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장교 8명이 민간인으로 변복하고 왕비 시해 지휘
입력 2024.03.23 00:45
왕비 시해 사건의 진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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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에 촬영된 경복궁 광화문 전경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행동대는 긴 사다리를 놓고 담을 넘어 안에서 문을 열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북쪽 끝 건청궁에서 왕비가 일본인들의 손에 살해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그들은 왜 남의 나라 왕비를 살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만행을 저질렀던가? 국내 역사책의 기술은 한결같다. 청일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이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정권의 중심인 민씨 세력이 일본 배척 분위기를 주도하므로 이를 꺾기 위해 왕비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왕비가 쥐락펴락하는 나라라는 일인 어용학자들의 잘못된 역사 인식이 남아 있는 설명이다.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역사 왜곡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에게 일본의 침략사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6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1년 도쿄에 ‘아시아 역사 자료 센터’를 설립하여 국립공문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 방위성 방위연구소 등 주요 공기록 수장 기관의 침략 관련 자료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2009년 재일교포 역사학자 김문자가 새로 공개된 자료들을 이용해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일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사실, 즉 청일전쟁의 사령탑인 대본영이 지휘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 주요 내용으로 사건의 진상을 정리해 본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이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국의 ‘완전 독립’과 랴오둥반도의 할양이 중요한 약조였다. 그런데 6일 만인 4월 23일 일본 주재 독일, 프랑스, 러시아 3국 공사들이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되돌리기를 요구했다. 일본은 당시 구미 열강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 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3국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2억 엔 이상의 전비를 들인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리품이 사라지게 되었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조선 반도에 병력 일부를 잔류시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군사용으로 몇 곳에 시설한 전신선 관리를 이유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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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해 사건 지휘 체계 3인. (왼쪽부터)가와카미 참모본부장, 미우라 공사, 구스노세 중령. [사진 고문연]
고종은 나라가 전쟁터가 된 것도 불법 부당한데 잔류군 주둔은 있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에 이노우에 공사는 청국에서 받는 배상금 중 300만 엔을 조선 왕실에 제공하는 안을 내놓았다. 이마저 거부되자 그는 본국으로 소환되고 대본영 참모본부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 의 뜻에 따라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후임 공사로 부임한다. 가와카미는 그에게 조선 국왕의 완강한 주장을 꺾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했다. 왕비를 살해하여 비상사태 속에 일본군이 대거 서울로 들어가 친일 정권을 세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왕비 시해는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 민간인 ‘장사’들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한성신보』 기자들을 비롯해 남산 일대 거류지 장정 46명이 주범이라고 했다. 사건 후 국제적 비난이 일자 이들은 히로시마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김문자는 히로시마 대본영 산하 법정에서 육군 장교 8명이 따로 재판을 받은 사실을 찾아내 이들이 변복(變服)을 하고 46명의 민간인을 지휘한 사실을 밝혔다. 재판은 무죄 석방을 내리는 형식적 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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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류노스케. [사진 고문연]
1896년 1월 14일 오전 9시 히로시마 제5사단 사령부 내 군법회의 법정에 선 8인은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 소속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중좌(중령), 후비(後備) 보병 독립 제18대대장 겸 경성수비대장 바야바라 쓰토무(馬屋原務本) 소좌, 같은 대대 소속 6개 중대의 중대장 대위 6명 등이었다. 제18대대는 한성(서울) 장악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8인 중 최상위인 구스노세 중좌의 직함에는 ‘조선국 군부 고문’이 따로 붙어있었다. 김홍집 내각의 군사문제 조종책을 의미한다. 대본영 참모본부장-조선 주재 공사-8인의 장교-46인 장정이 수행하는 군사작전이었다.
일본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해군 소좌 니이로 도키스케 (新納時亮)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는 행동대가 궁궐로 들어갈 때 히로시마 대본영의 해군 중장 이토 스케유키 (伊東祐亨) 참모차장에게 “지금 훈련대가 대원군을 메고 소리지르며 대궐로 들어갔다”고 전보를 쳤다. 작전 실행에 관한 ‘최초 보고’였다. 이토 중장은 연합함대 사령관으로 청국 북양함대를 항복시킨 공로로 대본영의 참모차장이 되었다. 해군도 동참한 모양새다.
앞서, 이노우에 공사는 부임 초기 1894년 12월 22일 국왕 알현 때 조선 병사 중 우수한 자들을 뽑아 ‘훈련대’를 신설하여 근위병으로 삼기를 제안했다. 고종은 근위대란 미명으로 자신을 포로로 삼으려는 속뜻으로 읽고 처음부터 강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는 공사관 소속 무관들을 김홍집 내각의 ‘군부 고문’으로 배치하여 간섭의 통로를 만들었다. 이듬해 1월 훈련대가 발족할 때 국왕 측은 충직한 홍계훈을 훈련대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일본공사관의 조종을 다 막지 못했다. 군국기무처에서 김홍집 수하로 일본공사관 앞잡이 노릇을 한 우범선이 제2대대 대대장이 되어 수하를 동원해 ‘왕비 살해’ 작전의 일익을 담당했다.
항일투쟁 촉발 우려, 왕비 사진을 궁녀로 둔갑 시켰다
입력 2024.04.06 00:01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은 살해 현장에서 확인용으로 사용한 사진에 ‘궁녀’란 이름을 붙여 유포하였다. ‘궁녀’ 프레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왕비 사진 진위 논쟁을 불러일으켜 백가쟁명 속 왕비 사진 부재론까지 등장시켰다. 왜 그랬는지 따져보자.
1892년 11월 프랑스계 미국인 기자 드 거빌 (A.B. de Guerville)이 조선에 입국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릴 만국 박람회 홍보대사 자격이었다. 기자는 미국 공사관을 통해 건청궁(경복궁 내)에서 왕과 세자를 알현하고 왕비가 참석한 가운데 홍보 영상물을 돌렸다. 귀국 후 프랑스의 유명 사진 잡지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에 알현과 방영의 이모저모를 담은 ‘조선의 이 왕가(Yi, Roi de Coree)’란 글을 실었다.
“왕은 하얀 얼굴에 친절하고 부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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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고종과 세자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드 거빌은 ‘매직 랜턴(환등기)’으로 200매나 되는 장면을 스크린에 비췄다. 워싱턴의 백악관, 시카고의 20층 빌딩, 나이아가라 폭포, 철도 시설, 그리고 박람회장의 큰 건물들이 차례로 나왔다. 왕비는 관례대로 주렴 뒤에 앉았다. 첫 사진이 비치자 그쪽에서 술렁대는 기척이 있더니 두 번째 영상이 비치자 왕비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와 스크린에 다가가 두 손으로 화면을 어루만졌다. 왕비는 통역을 불러 카메라와 사진에 대해 ‘수천 가지’ 질문을 쏟았다. 근대 문명의 ‘마술 등불’이 조선의 왕비를 사로잡았다. 건청궁에는 미국 에디슨 조명회사와 계약하여 1887년 전등이 켜졌으나 환등기에 비치는 미국 풍경은 처음이었다.
드 거빌은 왕실 사람들에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왕은 하얀 얼굴에 총명과 친절이 풍기고, 모든 정사를 직접 처리해 훌륭하고 부지런한 임금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왕의 야행성 업무 스타일이 나온다. 왕은 암살을 두려워해 대신들과 가장 열심히 일하는 시간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낮에는 휴식을 취한다고 했다. 최근 역사적 인물들을 성적인 뒷담화의 소재로 삼았다가 구설에 오른 어느 총선 출마자는 고종에 대해서도 ‘밤 파티’를 주장한 적이 있는데, 가당치 않은 주장임을 이 미국인 기자의 증언으로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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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드 거빌의 ‘조선의 이 왕가’ 기사와 함께 실린 왕비의 사진. 『피가로 일루스트레』 1893년 9월 호.
드 거빌은 또한 왕비는 키가 작고 예쁘게 생겼다고 했다. 그녀는 아주 총명해 보여 왕의 국정을 돕고 있다는 소문을 기억나게 한다고도 적었다. 드 거빌의 글에 왕과 세자가 함께 한 사진(사진1)과 왕비 사진(사진2)가 실렸다. 각각 ‘이씨, 왕과 세자(Yi, Roi de Coree et Son Fils)’ ‘민씨, 왕비(Min, Reine de Coree)’라는 캡션이 붙었다. 왕은 그 이전에도 사진기 앞에 선 적이 있지만, 왕비는 처음이었다. 조선왕조는 역대 왕의 모습을 어진(御眞)에 담았으나 왕비에게는 이 전통이 적용되지 않았다. 최초의 왕비 모습 공개였다. 문명의 충격이 가져온 변혁이었다.
1894년 7월 31일 자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는 ‘고쿠민(國民)신문’에 ‘궁녀’란 캡션이 붙은 삽화가 실렸다.(그림1) 신문 창간자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는 원래 자유 민권운동가였다. 1890년 메이지 일왕의 ‘교육칙어’ 반포로 천황제 국가주의가 대세를 이루자 이에 맞춰 신문을 창간하고 국수주의 확산에 일익을 담당했다. 외무성 재정 지원을 받아 서울에 지사 격으로 ‘한성신보’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 신문사 기자들이 왕비 시해에 가담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청일전쟁이 터진 후 6일째 되는 날에 실린 삽화 ‘궁녀’와 관련되는 기사는 지면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편집 사고일까? 보고 그린 원화 사진을 추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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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제조상궁’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뉴욕 발행 『디모리스트 패밀리 매거진』 1894년 11월 호 표지에 ‘왕비의 상궁(The Queen’s Chief Lady in Waiting)’ 사진이 실렸다.(사진5) 고쿠민 신문의 ‘궁녀’ 삽화보다 3개월 뒤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프랭크 G 카펜터가 이해 여름 일본을 거쳐 전쟁터가 된 서울에 와서 왕과 세자를 인터뷰한 기사에 연계된 사진이다. 사진의 주인공 모습은 삽화 ‘궁녀’와 차림이 비슷해 원화일 소지가 있다. 신분을 궁녀 중 최상위 ‘상궁’으로 바꾼 것이 뭔가 수상하다. 일반적인 궁녀의 실제 모습은(사진3)과 같다. 앞의 ‘궁녀’ 나 ‘상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중드는 궁녀가 의자에 앉은 것이 가당치 않다.
(사진5)에서 주목할 것은 머리 장식 떠구지가 (사진3)의 궁녀의 것보다 훨씬 크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점이다. 떠구지 아래 가로질러 보이는 쌍비녀도 주목할 것이다. 쌍비녀는 조선 천지에 왕비 외에는 누구도 사용할 수 없는 장식이다. 1894년 12월 22일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가 왕을 알현한 장면 그림에도 동석한 왕비는 떠구지를 쓰고 비녀 둘을 꽂았다. (2024.2.3. ‘근현대사 특강’) ‘상궁’이 아니라 왕비 사진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