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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 짚신’으로 은혜 갚은 여인… 500년 전 ‘결초보은’ 속으로 빠지다

[박경일기자의 여행]

  • 문화일보
  • 입력 2024-01-11 09:0
 

경북 안동 풍산읍 오미마을의 고택들. 오미마을은 여덟 형제가 소과에 급제하고, 이 중 다섯 형제가 대과에 급제하면서 단숨에 명문가로 떠오른 풍산 김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안에는 넓은 마당을 가진 고색창연한 고택이 그득하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안동·영주서 만난 ‘김대현·전주 이씨’ 이야기

임진왜란 직후 산음현감 김대현
선정 베풀다 갑자기 병으로 별세

산청에서 안동까지는 500리 길
현민들 먼길 마다않고 주검 운구
아내 전주 이씨가 짚신삼아 보은
현민들은 사당 지어 대대로 보관

영주엔 김대현이 살던 집 유연당
아들 아홉명 낳아 여덟째가 죽어
여덟명이 모두 소과에 합격하고
다섯명은 대과 급제 ‘명문 집안’

도리 다한 어머니 이씨의 가르침
구성공원·오미마을 곳곳에 흔적


영주·안동·예천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머리카락 잘라 짚신을 삼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동에서 전하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이라 불리는 ‘원이 엄마’ 이야기입니다.
아픈 남편의 쾌유를 기원하며
아내가 제 머리카락으로 짚신을 만들었다는 400여 년 전 사연입니다.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무덤에서 나온 짚신 한 켤레와
아내의 눈물겨운 한 장의 편지로 이런 사연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원이 엄마 말고도 머리카락으로 짚신 삼았던 이가 또 있었습니다.
원이 엄마의 사연도 눈물 나는 것이었지만,
새로 마주친 사연도 못잖게 감동적입니다.
산청 현감을 지낸 김대현의 아내 완산(전주) 이씨입니다.
그가 머리카락으로 짠 짚신은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서 더 뭉클합니다.
제 머리카락을 잘라 진심을 다해 만든 짚신을, 아내는 누구에게 보냈을까요.
경북 영주에서 안동으로, 거기서 또 예천까지….
머리카락을 잘라 짚신을 삼은 이야기를 따라나섰던 여정입니다.
풍경도, 먹거리도 아니고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여행이야기입니다.

# 머리카락·결초보은을 마음으로 엮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한 사내가 있다. 유연당 김대현.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조선 초의 인물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이 있는 그 풍산이다. 그는 젊어서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닦으며 고향을 지켰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굶주리고 병든 백성들을 기꺼이 도왔고, 전쟁에 나섰다. 전쟁이 끝나고서 지금으로 치면 경남 산청군수쯤 되는 벼슬인 산음 현감을 지냈다.

현감으로 있으면서도 선정에 대한 칭송이 끊이질 않았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향교를 중건해 학풍을 진작했고, 향교를 준공하던 날에는 노인들을 모시는 양로잔치를 크게 열었다. 그는 자상하기까지 했다. 몸이 불편하거나 해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노인들을 위해서는 지팡이와 쌀, 고기를 따로 보냈을 정도였다.

그러다 급작스레 병을 얻어 자리에 누웠는데 그만 그 길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나이 오십이 되던 해였다. 명색이 현감인데, 죽고 난 뒤에 염습할 옷가지조차 없었을 정도로 그는 가난했다. 주변 선비들이 모여서 헌 옷가지를 구해다가 염을 했다는 얘기도 있고, 가족이 끼니조차 풍족하게 잇지 못했다는 잘 믿기지 않는 친구의 목격담도 남아 있다.

제 주머니만 채우려는 탐관오리들이 득세하던 시절, 이토록 청렴했으니 백성들이 따르지 않았을 리 없다. 이웃 함양의 군수가 여러 고을에 부고를 내고, 선비들이 지성으로 도와 상례를 치렀는데, 그의 발인 날에는 읍민이 모두 모여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다. 산음현의 백성들은 기꺼이 현감의 주검을 고향인 안동 풍산까지 운구했다. 산청에서 안동까지는 자그마치 500리 길. 산청 사람들은 그 긴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김대현의 주검은 풍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대현의 아내는 500리를 걸어 남편의 주검을 고향까지 운구해준 이들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김대현의 아내는 전주 이씨다. 그 시절 아녀자가 다 그랬듯 이름도 없이 그냥 ‘전주 이씨’다.

무엇으로 보답할 수 있을까. 생각 끝에 전주 이씨는 자기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리고 자른 머리카락에 짚을 섞어 짚신을 삼았다. 결초보은. 이렇게 만든 짚신을 산청으로 보냈다. 현감 부인이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짚신을 받아든 산청 사람들은 적잖이 당혹스럽고 난감했으리라. 이걸 대체 어째야 할까. 어찌 누구 한 사람이 갖고 있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마을 사람들은 짚신을 보관하는 사당을 지었다. 사당에 짚신을 보관해 선정의 목민관을 기리고, 그 부인이 몸소 보여준 결초보은의 도리를 생각하며 제사를 올렸다.

산청 사람들은 그로부터 270년이 지나서 그 짚신을 풍산 김씨 후손에게 돌려줬다. 풍산 김씨 후손은 그걸 받아다가 남편 김대현과 합장한 전주 이씨 묘소 곁에 묻었다. 남아 있는 기록은 여기까지다. 그 뒤에 짚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김대현이 살았다는 영주의 옛집으로 가보자.

# 한가하게 남산을 바라보는 자리

영주의 시내 중심가에서 살짝 벗어난 하망동의 쇠락한 단독주택가 골목 끝에 김대현이 살던 집이 있다. 생원시에 합격하고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그는, 서른여섯 되던 해에 외가가 있던 영주에 집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영주에 새로 지은 집에는 ‘유연당(悠然堂)’이란 현판을 내걸었고, 그걸 자신의 호로도 삼았다.

‘유연(悠然)’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의 한 구절에서 따온 이름이다.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꽃 꺾어 들고(採菊東籬下)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네(悠然見南山)’란 구절이다. 유연은 ‘멀리서 한가롭게’라는 뜻. 하지만 그의 마음은 글씨의 뜻보다는 글을 쓴 사람, 그러니까 도연명에게 있었다. 그는 생전에 도연명의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청렴하고 결백한 풍모를 흠모하며 닮고 싶어 했다.

유연당은 지금 비어 있다. 구석구석 후손들의 살림 흔적이 보이지만, 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웃들도 유연당을 아예 모르거나, 유연당은 알아도 김대현의 이름이나 풍산 김씨 내력은 몰랐다. ‘영주의 3대 전통가옥’ 중 하나라지만, 대접은 이름값에 못 미치는 셈이다. 빈집은 누추하고 쓸쓸해서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봐도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는’ 풍류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이 집은 후손들이 두 번에 걸쳐 옮겨 지은 것이다. 본래 휴천동에 있던 것을 한 번 옮겼다가, 일제강점기 때 ‘터가 좋다’는 이유로 다시 여기로 옮겨왔다. 여기 하망동에 옮겨 지은 게 1920년대라니 그래도 이 집에 쌓인 시간만 100년이 넘는다.

김대현이 영주 유연당에 머물던 시기에 임진왜란이 터졌다. 마침 세상을 뜬 부친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 중이어서 의병으로 참전할 수 없었던 그는, 대신 큰아들을 의병에 보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 책임’의 실천이다. 상중에도 그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진심으로 돌봤다. 그는 집 앞에다 천막을 치고 곡식을 나눠주고 난민들을 구제했다. 천연두가 창궐하고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도 많아 조정에서는 고을에 구휼 기관을 뒀는데, 그곳에서 김대현은 백성을 돌봤다. 감염 우려로 다들 꺼렸던 병든 자들을 기꺼이 보듬어 안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죽을 쑤어 먹여 일으켜 앉혔다. 시묘살이가 끝나자마자 그는 큰아들을 불러들이고는, 군사를 모아 의병부대로 들어갔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보았던 조정 대신들이 천거해 그는 경북 청도에서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찰방 벼슬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경찰서장 겸 예비군 대대장쯤 되는 벼슬이었다. 임기를 끝낸 뒤 아전과 군졸들이 십시일반으로 공덕비를 세웠으니 거기서도 안팎으로 인심을 얻었던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산음현의 현감 자리에 올라 죽기 전까지 선정을 베풀었다.

안동 오미마을 들머리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다섯 그루 버드나무는 급제한 다섯 형제를 기리며 심은 것이다.



# 여덟 형제 모두가 과거급제한 마을

이제 김대현의 고향이자 종가가 있는 안동 풍산읍으로 넘어가 보자. 풍산읍 오미리는 풍산 김씨 동족촌이다. ‘오미’란 마을 이름은 인조 임금이 하사했다고 전한다. 임금이 김대현의 종가가 있는 마을에 지명을 하사하게 된 배경에는 ‘잘 거둔 자식 농사’가 있다.

김대현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여덟째 아들이 열일곱 살 때 낙동강에 빠져 죽었고 여덟 아들이 남았다. 남은 여덟 아들은 모두 성균관 입학허가 시험인 사마시에 합격했다. 그중 다섯 아들은 문과에도 급제했다. 여덟 형제가 모두 소과(小科)에 급제하고, 그중 다섯 형제가 대과(大科)에 급제한 사례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로써 풍산 김씨는 단숨에 명문가로 떠올랐다.

과거가 끝나면 합격자 이름을 방으로 붙이는데, 소과인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을 연방(蓮榜)이라 하고, 대과인 문과 합격방을 계방(桂榜)이라 한다. 김대현의 아들 여덟 명의 이름이 연방에, 다섯 명의 이름이 계방에 나붙으니, 인조는 이를 일러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고 칭찬하고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오미동(五美洞)’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인조는 경상감사에게 지시해 오미동 마을 입구에 ‘봉황려(鳳凰閭)’라는 문을 세우도록 했다고도 전하는데, 예로부터 봉황은 아홉 개의 알을 낳는다는 전설을 빌려 김대현의 가문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봉황려는 사라지고 그 유래를 적은 비석만 남아 있다가 390년 만인 2021년 12월에 다시 세워졌다. 오미리로 들어가는 입구에 가장 먼저 눈길을 붙잡는 게 바로 이 봉황문이다. 높이 세운 문에 새겨진, 마주 보고 있는 두 마리 봉황은 마치 대통령 휘장을 연상케 한다.

봉황문을 들어서면 구시나무 거리가 있다. 김대현이 아홉 아들을 상징하는 버드나무 아홉 그루를 심었다고 해서 구수(九樹)거리, 즉 ‘아홉 그루 나무 거리’라 부르던 곳인데, ‘구수’가 구전 과정에서 ‘구시’가 됐다. 구시 거리에는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만 아름드리로 남아서 대과에 급제한 다섯 아들을 상징하는 ‘대과목’으로 불리고 있다.

오미리에는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 즐비하다. 김대현의 종가인 허백당 종택을 비롯해 학암고택, 영감댁, 삼벽당이 있다. 이 중 영감댁은 고택을 개방해 민박도 받고 있다. 전통마을이라지만 말끔히 정비된 건 아니고, 전통 고택과 플라스틱 기와의 농가, 시멘트 양옥이 뒤섞여 있다. 좀 어수선하긴 하지만, 말끔하게 단장한 관광지가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 느낌이 들어서 더 나은 듯하다.

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도림 강당이었다. 마을에서 사뭇 떨어진 숲속에 자리 잡은 강당인데 지붕 설계가 독특하다. 지붕이 공(工) 자 형상이다. 후손들의 공부를 독려하고자 하는 뜻이란다. 강당 주위에는 근사한 수형의 아름드리 배롱나무와 향나무가 서 있다. 강단 옆으로 조상을 모시는 사당 추원사가 딸려 있는데, 이곳에 김대현과 여덟 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있다.

# 보은의 도리를 다한 어머니의 가르침

한 집안 여덟 형제의 급제는 화제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모르긴 해도 풍산 김씨 집안의 교육 방침이나 비결에 대한 궁금증이 쏟아졌을 것이었다. 아마 당시 여덟 형제 급제의 공로나 영광은, 오로지 아버지 김대현과 문중의 영광으로 돌아갔으리라. 본래 ‘뼈대 있는’ 가문이었던데다 김대현이 평생 시문을 닦았고, 벼슬을 하면서도 백성들의 칭송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이었으니 왜 안 그랬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여덟 아들의 급제 영광 뒤에는 현모(賢母) 어머니 전주 이씨가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는 감동적인 일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리 특별한 건 아니다. 따져보면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가 상대를 위해 목숨까지 던졌다는 이야기가 하나둘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랑이 아니라 ‘보은의 도리’를 위해 아녀자에게 가장 소중한 머리카락을 잘라 짚신을 삼았다는 건 전례가 없다. 도리를 목숨처럼 여긴 어머니 아래서 자식이 올곧게 자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풍산 김씨의 조상을 모시는 경북 예천의 대지재사. 오른쪽 사진은 김대현 묘의 한쪽에 세워진 정부인 완산(전주) 이씨의 비석



오미리 근처에는 광석산이 있고, 그 산자락 아래 ‘대지재사’가 있다. 김대현의 증조할아버지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재사가 들어선 광석산은 문중의 선산. 산청에서 운구해온 김대현도 이곳에 묻혔다. 산자락에 여러 골이 있는데, 그중 하나의 골 가장 높은 자리에 김대현 묘가 있다. 묘는 아내와 함께 묻은 합장묘다. 묘 앞 양쪽에 비석이 있다. 하나는 김대현의 묘비이고, 다른 하나는 1997년에 새긴 부인 전주 이씨의 비석이다. ‘정부인완산이씨지묘(貞夫人完山李氏之墓)’. 남편 뒤에 가려져 있던 아내의 실존을 드러내는 유일한 흔적이다.

오미마을에서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여럿 배출됐다. 이 마을에서 나온 항일 독립운동가가 24명에 달하는 데, 그중 8명이 대한민국 건국포상자다. 손바닥만 한 마을에서 유독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온 이유를, 누대에 걸쳐 이어온 가문의 정신과 가풍에서 찾을 수 있겠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고종 퇴위 후 곡기를 끊고 항거했던 이도 있고, 하얼빈(哈爾濱)에서 일경 10명을 사살하고 전사한 이도 있으며, 일본 황성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지사도 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풍산 김씨 후손들은 지난 2008년 마을 한쪽의 언덕 위에 ‘오미 광복운동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공원에는 기념탑과 조형물, 육각정, 신도비 등이 있다.

경북 영주 하망동의 공장 담에 그려진 영화 ‘삭발의 모정’ 포스터 그림.



# 영주 땅 곳곳에 새겨진 이름

이제 다시 영주로 돌아가 보자. 김대현은 영주에서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주로 이사 온 이듬해, 그는 퇴계가 세운 서원인 이산서원의 원장이 됐다. 지역 유림 중 원로를 추대해 서원의 원장으로 임명하는 관례를 깨고, 고작 서른일곱의 김대현을 원장으로 추대했다는 건, 지역에서의 그의 학덕에 대한 평가가 어땠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김대현이 세상을 뜨고 난 뒤에도 영주 사람들은 잊지 않고 오랫동안 그를 기렸다.

영주에는 두 개의 공원이 있다. 하나가 구성공원이고, 다른 하나가 부용공원이다. 구성공원은 오랫동안 영주의 중심이었던 구산(龜山)을 공원화한 곳이다. 산의 형상이 거북이처럼 생겨 ‘거북 구(龜)’ 자 구산이다.

구산에는 고려 충신 권정의 자취가 선명하다. 권정은 조선이 건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한 인물.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호를 ‘복원을 생각한다’는 뜻의 ‘사복재(思復齋)’라고 지었다. 그러고는 공공연히 고려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고려에 대한 충성 다짐은 당시로는 역모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 동음이의어로 뜻을 숨겼다. 집 앞에 지은 정자의 현판을 ‘반구정(伴舊亭)’으로 걸었다. ‘옛날과 어울리는 정자’란 뜻이다. 그런데 진짜 숨긴 뜻은 옛날로 되돌린다는 의미의 ‘반구(返舊)’다. 지금 반구정에는 두 개의 현판이 나란히 붙어 있다. 반구정에서 멀지 않은 구산 기슭의 누각, ‘봉송대(奉松臺)’도 비슷한 경우다. 고려의 옛 도읍인 송도를 받든다는 뜻 대신 ‘봉황(鳳)과 소나무(松)’로 글자를 바꿔 현판을 걸었다. 뭐 그런다고 주변에서 그 뜻을 몰랐을까.

반구정은 본래 안동시 예안면 기사리에 있던 것을, 후손들이 거처를 옮기면서 옮겨다 세운 것인데, 본래 그 자리에는 구호서원이 있었다. 권정의 충절의 뜻을 기리고자 사당을 지었다가 그게 서원이 된 것이다. 반구정 마당에 구호서원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고, 반구정 옆에는 구호서원의 옛터임을 알리는 비석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사라지고만 구호서원에는, 고려 충신 권정과 함께 김대현의 이름이 있었다. 영주가 고향도 아니고, 그곳에서 벼슬 한 번 한 적 없지만, 영주 사람들은 서원의 사당에 김대현 위패를 모시고 기렸다.

경북 영주의 관사골. 관사골 위 부용공원에는 김대현이 퇴계로부터 이름을 받아 걸었다는 정자 ‘붕래정’이 있다.



부용공원의 정자 붕래정(朋來亭)에도 김대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붕래정은 옛 선비들이 학업을 닦고, 봄가을에 주민들이 계를 했다는 부용대 자리에 세운 정자인데, 김대현이 퇴계로부터 이름을 받아다가 직접 정자에 건 것이라고 전한다. 꼭 김대현의 이름이 아니라도, 머리카락 잘라 짚신 삼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영주의 구성공원이나 부용공원, 안동의 오미마을은 겨울 여행으로 조용하게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 삭발의 모정

머리카락을 잘라 짚신을 삼은 이야기를 따라 경북 영주를 찾았다가 우연히 하망동의 곡물도정업체 동창산업 건물 외벽에 그려진 영화 포스터 그림과 마주쳤다. 하필 영화 ‘삭발의 모정’의 포스터였다. 1965년 개봉한 이 영화는 군에 간 아들이 휴가를 받아 나왔는데, 밥 한 끼 해먹일 돈이 없었던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잘라 팔아 쌀밥과 고깃국을 끓여준 이야기를 담았다. 영화 속 이야기는 하망동 근처 향교골 마을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 이런 연유로 4년 전쯤 영주 원도심 도시재생사업 과정에서 이 영화의 포스터를 벽화로 그려 넣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