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준의 ‘나를 치유하는 여행’>
천년 품은 기상 앞에 佛心이 절로… 어지러운 세상, ‘평온’ 빌어보네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다 심었다는 용문사 은행나무에 부드러운 저녁 빛이 스며든다. 용문사의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한 여성이 천년 넘게 이어온 생명 앞에 두 손 모아 경의를 표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ufokim@
경기 양평 사나사·용문사
양평을 흔히 ‘물의 고장’이라고 부른다. 들판을 적시며 흐른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만나는, 말 그대로 물이 풍성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물뿐 아니다. 한가운데에는 1157m의 명산 용문산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문인 이적(李迹)은 양평을 일러 “왼쪽으로는 용문산에 의지하고 오른쪽으론 호수를 베개 베었다”고 읊었다. 양평은 가볼 곳도 많다. 두물머리, 세미원, 소나기마을, 중미산천문대, 들꽃수목원……. 물론 용문산을 빼놓고 양평을 말할 수는 없다. 대개의 명산이 그렇듯이 용문산은 골마다 절을 품고 있다. 용문사, 사나사, 상원사. 절들은 감탄사를 아끼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운 곳에 깃들어 있다. 어찌 풍경뿐이랴. 골골이 품은 이야기도 많다. 이 사찰들은 1907년에 일어난 정미의병(후기의병)의 근거지였다. 그 결과 일본군에 의해 불타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서 양평을 찾아가는 것은 역사의 흉터를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습자지에 먹물 스미듯 온 대지가 온기를 머금는 계절, 아침 일찍 길을 달린다. 옅은 물안개가 강에서 몸을 일으키고 산들을 원근으로 줄 세워 수묵화 한 장 그려내는 그 길이다.
용문사 일주문을 지나면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도열하듯 서 있다.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려는 몸짓과 거칠게 돋은 비늘이 용의 비상을 연상시킨다. 김선규 기자 ufokim@
#사나사 = 옥천에서 큰 길을 버리고 사나사 계곡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사나사는 사하촌인 용천리에 차를 두고 계곡을 따라 걸어 올라가는 것이 좋다. 여름에는 피서 인파로 몸살을 앓지만, 이 계절만큼은 자연의 품을 독차지할 수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갈 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도 나와는 떨어진 객관일 수밖에 없다. 즉, 남이다. 내 두 발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아니 내 것이라는 생각 역시 오만이다. 내가 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때서야 진짜 행복이 내게 깃든다. 봄기운은 골짜기를 가득 채우고 능선을 타고 오르며 온 산을 술렁거리게 한다. 냇가에 탐스럽게 핀 버들가지가 그 증거다.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전설을 만나기 위해서다. 중간쯤 길가에 ‘함왕혈(咸王穴)’이라고 쓴 작은 비석 하나가 서 있다. 거기서 내려가면 바위 사이에 있는 구멍을 볼 수 있다. 삼한 초 함왕이 태어났다는 곳이다. 바위에서 태어난 왕이라니. 하긴 알에서 태어난 왕도 여럿 있으니. 길에서 마주치는 전설은 여행자의 걸음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는지 상상은 벌써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냇가 바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만난다. 큰 바위를 에돌아 흐르는 물소리가 아기 탄생을 축복한다.
하지만 세상은 늘 빛과 그림자의 직조물로 이뤄지는 것. 이 골짜기라고 어두운 날이 왜 없었을까. 상상은 날개를 펼쳐 일본군에게 쫓겨 산을 오르던 의병들과 만난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일제의 폭력에 맞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지만 힘이 부족했다. 쫓기고 쫓기다 이 골짜기에 차가운 몸을 묻은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들이 비통과 고단을 지고 무겁게 오르던 길을 배낭 하나 메고 설렁설렁 걷자니 자꾸 미안해진다. 과거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오늘의 안위를 확인하는 일은 행복과 죄의식을 함께 주기 마련이다.
상원사 사자석등. 보통 두 마리가 있는데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한 마리는 떨어져 나간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나 걸음이 조금 무거워질 무렵 아담한 절 하나가 나타난다. 사나사다. 완만하게 흘러내린 용문산은 치맛자락을 넉넉하게 펼쳐 절집들을 품었다. 사나사는 923년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한 대경국사 여엄이 제자 융천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정미의병,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여러 번 소실됐기 때문에 대부분 건물은 근래에 지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시련 속에서도 오랜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 있다. 마당 한쪽에서 작은 석탑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선다. 고려 때 세워진 사나사 삼층석탑이다. 기단부와 탑신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탑은 긴 세월을 머리에 이고, 우쭐대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다. 그 뒤의 원증국사탑은 더욱 반갑다. 고려 말의 고승 태고 보우(太古 普愚)의 석종 부도다. 고려의 왕사와 국사를 지낸 보우 스님은 1367년(공민왕 16) 사나사를 140여 칸 규모로 중창한 뒤 1382년 용문산 북쪽 기슭 소설암(小雪庵)에서 입적했다.
원증국사탑은 종 모양의 몸돌과 연꽃 모양의 받침으로 이뤄져 있다. 특별히 꾸미지 않아 더욱 정감 있게 눈에 들어온다. 오랫동안 탑 앞을 서성인다. 그리 뛰어날 것도 없어 보이는 부도 하나가 왜 이렇게 마음을 끌어당기는지. 햇살이 곱게 내려 비단보처럼 마당을 덮는다. 특별히 챙겨봐야 할 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야말로 무위(無爲)의 한나절을 보낸다. 사나사는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절이다. 특별히 날 좀 봐달라고 조르지 않는다. 시골 아낙처럼 슬그머니 웃으며 쉴 자리 하나 내어줄 뿐이다. 그러니 아무 곳이나 주저앉아도 편안하기 그지없다.
비로나자불이 주불로 모셔진 대적광전을 지나 극락전, 함씨각, 삼성각, 조사전을 차례로 돌아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듯 낮게 드리운 처마들이 정겹다.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멈추고 고요가 온몸에 스며든다. 단청 바랜 처마 사이를 오가며 새 봄을 칠하는 새들만 분주하다. 오래 머물고 싶은 절이다.
#용문사 = 사나사의 반대쪽 자락에 용문사가 깃들어 있다. 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용문사로 가는 길은 참 곱다. 특히 길가에 도열하듯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앞으로 가려는 걸음을 자꾸 방해한다. 제멋대로 구부러진 모양이 마냥 자유롭다.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려는 몸짓과 거칠게 돋은 ‘비늘’은 용의 비상을 연상시킨다. 용이 드나드는 문이라 용문(龍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더니 혹시 이 소나무들을 이른 건 아닐까. 가르마처럼 몸을 열어놓은 길도 꿈틀거리며 산으로 오르고 있다. 그 길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걷는다.
이곳의 계곡도 사나사 계곡 못지않게 장엄하다. 이 산은 얼마나 많은 것을 품었길래 골마다 이렇게 물을 나눠줄까. 물소리에 속진 묻은 나를 씻고 또 씻는다. 길의 끝에서 거대한 은행나무와 만난다. 그 유명한 용문사 은행나무다. 여러 해 만에 보는데도 위용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기상이 더욱 청청해진 것 같다.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높이가 40m, 줄기의 둘레가 11m.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장엄까지는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 수령이 1100년에서 1500년으로 추정된다는 이 나무는 유실수로는 동양에서 가장 큰 나무라고 한다.
거듭된 전란 속에서도 불타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 그래서 천왕목(天王木)이라고 부른다던가.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았을까.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일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특히 일본군에게 하나 둘 쓰러져가는 의병들을 보는 심사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무라 한들 그만한 삶을 살았는데 어찌 영혼이 없으랴.
은행나무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땅 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수액이 내 몸까지 전해지는 것 같다. 이 계절은 가감 없이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 좋다. 화장 지운 민얼굴에서 여인의 심사를 읽듯, 잎을 떨어낸 나목(裸木)에서 천년의 시간을 읽는다. 용문사에서는 이 은행나무만 보고 가도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
절에 올라 이곳저곳을 걷는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때 대경선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경순왕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했다고도 전해진다. 고려 우왕 때에는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했고, 조선 세종 29년에는 수양대군이 모후 소현왕후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다. 영광도 많았지만 시련도 많았다. 정미의병 때 일본군이 불태운 데 이어 한국전쟁 때는 치열한 용문산 전투를 치르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역시 근래에 지은 건물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봄바람이 뺨을 스친다. 눈을 들어보니 은행나무 사이에 저녁 해가 잠시 머물러 있다. 관세음보살의 보주(寶珠)처럼 장엄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끝 풍경(風磬)이 흔들린다. 풍경이 흔들리는 대로 소리도 흔들린다. 무엇 하나 거스름이 없으니 세상이 평화롭다. 바람과 풍경소리에서 부처의 뜻을 읽는다.
#그 밖에 가볼만한 곳 = 양평의 을미의병과 그 뒤 일어난 정미의병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으면 양동면으로 찾아가면 된다. 당시 지평현 상동면이었던 양동지역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선포하자 퇴앙 안종응, 괴은 이춘영 등이 주도하여 의병을 일으킨 곳이다. 양동면 석곡리에 을미의병 묘역이, 쌍학리에는 택풍당(澤風堂)이 있다.
을미의병 묘역은 일본군과 싸우다 산화한 양평 출신 의병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 추모비·기념비·어록비 등이 있다. 택풍당은 조선 인조 때 문신이며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택당 이식(李植)이 1619년에 제자와 자손들을 교육하고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지었다. 현지에서 만난 향토문학가 이복재 씨에 따르면 택당의 사상인 ‘의(義)’가 이 지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나는 데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택풍당 맞은 편에는 택당의 묘가 있다.
마의태자가 심었다는 ‘天王木’… 나라에 변고 생기면 피 ‘철철’
후기의병이라고도 부르는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한 군인들의 항전에서 촉발됐다. 이때 일어난 양평의병은 용문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경기 양평 사나사·용문사 가는 길 · 묵을 곳 · 먹을 것
가는 길 = 서울외곽순환도로→경강로(6번 국도)를 따라 달리다 청평·설악 방면으로 좌회전한 다음 여주·양평 쪽으로 우회전 후 바로 좌회전. 이후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사나사에서 용문사로 가기 위해서는 37번 국도로 되짚어 나와 6번 국도를 타고 가다 마룡교차로에서 용문사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된다.
묵을 곳·먹을 것 = 양평에는 용문산자연휴양림(031-775-4005), 중미산자연휴양림(031-771-7166), 산음자연휴양림(031-774-8133) 등 자연휴양림이 많다. 청운골생태마을(031-775-8171)에 가면 너와집, 굴피집에서 쉴 수 있다. 한화호텔&리조트 양평(031-772-3811), 대명양평콘도(031-771-8311) 등 콘도와 펜션도 곳곳에 있다. 사나사로 들어갈 때 거치는 옥천에는 옥천면옥, 옥천냉면황해식당, 옥천할머니냉면 등 냉면으로 유명한 집이 여럿 있다. 강하면에 있는 용화산방은 깔끔한 한정식을 내놓고 양평읍의 하누만에서는 질 좋은 양평한우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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