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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편지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진다는 우리나라 최고의 덩굴식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3. 7. 10. 15:29

[나무편지]

바라보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진다는 우리나라 최고의 덩굴식물

  ★ 1,188번째 《나무편지》 ★

  숲 길을 한참 걷다 보니, 발목 안쪽의 안복사뼈 부근의 살갗이 따끔거리고 쓰라렸습니다. 오랜만에 오래 걸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신발이 오래된 탓도 있는 듯합니다. 헌 신발 붙들고 궁상떨지 말고 좋은 새 신발 하나 사야 하겠습니다. 동백나무 숲으로 널리 알려진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에서였습니다. 선운사 동백나무 숲이야 워낙 널리 알려진 숲이지만, 그보다는 ‘잠깐 서 있으면 머리를 맑게 해 주는’ 〈고창 삼인리 송악〉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가만히 짚어보니 꽤 오랜만의 만남인 듯해 설렘이 더 컸습니다.

  송악은 우리 토종 식물로 아이비 종류의 하나, 그러니까 ‘한국의 아이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마음이 조금 불편합니다. 왜 굳이 우리 토종 식물을 외국의 식물 이름에 빗대어 설명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송악을 ‘한국의 아이비’라고 할 게 아니라, 아이비를 ‘서양의 송악’이라고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한국의 아이비’라고 하면 송악의 실체를 금세 이해할 수 있어도 ‘서양의 송악’이라고 하면 아이비를 떠올리기 어려운 게 사실일 겁니다. 사실 그런 경우는 더 많습니다. 우리 토종 식물을 널리 아끼고 사랑하기보다는 외국에서 들여온 원예용 식물들을 더 많이 알려온 그간의 전례 때문이겠지요.

  그런 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지금은 이미 다 시들어 떨어진 꽃 중에 ‘노루오줌’이라는 우리 토종 식물이 있지요. 이 식물이 요즘 원예용으로 많이 쓰이면서 많은 분들에게 널리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노루오줌’으로 부르기보다는 ‘아스틸베’라고 부르는 경우가 훨씬 더 많더군요. 오래 전부터 우리가 불러온 이름을 버리고 영어도 아니고 사어(死語)가 된 라틴어로 이루어진 학명으로 어렵게 알려지는 겁니다. ‘오줌’이라는 표현이 민망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땅에서 오랫동안 불러온 이름을 버려서는 안 되지 싶습니다.

  송악은 담장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이어서 흔히 ‘담장나무’라고 부릅니다. 송악은 홀로 서지 못하는 덩굴식물입니다. 큰 담장이라든가 바위 절벽, 혹은 곁에 있는 큰 나무를 타고 오르는 여느 덩굴식물과 같은 특징의 식물입니다. 다른 나무나 바위에 기대기는 하지만, 스스로 양분을 지어내는 광합성은 활발하게 할 능력은 갖춘 식물입니다. 당연히 자기 먹을 건 자기가 챙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생식물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우리나라의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소밥나무’라고도 부르는데, 그건 송악의 잎을 소가 잘 먹는다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덩굴식물이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송악은 아무래도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의 송악입니다. 선운사 입구 주차장 곁을 흐르는 개울 건너편의 절벽을 타고 오른 송악으로 1991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자연유산입니다. 덩굴식물 가운데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대상으로 ‘경주 오류리 등나무’ ‘서울 삼청동 등나무’ 이 있고, 군락지로 ‘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국가표준식물목록의 식물명은 ‘등’입니다만, 문화재로서의 천연기념물 이름은 ‘등나무’로 되어 조금은 헷갈립니다)이 있습니다만, 규모에서 〈고창 삼인리 송악〉을 따를 덩굴식물은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감탄사가 절로 새어나오는 대단한 크기의 덩굴식물입니다.

  개울 건너편의 낮은 절벽 전체를 휘감고 오른 〈고창 삼인리 송악〉은 그 나이를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자연 상태에서 저절로 바위 절벽 아래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는 있지만, 그 연륜은 쉽사리 짐작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 송악에는 ‘별 것 아닌’ 전설이 전해옵니다. 누구라도 나무 앞에 한참 서 있으면 머리가 맑아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송악의 거대한 규모를 보고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실제로 나무 앞에 가만히 서 있으면 머리가 맑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특히 송악 바로 앞으로 흐르는 개울과 송악의 푸르른 조화에 파묻혀 든 상태에서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머리가 맑아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사실 〈고창 삼인리 송악〉의 실체를 제대로 느끼려면 개울을 건너 송악 바로 앞에 다가가야 합니다. 바위 절벽 아래에서 처음 솟아오른 줄기 밑동의 꿈틀거림을 느껴야 하거든요. 그런데 엊그제는 그게 불가능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린 바로 뒤여서 개울물이 한참 불었고, 그 바람에 개울을 건너는 징검다리가 물 속에 묻혀 있었거든요. 안타까운 마음에 바지춤을 걷어올리고라도 건너볼까 잠시 생각도 해 보았지만, 물살이 워낙 센 탓에 위험해 보였습니다. 개울 건너편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며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온전히 바라보려면 역시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다시 또 찾아와 보는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되짚어 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송악에 다가서지 못한 아쉬움을 접고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까지 천천히 걸었습니다. 하루 종일 걸릴 만큼 먼 거리도 아니고, 고작해야 두 시간 남짓 걸었건만 발목 안쪽의 안복사뼈 쪽 피부가 빨갛게 까진 건 그 길에서였습니다. 다음 《나무편지》에서는 고창 선운사의 나무이야기를 좀더 보태기로 하고 〈고창 삼인리 송악〉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기상예보대로라면 이번 주는 내내 비가 내릴 듯합니다. 궂은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면서 평안한 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2023년 7월 10일 아침에 1,188번째 《나무편지》 올립니다.

  - 고규홍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