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후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화하기로 결정한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338. 근대로 가는 길목④
조선 식민지 정책이 결정된 1894년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
* 유튜브 https://youtu.be/lsHwiHGAgAg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숨막혔던 1894년
1894년은 조선 근대기에 가장 긴박한 해였다. 2월 동학농민전쟁이 발화됐다. 3월 27일 김옥균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암살됐다. 4월 14일 김옥균 시신이 조선 정부에 의해 강변에서 토막토막 절단됐다. 이어 5월 19일 갑신정변과 무관함에도 10년째 수감 중이던 김옥균 아버지 김병태가 처형됐다. 그리고 5월 31일 조선국왕 고종은 김옥균 부관참시 축하 기념 대사면령을 발표했다.
바로 그날 전주 이씨 왕실 성지(聖地) 전주성이 농민군에 함락됐다. 야만적 광시곡에 조정이 환호하던 날 종말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왕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6월 3일 고종은 척족이자 농민군 타도 대상 1호였던 민영준(민영휘)을 통해 청나라 군사를 공식 요청했다.(‘이홍장전집’(동학농민혁명 신국역총서9) G20-05-001,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7, p110) 청군이 출병했다. 청일 양국 간 톈진조약(1885)에 규정한 ‘조선 출병 시 동시 출병’ 조항을 앞세워 일본군 또한 조선에 출병했다. 7월 25일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군함이 청나라 함대를 포격하면서 조선 땅에서 청일 두 나라 전쟁이 개전했다.
예컨대 1880년에 한성 성곽 바깥 성저십리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두 살에 임오군란을 겪고 네 살에 북촌 사대부들이 행한 갑신정변을 목격하고 이어 온갖 가렴주구를 겪은 끝에 학정에 맞서서 죽창을 든 농민들을 보았고, 외국군끼리 싸우는 전쟁통에 참담한 사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고 나이 서른이 되던 1910년 가을, 조선은 이름만 남고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자, 그렇다면 이 복잡다기하고 숨막히는 역사 과정에서, 과연 어느 시점에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겠다고 결정했을까. 그 운명의 결정은 장소와 시각이 명확하게 나와 있다. 1894년 양력 8월 17일 일본내각회의다.
영국의 큰 그림, 그레이트 게임
청일전쟁은 단순히 청과 일본이 쟁패한 전쟁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전 지구를 무대로 영국과 러시아가 싸워온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 있었다. 남하하는 러시아와 동진하는 영국 두 제국이 중앙아시아 패권을 다투는 과정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한다. 명칭부터 제국주의 냄새가 확 풍기는 이 경쟁은 러시아가 극동으로 진출하면서 전선이 전 지구로 확대됐다. 1885년 영국 해군이 조선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도 조선 영토 내에 얼어붙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1886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은 고종에게 이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다. ‘천하 형세가 하루하루 변하고 바뀌는데 거문도는 이미 영국에 약탈당했다. 조선에서 영국 이름을 아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폐하는 이에 대해 어찌할 것인가.’(김옥균, ‘지운영사건 규탄상소문’(1886))
그 영국이 일본을 대(對)러시아 파트너로 선택했다. 청-일과 함께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정책에서 ‘강력한 군사국가로 떠오른’ 일본을 단일 파트너로 택한 것이다.(최문형, ‘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한국 침략’, 지식산업사, 2007, p247) 영국에게는 손 안 대고 러시아를 상대할 수 있는 선택이었고 일본에게는 대륙 진출에 대한 자유를 얻은 선택이었다. 7월 16일 영국과 일본이 통상항해조약을 맺었다. 불평등했던 기존 조약을 개정한 조약이었고, 영국이 일본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9일 뒤인 7월 25일 일본 해군이 조선 풍도 앞바다에서 영국 상선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영국 정부는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 8월 1일 일본은 청에 공식 선전포고했다.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점령 사건
풍도해전 이틀 전인 7월 23일 일본군 혼성여단이 경복궁을 공격했다. 궁궐 수비대는 건춘문과 영추문을 부수고 난입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궁내 북동쪽 함화당에서 고종 신병을 확보했고 전투는 종료됐다. 당시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奥宗光)에 따르면 경복궁 습격은 전쟁 개전을 위해 ‘강압적으로 조선 조정을 밀어붙여 굴종시켜’ 조선을 묶어두려는 계획이었다.(무쓰 무네미쓰, ‘건건록(蹇蹇錄·1941)’, 이용수 역, 논형, 2021, p141)
외국군이 자행한 이 사건이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누적된 모순을 해소하려는 갑오개혁 정부의 모태가 된 것도 아이러니다. 수구파 여흥 민씨가 장악한 권력, 갑신정변 이후 멸절당한 개화파 그리고 산적한 모순. 그 벼랑 끝 상황에서 구성된 갑오개혁 정부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함도 아니지만 병 고치려고 쓰는 약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모순된 근대화 지휘자였다.(황현, ‘국역 매천야록’ 2권 1894년 ② 7.일본군의 남산 포진과 오토리 게이스케의 알현)
지도자 고종의 나약한 대응
임진왜란 이후 300년 만에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조선국 지도자 고종은 나약했다. 경복궁 점령 전, 고종은 주미공사 이승수에게 미국 정부에 일본군 철병 중재 요청을 하라고 훈령을 보냈다. 7월 5일 미 국무부에 접수된 훈령에는 ‘이 난관을 조정해달라고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요청해달라(ask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to adjust the difficulty)’라고 적혀 있었다.(Korean Minister to Gresham, July 5, 1894, Notes from the Korean Legation in the United States to the Department of State, Vol. 1, NA, RG 59. 제프리 도워트(Dorwart), ‘The Pigtail war:the American response to the Sino-Japanese war of 1894-1895’, 매사추세츠대출판부, 1971, p19, 재인용)
7월 7일 국무장관 그레셤은 주일미국공사 에드윈 던(Dun)에게 전문을 보내 아래 내용을 일본 내각에 전하라고 통보했다. ‘일본이 나약하고 힘없는(feeble and defenceless) 이웃을 부도덕한 전쟁에 빠뜨린다면 미국 대통령은 고통스러운 실망을 느낄 것이다.’(도워트, 앞 책, p20)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바로 그날 그레셤은 일본공사 다테노 고조(建野鄕三)와 면담을 갖고 일본의 전쟁 의지를 확인했다. 이틀이 지난 7월 9일 그레셤이 조선공사 이승수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공명하고도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한다.”(최문형, 앞 책, p253)
고종 요청에 대한 거절 통보였다. 당시 조선과 교역량은 미국 전체 교역량의 0.01%도 되지 않았다. 미국은 이해관계가 비교할 수 없이 큰 일본을 택한 것이다.(석화정,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and Russia’s East Asian Policy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Korea Journal vol 50, no 3, 한국학중앙연구원, 2010)
한 후세 사가(史家)의 분석
‘일본은 랴오둥반도에 대륙 진출의 거점을 확보하면서 이때 이미 조선을 저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일본군은 조선 왕궁을 포위, 압박했지만, 다행히 국왕(고종)은 미국의 그로버 클리블랜드(1837~1908) 대통령에게 ‘선의의 중재’를 요청하여 보호국으로 전락할 화를 면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친서를 보내 계획이 철회됐다.’
이 글은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태진이 지난 3월 11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이태진의 근현대사 특강’ 일부다. 이 필자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사공감’ 41호(2022년 7월)에도 ‘한미수교 140주년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청일전쟁 때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했고’ ‘이때 군주 고종은 재미 공사(이승수)에 긴급히 연락해 조미조약 제1조를 근거로 들며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했으며’ ‘결국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보낸 친서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조선과 미국, 일본을 오간 위 대화들과 맥락은 물론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 고종이 중재를 요청한 시점은 경복궁 공격 전이다. 그리고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확보한 시기는 1894년 11월 이후다. 그런데 위 글을 읽으면 마치 ‘일본군에 포위된 고종이 기지를 발휘해’ ‘우방인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고’ ‘그 요청이 통해서’ ‘미국 중재로’ ‘일본이 조선 보호국화를 포기했다’는 일이 벌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클리블랜드 정부는 조선에 대해 ‘중립’을 견지했다. 뒤에서 보듯 일본은 랴오둥반도 공격 훨씬 이전 이미 조선 보호국화를 선언했다. 그리고 경복궁 공격 시기와 청일전쟁 말기 미국, 일본, 조선 외교문서를 뒤졌지만 나는 ‘일본군이 조선 왕궁을 포위·압박한’ 때 이와 같은 요청과 ‘친서’가 오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식민의 순간, 1894년 8월 17일
7월 9일 외무대신 무쓰는 미국공사 던으로부터 그레셤이 보낸 메시지를 받고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의 간청이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의사도 없었음이 분명했다.’(무쓰, 앞 책, p101) 7월 23일 경복궁 공격으로 전쟁은 현실화됐고 8월 1일 공식 선전포고로 이어졌다.
그리고 8월 17일, 외세에 의해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던 그날이 왔다.
‘나(무쓰 무네미쓰)는 4개 문제를 각의에 제출해 국가 방침을 확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방안은 1. 조선을 독립국으로 놔둔다(‘독립국’) 2. 일본이 직간접적으로 영구히 또는 장기간 그 독립을 돕는다(‘보호국’) 3. 청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을 보전한다(‘공동통치’) 4. 이도저도 안되면 강국(强國)이 담보하는 ‘중립국’으로 만든다.’
무쓰가 4개안에 일일이 장단점을 열거해 토의에 부친 결과 내각은 ‘당분간 2번안(보호국안)을 목표로 하기로 하고 후일 다시 국가 방침을 확정하기로’ 의결했다.(이상 무쓰, 앞 책, pp165~167)
조선을 일본 보호국으로 만들고 향후 재론하겠다는, 식민의 시작이었다. 포성도 살인극도 없었다. 그런데 1894년 여러 날 가운데 가장 숨막히는 날이었다. 그 숨막히는 사춘기를 맞았던 아이가 커서 나이 서른이 되던 1910년 늦여름, 조선은 이름만 남고 식민지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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