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왕과 신하의 비밀 대화… 음모 꾸미는 것 아닐까 의심받았죠
조선의 '독대'
지난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있었던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을 앞두고,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대통령과의 독대(獨對)를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그런데 ‘독대’가 무엇일까요? 글자 그대로 놓고 보면 ‘(누군가를 다른 사람 없이) 혼자서 만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 말이 사뭇 긴장감 넘치는 단어였어요. 그 ‘누군가’란 바로 임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과 특정 신하 둘이서 몰래 나누는 대화
전통적으로 임금이 신하를 불러 정치나 경전에 대한 의견을 듣는 것을 ‘소대(召對·불러서 만남)’라고 했어요. 또 여러 신하가 차례로 돌아가며 임금 앞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는 것을 ‘윤대(輪對·돌아가며 만남)’라 했죠. 그런데 조선 시대엔 이렇게 왕과 신하가 만나더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왕의 비서 격인 승지(承旨)와 역사책의 원고인 사초를 쓰는 사관(史官)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대’는 바로 이 승지와 사관마저도 없는 채로 왕과 신하만 남아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요? 승지가 매일 임금을 수행하며 온갖 일정과 대화와 읽은 문서들을 기록하는 ‘승정원 일기’와, 사관이 쓴 사초를 바탕으로 편찬되는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왕과 신하가 대화한 그 내용은 기록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한마디로 남몰래 나누는 밀담이었던 것입니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행정을 원칙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의 관료 사회에선 바로 이 독대를 금기로 여겼습니다. 특정 신하가 임금을 독대하게 되면 두 사람 사이에 비밀스러운 음모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죠. 사간원과 사헌부에 속해 임금에게 쓴소리를 하고 여러 관료의 잘못을 따졌던 관리들을 대간(臺諫)이라고 했는데요. ‘독대’는 이들에게 비판받기 딱 좋은 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었는데, 왕이 가까운 친족이나 부마(임금의 사위)를 접견하거나, 승지나 사관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리는 일 정도는 독대로 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치적 카드가 된 효종·송시열 ‘기해 독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독대 불가’ 원칙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4대 임금 세종 같은 경우엔 종종 민심과 여론 파악을 위해 신하와 독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11대 중종 때도 권신(권세 있는 신하)인 김안로가 왕과 독대한 일이 있었죠. 하지만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 상황이 달라지게 됩니다. 매우 드물게 일어난 독대가 심각한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졌던 것이죠.
대표적인 사건이 1659년(효종 10년)의 ‘기해 독대’입니다. 효종 임금이 당대의 큰 학자이자 서인(西人) 당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송시열(1607~1689)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창덕궁 희정당에서 송시열과 단독으로 대면한 효종은 북벌(北伐)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의논했다고 합니다. 북벌이란 당시 유학자들이 정통성이 없다고 봤던 청나라를 군사적으로 공격해 병자호란(1636~1637)의 치욕을 씻으려 했던 계획으로 끝내 실행되진 못했죠.
독대였는데 그 대화 내용이 어떻게 남아 있을까요? 당사자인 송시열이 ‘악대설화’란 책을 썼기 때문입니다. 이 기록에선 효종이 북벌의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고, 송시열은 그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주자(朱子)의 가르침에 따라 국내 문제부터 해결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라 제안했다고 합니다. 해석하기에 따라 효종과 뜻을 같이했다고 볼 수도 있고, 사실상 북벌을 반대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록의 공개 시점이었습니다. 효종이 승하한 뒤 현종·숙종 때 ‘예송 논쟁’이 크게 일어났는데요. 그 핵심은 효종이 아버지 인조의 적장자(정실이 낳은 맏아들)가 아니기 때문에 사후 대우에 차이를 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이 바로 송시열이어서 숙종 초에 자칫 역적으로 몰릴 위기에 놓이자 ‘내가 이렇게 선대 임금과 뜻을 함께한 사람’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 내용을 밝힌 거예요. 송시열은 일단 정치적 위기를 모면했지만 기해 독대는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세자 교체 들끓은 숙종·이이명 ‘정유 독대’
1717년(숙종 43년) ‘정유 독대’로 알려진 또 한 번의 독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숙종 때 서인 세력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 나뉘었는데, 이후 노론이 주요 집권 세력이 됐습니다. 숙종과 독대한 인물은 노론 당파인 좌의정 이이명(1658~1722)이었고, 독대에서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훗날 경종이 되는 세자는 1701년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아들로서, 노론의 반대 세력인 남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노론은 세자를 기피하고 훗날 영조가 되는 이복동생 연잉군을 지지하고 있었어요.
노론 측은 ‘임금이 세자 교체 의사를 드러내자 이이명은 그것을 만류했고, 대신들이 회의를 거친 끝에 세자가 대리청정(왕 대신 정사를 돌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라며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소론 측은 ‘노론이 세자의 실패를 유도하기 위해 함정을 판 것’이라고 주장했죠.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정유 독대의 당사자인 이이명은 송시열과 마찬가지로 독대를 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지금 대통령과 둘이서만 만나는 일을 ‘독대’라고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독대’를 ‘①벼슬아치가 다른 사람 없이 혼자 임금을 대하여 정치에 관한 의견을 아뢰던 일 ②어떤 일을 의논하려고 단둘이 만나는 일. 주로 윗사람과의 만남을 이른다’고 풀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보다 뜻이 확장된 것입니다. 현대의 독대는 예전처럼 음모나 중상모략의 원천이 될 수도 있지만, 바른말로 상대방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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