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210] 가능하면 다냐
올 것이 왔다. 승강기 한 달 공사. 통로 하나뿐인 아파트라 꼼짝없이 18층까지 걸어 다녀야 한다. 여덟 계단 내려가 뒤로 돌고, 또 여덟 계단 내려가 돌고. 차라리 오를 때는 헉헉대느라 어지러워할 겨를이 없다. 그래 봐야 몇 분, 남들은 마라톤도 하는데. 앙상한 종아리며 허벅지가 공짜 헬스장 삼으란다. 그래, 이참에 너희를 우람하게 키워주마. 가능할까?
‘중재 요청하면 원만한 해결이 가능하다’ ‘세금 정보를 환히 공개할 때 부패 감시가 가능하다’…. ‘불가능은 없다’를 증명하고픈지 ‘가능(可能)’이란 말 참 흔히 쓴다. ‘원만히 해결할 수 있다’ ‘부패를 감시할 수 있다’ 하면 자연스러울 텐데. ‘차량 증편은 내년에나 가능하고’ ‘새벽 3시쯤 접속은 가능해졌지만’도 ‘내년에나 되고’ ‘접속은 됐지만’ 식으로 쓸 수 있다.
이뿐이랴. 그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지(→될 법한 일인지), 가능하면 모든 학생이 참여해서(→되도록 모든), 고가품 구매가 가능한 사람들이(→고가품을 살 만한), 자료 오류 가능성이 있고(→오류가 났을 수)….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실현 가능성이 의심스러운 공약(→실현하기 어려워 보이는), 잘 살펴보니 고장 가능성이 크다(→고장 나게 생겼다), 관(管)이 20년 지나면 삭을 가능성이 높아(→삭기 쉬워)…. 얼마나 다양한가.
쓸데없는 ‘것’ 때문에 어수선한 문장도 익히 본다. ‘서울~부산을 1시간 30분에 달리는 것도 가능해질 듯’ ‘디지털 기기를 그냥 나눠주는 게 가능한 까닭은’ ‘두 말의 뜻을 구별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서’ ‘재판에 넘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것’도 ‘(불)가능’도 싹 걷어 보자. ‘달릴 수도 있을 듯’ ‘나눠줄 수 있는’ ‘도저히 구별할 수 없어서’ ‘재판에 넘길 길은 없어졌다’….
체력 단련 이제 사흘. 떡 본 김에 굿하고, 활 당겨 콧물 씻고,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던가. 작심삼일 말고 작심삼십일(作心三十日)은 할 수 있겠지. 아, 진짜 엎어지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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