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무시’ 문화재청이 테마공원으로 전락시킨 궁궐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36. ‘역사 복원’ 상관없이 재건축 중인 조선 궁궐
* 유튜브 https://youtu.be/2Ho8qxO2QH8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의 ‘복원 원칙’과 광화문 월대
문화재청은 지난 7일 서울 경복궁 앞 광화문 월대 복원조사 과정에서 식민시대 전차 철로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일제가 월대와 삼군부 등 주요 시설물을 훼손하고 그 위에 철로를 깔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재 철로가 깔린 월대 주변은 서울시, 월대 구역은 문화재청이 발굴조사 중이다. 문화재청은 월대 유구가 확인됐고, 전차 궤도에 의한 훼손이 확인된 만큼 이를 토대로 ‘일제가 훼손한 월대’를 복원할 예정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철로는 1917년에 설치됐다. 월대가 설치된 때는 1866년 음력 3월 3일(이하 음력)이다.(국역 ‘경복궁영건일기’1, 서울역사편찬원, 2019, p404) 문화재청 분석이 맞는다면 이번에 발견된 월대는 51년 동안 있다가 철거됐다.
각종 기록에 따르면 이 월대는 조선 초기 세종이 “민력(民力)을 동원한 월대 공사는 금지한다”고 명했다는 1431년 3월 29일 ‘세종실록’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1431년 3월 29일부터 1866년 3월 3일까지 공식적으로 광화문 앞에 월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1866년 이전 ‘광화문 월대’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조사하지 않을 방침이다.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원칙은 두 가지다. 첫째, 고고학적으로 ‘명확한 유적이 있을 경우 그 아래 지층에 대한 발굴은 최소화한다’는 원칙이다. 호기심이나 궁금증 해소를 위해 기존 월대 유적을 부술 수 없다는 논리다. 둘째,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다. ‘1994년 경복궁 복원정비 기본계획 보고서’는 경복궁 복원 기준을 경복궁 중건이 완료된 1888년으로 설정했다. 각종 전각이 가장 많았던 시점이다. 따라서 광화문 월대 또한 그 시점을 기준으로 복원할 뿐, 그 이전 월대 존재 여부를 위한 조사는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그래?
원칙이 그렇다면 아쉬워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일주일에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교통사고가 나고 시민들 통행 불편도 참을 수밖에 없다. 원칙이니까.
그렇다면 문화재청이 주관해 역사 복원이 한창인 사대문 안 조선시대 역사 현장들을 본다. 원칙은 얼마나 잘 준수되고 있고, 역사는 얼마나 잘 복원되고 있는지 똑똑히 본다.
담장 사라진 경복궁 경회루
조선 개국 20년이 지나고 1412년 태종 12년에 경복궁 안에 거대한 누각이 신축됐다. 공사 감독은 공조판서 박자청이었다. 원래 작은 누각이 있었는데 태종이 크게 또 지으라 명한 건물이다. 지금 경복궁을 찾는 사람들이면 모두 감탄하듯,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그 사치스러움이 마음에 걸렸는지, 건축주인 태종은 이를 “중국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로 삼겠다”고 밝혔다.(1412년 4월 2일, 5월 16일 ‘태종실록’) 이듬해에도 태종은 “그 사치스러움이 내 본의가 아니었음”이라고 거듭 변명했다.(1413년 12월 14일 ‘태종실록’)
그 경회루에는 연못 사방으로 담장이 있었다. 고종 시대 이전은 자료 부족으로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1888년 6월 24일 ‘경회루 서쪽 담장 바깥 소나무가 바람에 넘어졌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해당 날짜 ‘승정원일기’) 1907년 만들어진 실측도 ‘북궐도형’을 보면 명확하다. 경회루 연못 사방으로 담이 그려져 있다.
나라가 사라지고 총독부가 경복궁 전각을 철거하면서 경회루 담장 또한 철거됐다. 경복궁은 유료 공원으로 변했다. 그리고 1990년대에 경복궁 복원이 결정됐다. 그때 원칙은 ‘공원이 아닌 조선 정궁(正宮) 제 모습을 알릴 수 있는 역사적 공간 복원’이었고 복원 기준 연도는 1888년이었다.(앞 문화재청 보고서, p196) 이에 따라 경회루 주변은 담장을 원형대로 복원하고, 대신 경회루 관람을 위한 전망 시설 설치를 ‘고려한다’고 규정했다.(앞 보고서, p312) 경관은 희생하더라도 역사 복원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 전망 시설과 그 담장과 복원하려 한 역사는 지금 어디 갔나. 2009년까지 북쪽과 동쪽 담장은 복원됐지만 ‘제일 경치가 좋은’ 남쪽과 서쪽 담장은 식민 시대 그대로다. 경회루 주변은 문화재청이 배제하려고 했던 ‘공원’이다. ‘역사적 공간 복원’ 원칙은 어디로 갔나.
경복궁관리소 사무실로 쓰는 총독부박물관
식민시대가 시작되고 5년이 지난 1915년 조선총독부는 소위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었다. 자기네 통치를 정당화하고 피식민 조선이 자기들로 인해 변화한 모습을 자랑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때 총독부는 경복궁 경내 건춘문 북쪽에 총독부박물관을 설치했다. 본관과 사무동을 포함해 근대 건물 2개 동으로 구성된 이 박물관에는 조선 고미술품을 전시했다.
21세기 경복궁 건춘문 북쪽에는 잘생긴 2층 건물이 하나 보인다. 숲에 숨어서 관람객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게 1915년 당시 총독부가 건축한 총독부박물관 부속 건물이다. 이 건물이 현재 경복궁관리소 사무실이다.
경복궁 복원 기준 연도는 1888년이다. 복원 원칙은 ‘1888년을 기준으로 일제 만행으로 훼손된 경복궁 복원’이다. 그런데 ‘1915년’ ‘일제가 만든’ 이 건물은 왜 저기 숨어 있는가. 게다가 용도 또한 대중에게 공개된 시설이 아니라 자체 사무실이다. 여기에 적용한 원칙은 무엇인가. 아니 원칙을 적용하긴 했는가.
‘촬영세트장’ 공사, 덕수궁 월대
덕수궁 앞에는 ‘대한제국 황궁 정문의 면모를 되찾기 위해’ 대한문 앞 월대 재현 공사가 한창이다. 이 월대는 1899년 공사에 들어가 이듬해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1899년 양력3월 3일 ‘독립신문’ 등) 그리고 1912년 이전 총독부에 의해 철거된 듯하다.(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덕수궁 대한문 월대 재현 설계 보고서’, 2020, p12)
해방 후 1968년 덕수궁 앞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덕수궁은 담장이 현재 담장 위치로 축소됐다. 대한문은 현재 태평로 횡단보도 자리에 섬처럼 남아 있었다. 1970년 대한문은 지금 위치로 33m 동쪽으로 이전했다. 이때 대한문은 위치에 관한 한 역사성을 잃었다.
53년 전 이전한 대한문 앞에 110년 전 사라진 월대를 현재 ‘재현’ 중이다. 무엇을 재현하겠다는 것인가. 본질적으로 옛 대한문 앞에 10년 남짓 존재했던 월대는 재현할 역사적 근거가 희박하다.
그리고 어떻게 재현하겠다는 것인가. 땅을 파도 옛 월대 흔적은 나올 턱이 없었고 따라서 나오지 않았다. 재현하겠다는 월대 규모 추정 근거는 모두 옛날 사진들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 촬영한 그 사진들은 지형지물이 ‘33m’ 변형된 현재 위치에서 기준이 될 수가 없다.
또 현 대한문 앞은 추정 규모를 가진 월대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그래서 ‘시민 보행, 교통 상황 등 현실적 조건을 감안하여 복원이 아닌 재현으로’(‘2021년 문화재위원회 제1차 사적분과위원회 회의록’) 공사 중이다. 곧 대한문 앞에는 촬영세트장 같이 원형에서 축소된 정체불명의 구조물이 나올 판이다. 여기 적용된 원칙은 또 무엇인가.
사무실로 쓰려고 증축한 돈덕전
덕수궁 북서쪽 구석에는 고종시대 서양식 건물 돈덕전이 있었다. 돈덕전은 고종이 외국 VIP를 접견하고 연회를 열었던 2층 건물이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된 뒤 순종이 여기에서 즉위했다. 돈덕전은 1920년대에 철거됐다.
돈덕전에 대해 남아 있는 자료는 사진 몇 점과 1층 평면도, 땅에서 나온 유적이 전부다. 그런데 지금 그 ‘재현’ 공사가 완료 직전이다. 외관은 물론 1·2층 실내 공사도 마무리 단계다.
처음부터 복원은 불가능했다. 1층 평면 배치를 제외한 모든 실내 구조는 출발이 상상(想像)이다. 건축 골격도, 설계도 21세기에 창작된 신축이다. 자문회의에서도 ‘원형 논란을 불식시키고 활용도를 제고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했다.(문화재청, ‘덕수궁 돈덕전 복원조사 연구’, 2016, p19) 또 자문회의는 활용을 위해 ‘철골보 보강 방법’을 고려하라고 충고했다. 벽돌건물인 돈덕전을 ‘실용적 용도’를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만들라고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재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돈덕전 원형은 2층이다. 그런데 신축 돈덕전은 3층으로 증축됐다. 관계자에 따르면 덕수궁관리소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증축했다. 증축도 용도도 외부 전문가 자문 없이 궁릉유적본부 내부에서 결정했다.
이게 복원인가? 양보해서, 재현인가? 누구를 위한 복원이고 재현이고 신축인가. 여기 적용한 원칙은 무엇인가. 원형을 복원하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원형 대신 활용도 제고’를 들이댄 자문위원은 또 뭔가.
2021년에는 600년 넘도록 살고 있던 회화나무 한 그루를 5m 전방으로 옮겨 심었다. 철근콘크리트 건물 신축을 위해 살아 있는 역사가 역사를 옮겼다. 자문위원들은 돈덕전이 ‘대한제국의 개방화와 국제화’를 상징한다고 해서 ‘순종 즉위는 일제에 의해 강제된 역사이므로 이를 표방해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앞 보고서, p19)
임진왜란 때 심은 노거수를 옮기고 역사를 이렇게 은폐하면서까지 대한제국 건물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무원칙의 원칙을 모아보니 온통 대한제국이고 고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민은 ‘간악한 일제가 담장을 철거한’ 탁 트인 경회루 경치를 감상한 뒤, ‘총독부박물관’ 건물에 상주한 경복궁관리소 관할 경복궁을 떠나, 촬영세트장으로 변한 덕수궁 월대를 넘어서 ‘순종황제가 즉위한 장소임을 절대로 알리면 안 되는’ 덕수궁관리소가 상주한 3층짜리 신축건물 돈덕전에서 끝나는 테마공원 조선 궁궐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무원칙과 편의의 원칙 사이에 광화문 월대의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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