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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세운상가 자리에 긴 공원 만들면 도심에 활력 생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2. 8. 12. 14:12

[유현준의 도시 이야기]

세운상가 자리에 긴 공원 만들면 도심에 활력 생긴다

 

성벽 없애고 원형 공원 만든 빈 링슈트라세처럼
소통하고 연결하려면 공간을 채우지 말고 비워야
기찻길 철거하고 선형 공원 만든 경의선 숲길
과거 단절됐던 연남동과 공덕동을 하나로 연결
세운상가 철거하면 종로·퇴계로 연결 시너지

 

입력 2022.08.12 03:00
 
 
 
 
 

건축가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가 있다. 도시에서 중요한 요소를 연결하려고 할 때 건물을 지어서 연결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축을 찾고 그 축선을 따라서 벽을 세우고 건물을 짓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렇게 건물을 지으면 오히려 연결을 막고 단절을 가져온다. 무언가를 소통하고 연결하려면 비워야 한다. 대표적인 예가 파리의 오스만 시장이 실행한 도심 재건축 사업이다. 파리의 중요한 장소인 콩코드 광장과 개선문을 연결하는 것은 넓게 비워진 샹젤리제 거리다. 이 비움 덕분에 두 장소는 시각적으로 연결되고 사람들은 오갈 수 있게 되어 도시에 소통을 만든다.

/일러스트=이철원

 

비움을 통해서 새 시대에 맞게 도시를 업그레이드한 대표적 사례는 오스트리아 빈의 ‘링슈트라세’다. 과거 빈은 다른 모든 중세 도시가 그렇듯 외부에서 오는 적을 막기 위해 도시를 성곽으로 둘러쌌다. 하지만 전쟁의 양상이 성벽을 포위하는 공방전 방식에서 대포를 이용한 포격전으로 바뀌면서 성곽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성을 철거하겠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성곽이 있던 자리에 도시를 둘러싼 링 모양의 공원을 만들고 주변 곳곳에 박물관, 미술관, 공연장 등 새 시대에 맞는 건축물을 지었다. 덕분에 도시 곳곳은 공원으로 연결되었으며 진정한 소통 도시가 되었다. 빈은 이제 링슈트라세라는 공간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도시가 되었다. 비슷한 사례로 보스턴 도심을 가로지르던 고가 고속도로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한 ‘센트럴 아터리’ 프로젝트가 있다. 서울에는 청계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 사업이 있다.

 

기존 시설을 철거하고 도심에 새로운 선형(線形) 공원을 만든 좋은 사례는 ‘경의선 숲길’이다. 과거 기찻길이 있던 곳에 기차가 지중화되면서 지상 공간이 비워지게 되었고, 그 자리에 선형 공원이 생겼다. 덕분에 과거 아무 상관없던 홍대 앞 연남동과 마포구 공덕동 사람들은 같은 공원을 산책하는 한 공동체가 되었다. 이런 선형 공원은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 추억을 만들 기회를 주고 지역 간 연결과 소통을 만든다. 공원 주변으로 새롭게 형성된 상권은 일자리와 세수를 늘린다. 돌궐 제국의 위대한 왕 ‘돈유쿠크’는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뚫는 자는 흥한다”는 말을 했다. 이 명언은 도시 설계에도 적용된다. 현대 도시에서는 빠르게 이동할 필요가 있는 교통수단의 길은 지하로 내려 보내고, 지상은 사람이 천천히 걸을 수 있는 길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서울 강북에는 1972년에 건축된 세운상가가 있다. 강북은 청계천이 동서로 흐른다. 따라서 을지로, 종로, 퇴계로 같은 도로는 모두 물길과 평행하게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었다. 이렇게 강북의 공간 구조는 동서 방향으로 흐른다. 그런데 이 흐름을 종로부터 퇴계로까지 남북으로 높고 길게 들어선 세운상가가 만리장성처럼 막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은 종묘와 남산을 잇는 축선상에 세운상가를 건축했다. 그리고 성곽 위를 걷는 것처럼 높이 세운 세운상가 위를 걸으면서 도시를 내려다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2~3층 높이에 가로를 만들어서 활성화되면 1층의 거리가 죽는다. 반대로 1층 거리가 활성화되면 2~3층에 만든 가로는 죽는다. 두 거리를 위아래로 평행하게 만들어서 경쟁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건축 설계의 교훈이다. 이 원리를 입증하듯이 세운상가는 결국 필로티로 어두워진 지상의 거리와 높은 층에 위치한 거리 둘 다 망해서 슬럼처럼 되었다. 세운상가는 2013년 건축가들이 선정한 최악 건축물 18위에 오르기도 했다.

 

만약에 세운상가를 부수고 그 자리에 경의선 숲길 같은 선형 공원을 만든다면 어떨까? 공원을 산책하면서 공통 추억이 만들어지고 그 공원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은 도심의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것이다. 남북으로 만들어진 공원은 종로부터 퇴계로까지 연결하면서 시너지를 가져올 것이다. 세운상가 내 시설은 공원 주변의 새로 지어질 건물로 이주하면 좋겠다. 하지만 여러 이유에서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철거하는 일은 어렵다. 존경받던 지도자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제자들은 돌아가신 분을 신격화해서 자신들이 권력을 가진다. 이런 사례는 종교나 우리나라 근현대 정치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건축가는 김수근이다. 그런 그가 50대 중반에 요절했다. 김수근의 갑작스러운 사망 후, 김수근 신격화와 함께 그의 제자들은 한국 건축계의 권력층이 되었다. 한국 건축계의 신과 같은 존재인 김수근의 세운상가를 철거하는 것은 이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세운상가를 근대 건축 유산으로 보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일리 있는 말이다. 건축에 완전한 정답은 없다. 하지만 때로는 미래 세대를 위해서 비우는 작업도 필요하다.

도시를 성공시키는 공식은 어렵지 않다. 선형 공원을 더 많이 만들어 1층 가로를 활성화해 사람을 더 걷게 만들면 된다. 걸을 때 비로소 경험은 연속되고, 도시는 융합되고, 우리는 하나 된다. 나는 빈이 오래된 성을 부수고 도시를 공원의 링으로 연결한 것이 성곽을 유지한 것보다 더 나은 결정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도 이제 이런 고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