 걸기 (2007)

 

이 시집은 주로 여행지에서 발상한 시편들로 화해와 희망을 모색한다. 자타 사이의 불신과 불화를 딛고 ‘당신에게 말 걸기’로 화해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시인이 등단 후 30여 년에 걸쳐 찾아 헤맨 사람은 누굴까... 시인은 ‘봉감모전오층석탑’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거기에 고독을 견디며 균열된 자화상이 있다. ‘탑’은 시인이 그토록 찾던 ‘그대’라는 타자이면서도 곧 자신임을 깨닫는다.

 

아무도 호명하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오래 전부터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맑은 물가에 나아가 홀로 얼굴을 비춰보거나, 발목을 담가보다가 그 길마저 부끄러워 얼른 바람에 지워버리는 나는 기댈 곳이 없다. 그림자를 길게 뻗어 강 건너 숲의 가슴에 닿아보아도 나무들의 노래를 배울 수가 없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떨어질 낙엽 대신 굳은 마음의 균열이 노을을 받아들인다. 늘 그대 곁에 서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기댄 그대 때문에 잠깐 현기증이 일고

 

시간의 열매인 얼굴은 나그네만이 알아본다. 흙바람을 맞으며 길을 버린 그대가 하염없이 작다.

 

(각주 생략 - 필자)

 

- 「얼굴 - 봉감 모전 오층 석탑 1」 전문

 

이 시는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회한하는 윤동주의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아무도 불러주는 이 없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기댈 곳조차 없이 떠도는 신세를 한탄하며 상실감에 시달린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동일성에 뿌리를 둔 자아 찾기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고뇌하는 철학적 화두이며 무의식의 근원에 자리한 ‘자기(Self)’를 찾아가는 초월에너지로 작동한다. 시인은 시적 자아를 통해 자신을 끊임없이 타자화한다. “나에게로 가는 길이 점점 멀어진다. (...) 늘 그대 곁에 서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깨에 기댄 그대 때문에 잠깐 현기증이 일고”에서 ‘그대’는 ‘나’의 다른 형상이다. 시인은 어느 순간 ‘그대’가 ‘나’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흙바람을 맞으며 길을 버린 그대가 하염없이 작다.” 이 지점에서 시인의 자아는 무아로 바뀌면서 나와 그대의 경계가 무너지고 만물이 회통하여 하나가 되는 어떤 지점을 본다.

시편들 곳곳에서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겸손하고 경건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초기 시의 자기부정과 현실비판적인 경향이 내부적인 모색을 거듭하며 변화한 결과로 보인다.

 

아무도 앉지 않아도 의자는 무너져 가고

바람이 지나가도 의자는 무너진다

숲으로 건너가는 네 발 짐승의 꼬리처럼

여름 해는 얼마나 긴 그림자를

채찍으로 휘두르나

의자는 딱딱하다

딱딱할수록 나는 경건해진다

 

- 「의자」 부분

 

의자를 보고 “딱딱할수록 나는 경건해진다”는 표현을 얻어내는 시인의 염결한 시적 내공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 머물다 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그 누군가의 흔적은

새로운 나그네가 도착하기 전에

완벽하게 닦여져 나갔을 것이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걸레질에 밀려나간 사람의 냄새

소독 알콜처럼 빛나는 조명등이 서늘하다

이 방은 완벽한 여행자를 원했다

수건 하나 조차 걸려 있지 않은 옷걸이

검은 비닐로 싸인 휴지통은 하품하듯 비어 있다

이 방은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

여행자들은 15개 항목의

Guest Suite Policies를 읽는다

떠날 때 보증금을 깎이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손길이 조심스럽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어서

 

- 「Guest Room GS3」 전문

 

위의 시는 여행자인 시인이 낯선 게스트 룸에 들어가서 느끼는 고독감을 표현하고 있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위축되고 소심해지기 쉽다. “열쇠를 비틀면 딱딱한 빵 같은 풍경 속에/ 나그네는 잠겨버린다“ 자동으로 딸깍 잠기는 문소리를 들으며 시인은 매정한 인심을 느끼고 혼자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한다. 시인은 차라리 이전 투숙자의 흔적이라도 보고 싶지만 모두 치워지고 닦여져서 마치 새 방처럼 말끔하다. 시인은 오히려 ”이 방은 많은 상처를 안고 있다 (...) 이 방은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는다“고 방을 위로하며 자신의 고독감을 다독인다. ”나는 이 밤/ 이 방의 손을 찾고 있다/ 그래도 따뜻한 손은 있을 것 같아서/ 손잡고 잠들고 싶어서“ 시인은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같이 있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따뜻한 손“을 가진 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북은 소리친다

 

속을 가득 비우고서

 

가슴을 친다

 

한 마디 말 밖에 배우지 않았다

 

한 마디 말로도 가슴이

 

벅차다

 

그 한 마디 말을 배우려고

 

북채를 드는 사람이 있다

 

북은 오직 그 사람에게

 

말을 건다

 

한 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한다

 

- 「북」 전문

 

위의 시는 나호열 시인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북은 ‘둥~’ 하는 하나의 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연속으로 ‘둥 둥 둥’ 치는 것이다. 북은 하나의 음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일어서게 하고 어울리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시인은 ‘한마디 말로 평생을 노래하는’ 북을 경외하며 북의 말을 닮고 싶은 마음을 내비친다. 온갖 말들이 난무하는 현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시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

(......)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쓴다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쓴다

 

백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눈만 내려 쌓인다

 

- 「백지」 부분

 

위의 시는 ‘외로움’의 원인과 속성을 백지라는 상징물을 빌어서 역설적인 화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너’의 외로움을 통해 ‘나’의 외로움을 부각하는 화법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네가 외로워하는 것은 그 곁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지만/ 네 옆에 내가 갈 수 없음이 외로움이다.” 내가 외로운 이유는 너의 곁에 내가 없기 때문이라는 역발상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숲에다 편지를 쓰”거나 “길에다 하염없는 발자국에다 편지를” 쓰면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모두 실패했으니까 이젠 네가 나에게 다가오라는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너는 여전히 대답이 없고 나의 백지에는 “눈만 내려쌓인다.” 너는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나타나는 순간 시가 사라질 것이므로 살아있는 동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시인도 알고 있다.

 

이 세상에 못난 꽃은 없다

 

화난 꽃도 없다

 

향기는 향기대로

 

모양새는 모양새대로

 

다, 이쁜 곷

 

허리 굽히고

 

무릎도 꿇고

 

흙 속에 마음을 묻은

 

다, 이쁜 꽃

 

그걸 모르는 것 같아서

 

네게로 다가간다

 

당신은 참, 예쁜 꽃

 

- 「당신에게 말 걸기」 전문

 

못난 꽃이 어디 있겠는가. 꽃은 가장 아름다운 환대의 형색으로 우리의 눈을 붙잡는다. 빛을 타고 나타나는 모든 만물이 꽃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이 세상은 저마다 꽃을 피우고 살아가는 대동 세상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한쪽에 외따로 떨어져서 피어있는 작은 꽃에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듯하다. 꽃은 자기가 예쁜 줄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그런 꽃에게 말을 걸며 “당신은 참 예쁜 꽃”이라고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여기에서 ‘당신’은 늙은 사람이거나 소외된 이웃 또는 배우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빠짐없이 보살피는 천수천안의 그것과도 같은 사랑을 보인다. 이것이 시의 사명이고 시인의 숭고함이다.

 

나호열 시인의 시는 스스로 고독자의 길을 걸으며 염결한 슬픔으로 세상의 아픈 부분을 짚어내고 그곳에서 초월의 희망을 길어 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병근

경북 경주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1988불교문학으로 등단하고, 2001현대시학옻나무9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오래전에 죽은 적이 있다, 번개를 치다, 태양의 족보, 눈과 도끼, 중얼거리는 사람이 있다. 1회 지리산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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