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6·25 전쟁 때 중공군 총공세 막아낸 '현대판 살수대첩'
용문산 대첩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과 양구군에 걸쳐 있는 ‘파로호(破虜湖)’라는 호수가 있어요. 많은 사람이 방문해 수상 레저를 즐기거나 한반도 모양 인공 섬을 찾기도 하죠. ‘이름이 참 예쁜 호수인데 풍광도 좋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이곳은 인공 호수랍니다.
1944년 일제가 수력발전을 위해서 화천댐을 지었고, 그래서 만들어진 이 호수는 원래 ‘화천호’나 ‘화천저수지’ ‘대붕호’라 불렀어요. 파로호라는 이름이 지어진 건 1955년 일이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자를 보면 깰 파(破) 자에 오랑캐라는 뜻을 지닌 로(虜) 자로 돼 있어요.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의미죠.
파로호와 관련 있는 뉴스 하나가 최근에 나왔습니다. 지난 23일 육군 6사단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의 용문산 전투 전적비에서 용문산 대첩 73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용문산 대첩은 용문산 일대에서 중공군의 총공세를 막아내고 후퇴하는 적을 파로호까지 추격해 수장시킨 전투를 말합니다. ‘대첩(大捷)’은 ‘큰 승리’라는 뜻인데요. 이 대첩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1951년 봄, 다시 공격 시작한 중공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南侵·북쪽에서 남쪽을 침범함)으로 6·25전쟁이 일어났어요. 국군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가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반격에 나섰죠. 국민이 드디어 통일되는 줄 알고 기뻐하던 10월 말 뜻밖에도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
한 해 전인 1949년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공산 세력이 이때 북한 지원에 나선 것이죠. 당시 우리는 이들을 ‘중국 공산당 군대’라는 의미로 중공군이라 불렀습니다. 1951년 벽두엔 서울이 다시 점령당하는 ‘1·4 후퇴’가 일어났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3월에는 서울을 되찾고 38선을 돌파했어요.
4월에는 중공군이 ‘춘계 공세’로 알려진 대대적 재공격에 나섰습니다. 화천군에 있던 국군 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했습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부대를 다시 편성했어요. “오명을 씻기 위해 한 발짝도 밀리지 말고 진지를 사수하라”는 사단장의 명령에 장병들은 사창리 설욕을 다짐하고 굳게 뭉쳤다고 합니다. 일부는 철모에 ‘決死(결사·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힘을 다할 것을 결심함)’라고 쓰고 전투 준비를 했다고 해요.
국군 6사단의 대대적 반격
6사단이 주둔한 용문산은 북쪽으로 북한강, 남쪽으로 남한강이 흐르며 홍천-인제 방면과 횡성-원주 방면 도로가 근처에서 교차하는 육상 교통로의 요지이기도 했습니다. 5월 18일에 다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 중공군은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북한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투했습니다. 국군 6사단의 1대대와 2대대 병력은 북한강을 건너는 중공군 63군을 타격한 뒤 19일 낮 남쪽으로 후퇴했습니다. 공격해 오는 적 병력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었죠.
그런데 국군 6사단의 2연대 병력은 용문산 바로 북쪽에 있던 주(主)저항선(주력부대를 배치하고 폭격을 포함한 모든 전투준비를 갖춰 방어하도록 설정한 전선) 남쪽으로 가지 않고, 북쪽 전초기지에서 물러서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방어했습니다. 미국 공군과 주변 포병대대도 지원사격을 했죠.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중공군은 그곳이 한국군의 주저항선이라고 잘못 판단해 세 사단을 동원해 총공격을 감행했습니다.
19일 밤부터 20일 새벽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공격에 국군 6사단 2연대는 위기를 맞았지만 잘 버텼습니다. 유엔군은 20일을 맞아 서부 전선과 중부 전선에서 전면 반격 작전에 나섰고, 용문산에 있던 국군 6사단은 애타게 기다리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7연대와 19연대를 중심으로 기습 공격에 나섰습니다. 국군은 도주하는 중공군을 쫓아 4912명을 사살하고 총기 312정을 노획하는 큰 승리를 거뒀어요.
승전 기념비를 호수에 세우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중공군을 추격해 북진(남쪽에서 북쪽으로 진격함)한 국군 6사단은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일대에서 중공군 180사단을 대상으로 포위전을 펼쳤습니다. 29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 2600명을 붙잡았는데 6·25전쟁 중 가장 큰 수준의 포로였다고 합니다. 중공군 180사단은 80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잃고 와해됐는데, 중국 국가주석 마오쩌둥이 “180사단 소식이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라”며 밤을 새워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추격전의 끝은 바로 화천호였습니다. 지암리 포위전이 일어나는 동안 유엔군은 동쪽으로 양구, 서쪽으로는 화천을 틀어막아 동부 전선과 중부 전선에서 이미 내려와 있던 중공군의 퇴로를 봉쇄했습니다. 도주하던 중공군은 동서 길이만 20㎞가 넘는 화천호 앞에서 막혔습니다. 이제 그들은 화천댐을 통해서만 북쪽으로 건너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야간 행군을 해 춘천 북쪽으로 신속히 이동한 국군 6사단 병력은 29일 화천댐 일대를 봉쇄하고 패주하는 중공군을 섬멸했습니다. 이때 화천호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사살된 중공군이 2만4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현대판 살수대첩’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예요. 용문산에서 화천호에 이르는 국군의 승전은 중공군의 1951년 춘계 공세를 좌절시켰을 뿐 아니라 사실상 적화통일을 포기하는 계기를 만든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955년 1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화천호에 ‘파로호’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붙이고 친필을 새긴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입니다. 예전 북방 두만강 유역에 살며 때때로 우리나라를 침범했던 여진족(만주족)을 우리는 ‘오랑캐’라고 불렀는데요. 1951년 군가 ‘승리의 노래’에서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지푸라기)로구나’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 6·25전쟁 때는 국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중공군을 낮춰 부른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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