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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94세로 별세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7. 13. 15:34

역사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의 실존’ 탐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94세로 별세

입력 2023.07.13. 03:00업데이트 2023.07.13. 10:28
 
 
 
 
 
 
밀란 쿤데라는 생전 출간한 에세이에서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소설가 밀란 쿤데라(94)가 11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인간의 실존을 탐색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그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국내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다. 프랑스 메디치상을 비롯해 숱한 문학상을 받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의 매년 거론됐으나, 이제 그 영예를 이룰 수 없게 됐다.

 

쿤데라의 삶을 정치적 역경을 빼놓고 말하기란 어렵다. 1929년 체코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영화학 등을 배웠고, 이후 같은 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공산화된 1948년 무렵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는 방식에 환멸을 느껴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유머 감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광산에 보내진 청년을 통해 당시 공산주의를 풍자한 첫 소설 ‘농담’(1967)을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련의 활동으로 공산당에 입당하고 추방당하기를 반복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프라하의 봄’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교수직에서 해직되고, 책의 출간이 금지되는 등 역경을 겪다가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쿤데라는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을 발표한 후 본격적으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거대한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인간의 실존을 탐구한 작품이다. 정작 체코에선 금서로 지정돼 2006년에야 출간됐다. 1988년 쥘리에트 비노슈, 대니얼 데이 루이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다. 방미경 가톨릭대 프랑스어문화학과 교수는 “쿤데라는 체코에서 환영받지 못했음에도, 체코로 가서 본인이 느낀 감정을 작품에 남겼다. 스탈린 공산주의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하되, 목소리를 높여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고 평했다. 결국 쿤데라는 2019년 체코 시민권을 회복했고, 2020년 노벨문학상에 버금가는 문학상인 프란츠 카프카상을 받았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쿤데라는 ‘삶은 다른 곳에’ ‘불멸’ 등 작품에서 일상적 삶을 코믹하면서도 가슴 서늘해지게 만드는 특유의 방식으로 실존에 대한 고민을 풀어냈다. 쿤데라의 작품을 다수 번역한 방 교수는 2014년 그가 프랑스에서 출간한 마지막 소설 ‘무의미의 축제’에 쿤데라 문학의 정수가 있다고 평가했다. 책에서 그는 한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방 교수는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해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일수록 희화화해서 코믹하게 그리는 재능을 지녔다. 삶의 우스꽝스러움과 심각함을 탐구하는 일을 동시에 해낸 작가”라며 “프랑스뿐 아니라 현대 문학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고 했다.

 

다만 쿤데라는 자신의 작품이 그저 반체제라거나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은 경계했다. 2006년 체코어판에 실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 후기에서 그는 “이 책을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소설로 읽어달라”고 쓴 바 있다. 생전에 언론 등과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으며, 자신의 작품을 독자의 해석에 직접 맡겨 왔다. 대중적인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눈감는 순간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인간을 탐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재룡 숭실대 불문과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모호했던 표현을 문학적으로 잘 구현해 낸 대표적 작가다. 그는 유럽 문학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현대 소설의 외연과 깊이를 넓혔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 이영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