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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9. 10. 17:27
'시간도 잠시 숨을 고르는 곳' 경북 영주
100년된 정미소, 80년된 이발소, 60년된 서점 ... 이야기의 끝은 늘'추억'이더라

100년이 넘는 내력의 풍국정미소에서 우기섭 씨가 기계를 살피고 있다. 전기만 넣으면 기계를 다시 돌릴 수 있지만, 느린 도정 속도 때문에 채산을 맞출 수 없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둑한 정미소 건물에 폐허처럼 남아 있는 커다란 도정기계 모습이 마치 숨을 거둔 고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래 사진은 쇠락해가는 구도심의 낡은 상가형 시장인 후생시장을 도시재생사업으로 레트로풍의 공간으로 바꾼 모습.
 

 



여행자의 눈으로 경북 영주를 들여다보는 건 흥미롭습니다. 영주는 여행자에게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낯섭니다. 모순 같지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영주에는 부석사나 소수서원 등 내로라하는 여행지들이 있습니다. 여행 좀 해봤다면 안 가봤을 리 없는 곳들이지요. 그런데 정작 영주 시내에 관심을 두는 여행자는 거의 없습니다. 부석사나 소수서원 같은 이름난 곳들이 늘 영주보다 먼저였으니까요. 영주에 여행 와서 부석사를 가는 게 아니라, ‘부석사에 왔는데 거기가 영주더라’는 식. 그렇다면 여행자들은 과연 영주를 아는 것일까요, 아니면 모르는 것일까요.

부석사나 소수서원을 빼고 영주의 도시풍경을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영주는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는 중소도시입니다.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1980년대까지, 가장 번성했던 시간의 단층이 도시와 주민들의 삶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물이 되기에는 멀었지만, 아직 잊히지 않은 추억이 거기 있습니다. 오래된 것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거기 오래 산 이들로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미소 툇마루에서, 낡은 이발소 의자에서, 대장간 화덕의 열기 앞에서, 오래된 서점의 서가 앞에서 살아온 생애를 듣다가 그들이 맞이하고 있는 평온한 황혼에 그만 콧날이 시큰해지고 말았습니다.




# 철도와 시장으로 도시를 읽다

경북 영주를 해독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철도, 또 하나는 시장이다. 철도 얘기부터 해보자.

영주의 번성과 쇠락은 열차의 흥망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주에는 세 개의 철도 노선이 교차한다. 1942년 중앙선이 개통되고 영주역이 문을 열었다. 뒤이어 영동선과 경북선이 놓이면서 영주는 물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열차가 중장거리 교통의 중심이었던 시절. 영주역 개설은 말 그대로 ‘상전벽해’였다. 기차역이 들어서면서 영주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역은 사람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몰려든 사람을 상대로 한 장사치들이 뒤를 따랐다.

그렇게 늘어난 인구가 1970년 초반에는 18만 명을 헤아렸다. 열차를 타고 들어왔다가 잠깐 머물고 떠나는 뜨내기들까지 합친다면 실제 인구수는 20만 명이 족히 넘었을 것이라는 게 주민들의 기억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영주 인구는 그때의 겨우 절반쯤에 턱걸이하는 정도다.

하지만 영주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철도의 가설과 함께 시작된 영광이었으니, 철도에서 고속도로로 교통의 중심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쇠락이 시작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도시의 중심이동은 구도심에 지층을 남긴다. 제자리에서 번성하는 도시에서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새것으로 바꾼다. 그 과정에서 오래된 것은 흔적 없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반면 급작스러운 소외나 개발 지체의 시간은 ‘오래된 것들의 화석’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화석이 된 이야기가 영주 구도심에 있다.



영주에는 유독 낡은 상가 간판이 많다. 상점 간판을 읽다 보면 1980년대쯤으로 돌아간 것 같다. 영주 관사촌의 7호 관사. 철도 간부들이 생활했던 집인데, 길게 지은 시멘트 집의 가운데를 막아서 두 가구가 썼다. 영주근대역사체험관에 전시된 1970년대쯤 영주의 버스정류장 사진. 영주 풍기역에 전시돼 있는 증기기관차 901. 우리 철도 역사에서 증기기관차가 사라진 건 1967년이다. 이 기관차는 1994년 관광 목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2000년까지 운행했다. 1954년 문을 연 스쿨서점의 서가. 질문을 적고 그 답이 될 법한 책을 꽂아뒀다. 달동네를 연상케 하는 관사골. 생활여건 개선사업으로 길을 넓히고 주차장도 만들었다.

# 추억의 풍경이 그 길에 있다

영주 도심에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옛 영주역 배후에 근대와 현대 공간이 골목을 따라 이어져 있는 거리다. 이곳에는 영주가 건너온 시간이,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온 이들의 삶이 지층처럼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박제처럼 남아 있는 과거의 시간을 보는 감회는 거기 살았던 이들에게 가장 크겠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주의 거리에서 문득 만나게 되는 오래된 시간은 누구에게든 추억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영주역장에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이곳 관사에서 살았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요. 친구들이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던 것이 목욕탕과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거였지요.

이 집에서만 60년을 살았는데 낡은 집이지만 잘 지었어요. 숨겨둔 것처럼 절묘한 자리에 나무를 깎아 정교하게 만든 잠금장치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예요.

지금이야 동네가 절간 같지만, 그 무렵에는 아이들이 많아 관사 골목이 시끌시끌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7년째예요. 저기 탐스럽게 열린 정원의 포도나무도 아버지와 함께 가꾼 거예요. 정원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 쌓여 있어요.

가족들은 관사가 불편하다고 따라나서지 않아 혼자서 자주 와요.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옛 친구도 오고, 관광객들도 오고…. 누가 오든 이야기의 끝은 늘 ‘추억’이에요.”

그때는 어디서 살았든지 우리는 다 비슷한 시간을 건너왔다.

근대역사문화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공간이 철도관사다. 철도관사는 중앙선 철도 부설로 신설되는 영주역 근무자를 위해 지어졌다. 다들 초막집이나 판잣집에 살 때였으니 시멘트로 번듯하게 지은 철도관사는 이웃의 부러움을 샀다.

관사에서는 역장과 간부급 직원들이 살았는데, 최고급 주택이었던 관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전입해온 간부들이 관사를 먼저 차지하려고 전임자가 떠나기도 전에 살림살이를 가져다 놓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지는 것쯤은 예사였다.

서른 채 남짓이었다는 관사 중에서 예전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는 건 5호와 7호 두 채다. 5호 관사에는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강영묵(66) 씨가 산다. 아니 은퇴 후 서울의 집과 여기 관사를 오가며 지내는 중이니 ‘산다’는 표현은 좀 그렇다. 그는 관사 문을 열어두고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스스럼없이 집으로 들인다.


# 관사골의 오래된 골목

해방 이후 관사 뒤편 산자락에 무허가 판잣집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영주역과 가까운 데다 고급주택인 관사의 입지까지 갖췄으니 살기에 그만 한 곳이 없었다. 6·25전쟁 직후에는 자고 나면 산비탈에 집이 한두 채씩 늘어났다고 했다. 나중에는 골짜기 양옆과 산자락까지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섰다. 이렇게 만들어진 달동네를, 관사가 있는 골짜기 마을이라고 해서 ‘관사골’이라 부른다.

비탈진 사면을 따라 누추한 집들이 들어선 관사골 달동네는, 정부의 취약지역 생활여건 개선사업으로 미로 같던 길이 정비되고 공동주차장이 설치됐다. 담벼락에 화사한 벽화를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악기연주를 연습하던 공간을 근사한 커피숍으로 바꾸고, 옛 달동네의 소박한 풍경을 더러 남겨둔 건 방문객들의 시선을 염두에 두어서다. 그곳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볼거리는 없지만 낮은 지붕의 산동네를 산책하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관사골 인근에는 이석간 고택이 있다. 허름한 주택가 한가운데 방치돼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 한옥이다. 이석간은 500년 전 ‘사의경험방’이란 의서를 저술한 학자. 고택에는 이석간이 명나라 황제 어머니의 병을 고쳐줘 답례로 99칸의 집을 얻었다는, 잘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래 등 같은 집은 다 흩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고택은 1920년에 신축한 별채란다.

철도관사와 이어지는 근대역사문화거리에는 50∼60년 전의 시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거리에 풍국정미소가 있고, 흑백필름 속 풍경을 가진 80년 내력의 영광이발관이 있다. 풍국정미소는 문을 닫은 지 5년쯤 됐지만 아직도 우기섭(84) 씨는 거의 매일 정미소로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고, 영광이발관의 이종수(76) 씨도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열고 손님을 받고 있다. 인근에 1954년 문을 연 ‘스쿨서점’의 송태근(55) 씨도 여전히 서점을 지키고 있다.

풍국정미소에서는 쌀 3000가마니쯤을 창고에 쌓아놓고 쉬지 않고 발동기를 돌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영광이발관에서는 까까머리 아이들을 이발소 의자에 올려놓은 판자에 앉히고 머리 깎던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스쿨서점에서는 1960년대 잡지나 영주 출신 작가의 책을 볼 수 있다. 정미소 우 씨도, 이발관 이 씨도, 서점 송 씨도 간혹 찾아오는 여행자를 기꺼이 반긴다.


# 시간과 기억이 새겨진 곳들

옛 영주역 주변에는 대폿집과 여인숙, 식당이 늘어섰고, 중앙통에는 포목전과 옹기전, 나무전, 싸전 등으로 이뤄진 육전거리가 있었다. 주민들은 육두문자와 멱살잡이로 난장판이 되곤 했던 역전의 막걸리 집을 기억했다.

번성했던 구도심이 쇠락하게 된 계기는 예기치 않은 재난이었다. 1961년 7월 기록적인 폭우로 서천 제방이 무너지면서 영주시가지의 3분의 2가 침수됐다. ‘영주 대수해’. 영주문화원이 뽑은 역대 ‘영주 10대 뉴스’에 들어갈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서천의 물길을 돌리는 대대적인 수해복구 공사가 이뤄졌고, 이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철로가 이설됐다. 그리고 몇 년 후 영주역이 구도심의 남쪽 휴천동으로 이전했고, 뒤이어 시청까지 옮겨 가면서 도시의 경제 중심이 그쪽으로 빠르게 건너갔다.

도시의 중심이 옮겨 갔다 해도 시간과 기억까지 가져갈 수는 없는 일. 영주에서 여행해야 하는 곳들은 모두 구도심에 있다. 전통시장도, 오래된 노포도, 이름난 맛집도 죄다 구도심에 있다. 딱 한 곳, 미국 아마존에서 파는 호미를 만드는 대장장이 석노기(68) 씨의 영주대장간이 구도심에서 옮겨 간 영주역 뒤편에 있는데, 그건 애초부터 그가 자리를 잡은 곳이 거기여서 그렇다.

그러니 영주를 여행한다는 건 구도심을 본다는 것이고, 구도심을 본다는 건 시장을 둘러보는 일과 다름없다.

영주 구도심에서는 시장의 명칭이 보통 헷갈리는 게 아니다. 이쪽 시장 끝과 저쪽 시장 시작이 붙어 있어 시장의 경계를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없다. 이름이 헷갈리는 더 큰 이유는 관청에서 이른바 ‘시장 살리기’ 사업을 한다며 그때마다 덕지덕지 덧붙인 이름 때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골목시장’이 ‘선비골 전통시장’이 됐다가 다시 ‘영주 365시장’이 되는 식이다. 여기다가 인근에 있던 오래전 문 닫은 ‘중앙시장’이란 이름까지 겹쳐졌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시장이 근대경관으로 복원한 영주후생시장이다. 후생시장은 1955년 적산가옥을 이용해 현대식 상가형 시장을 지으면서 문을 열었다. 한때 전국 규모의 고추시장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도시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급격히 쇠퇴했다.

상가가 비어 문을 닫다시피 했던 시장을 지난 2017년 영주시가 근대경관복원사업을 통해 옛 모습으로 복원했다. 복원한 시장의 중심에는 영주의 근대역사를 전시한 영주근대역사체험관과 주민들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송출하는 라디오 방송국이 들어섰다.

상점가에는 저마다 근대풍으로 치장한 상점들이 입주했다. 시장에는 허름한 여인숙을 개조해 만든 깔끔한 게스트하우스가 있고, 다리쉼을 할 수 있는 편안한 카페도 있다. 오래된 책을 마음껏 꺼내 볼 수 있는 무인 헌책방도 있으며 직접 개발한 인삼빵과 사과빵을 파는 빵집도 있다. 쓸모를 잃어가는 낡은 도시의 공간을 훌륭하게 되살려낸 모습을 보면 어쩐지 고맙기까지 하다.


● 철도관사 5호 주민 강영묵(66) 씨 “이 집에서만 60년을 살아 정원 포도 아버지와 가꿔”

“영주역장에 부임한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이곳 관사에서 살았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요. 친구들이 신기해하고 부러워했던 것이 목욕탕과 화장실이 집 안에 있다는 거였지요.

이 집에서만 60년을 살았는데 낡은 집이지만 잘 지었어요. 숨겨둔 것처럼 절묘한 자리에 나무를 깎아 정교하게 만든 잠금장치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예요.

지금이야 동네가 절간 같지만, 그 무렵에는 아이들이 많아 관사 골목이 시끌시끌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올해로 7년째예요. 저기 탐스럽게 열린 정원의 포도나무도 아버지와 함께 가꾼 거예요. 정원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가득 쌓여 있어요.

가족들은 관사가 불편하다고 따라나서지 않아 혼자서 자주 와요. 문을 열어놓고 있으면 옛 친구도 오고, 관광객들도 오고…. 누가 오든 이야기의 끝은 늘 ‘추억’이에요.”


● 풍국정미소 주인 우기섭(84) 씨 “옛날 정미소는 은행 같았지 떼인 돈, 집 한채 값은 될걸”

“여긴 다 늙었어. 정미소는 100년이 훨씬 넘었고, 여기 나무 책상도 얼추 70년은 됐지. 본래 삼촌이 운영하다 사촌 형님이 대를 이었는데, 객지로 나간 조카들이 이 일을 하지 않으니까 정미소 일을 아는 내가 물려받았지.

정미소 문을 닫고 전기를 끊은 게 벌써 2년이야. 그래도 매일 출근해. 평생 정미소 일만 했는데, 문 닫았다고 그날로 딱 발을 끊을 수 있겠어?

시골 마을에서 정미소는 그냥 정미소가 아니었어. 추수가 끝나면 수확한 벼를 정미소에 맡기는데, 농민들이 맡겨둔 벼를 담보로 정미소를 금융기관처럼 이용했어. 등굣길에 아이가 아버지가 써준 꼬깃꼬깃한 편지를 들고 와. 월사금을 꿔달라는 편지지. 그러다 보니 집집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속속들이 알게 돼. 그 바람에 돈을 안 빌려줄 수 없었지.

이자? 그런 거 없어. 쌀로 받은 담보가 다 떨어져도 안타까운 사정을 들으면 돈을 안 빌려줄 수 없어. 그래서 떼인 돈이 집 한 채 값은 될 거야, 아마.”


● 스쿨서점 송태근(55) 사장 “영주서 여기 모르면 간첩 그 옛날에 에어컨 들여놔”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에 문을 열었어요. 전국에서도 60년이 넘은 서점은 다섯 곳뿐이라더군요.

2대에 걸쳐 운영해오던 서점을, 10년 전쯤 근처에서 작은 서점을 하던 제가 인수했어요. 여기가 본래 서점을 시작한 자리는 아니에요. 창업주의 대를 이은 2대가 이 자리로 이전했지요.

영주에서 ‘스쿨서점’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위세가 당당했지요. 다방에도 에어컨이 없던 시절, 에어컨을 가장 먼저 들여놨어요.

학습지 판매가 70%쯤 돼요. 단행본은 주로 중장년층을 겨냥한 책을 가져다 놔요. 요즘은 ‘서점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하고 있어요. 서점 한쪽에 향토사 책과 헌책 전시 코너를 만든 것도 그런 이유예요.

아 참, 영주 출신 고 홍사덕 전 국회의원이 학창시절 이 서점 단골이었어요. 홍 전 의원은 책에 자기소개와 성장과정을 쓰면서 ‘시내서점에서 내준 자리 한 켠이 정위치였던 세탁소집 아들’이라고 적었어요. 홍 전 의원에게 자리를 내준 ‘시내서점’이 여기예요.”


● 영광이발관 이종수(76) 이발사 “스물넷부터 내 가게 꾸려 아직도 살아있는 이발소”

“내가 이발관을 지킨 게 53년이고, 내 앞에 두 명의 이발사가 30년쯤 했어요. 역사가 80년이 넘어요.

가난했지요. 신문 배달을 하다가 열네 살에 이발소에서 머리를 감아주는 일을 했고, 객지의 인쇄소에서 3년 동안 일하기도 했지요. 밥 굶을 일은 없겠다 싶어 대구에서 이발 면허를 땄지요. 영주로 돌아와 선배의 이발소에서 일했는데 이발 솜씨가 좋아 최고 일당을 받았어요.

선배가 시내 한복판에 일류 이발관을 차려서 나가면서 기존의 이발관 인수를 제안했어요. 고심 끝에 빚을 내서 ‘내 가게’를 냈지요. 만 스물네 살 때였어요. 개업한 날짜도 기억해요. 1970년 4월 1일. 개업한 지 51년 5개월이 지났어요.

요즘 누가 이발관을 오나요. 동네에서 친구처럼 지내는 이들만 찾아올 뿐이지요. 가끔 관광객들이 찾아와 옛 물건을 보여 달라는데 사실 여기에는 오래된 물건이 별로 없어요. 낡은 도구로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직 여기는 박제된 이발소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발소’예요.”


● 영주대장간 석노기(68) 장인 “고집으로 호미 만들어 아마존서 잘 팔린대요”

“열네 살에 매형 대장간에서 풀무를 잡은 이후, 대장장이로 한평생을 살았어요. 공주에서 일하다 1976년 스물세 살 나이에 어머니와 함께 영주에 와서 빈 창고를 세내서 대장간을 냈지요. 객지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젊었을 때도 한눈 한 번 판 적이 없어요.

1980년 무렵 대장간이 포화 상태였을 때도, 중국산 농기구가 쏟아져 들어왔을 때도 자부심과 고집으로 버텼어요. 좋은 농기구를 만들려고 애쓰니까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하더군요.

내가 만든 호미가 미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히트 원예상품으로 팔려나간다는 뉴스를 듣고 처음에는 ‘아마존 강변에서 교포가 호미로 농사를 짓나 보다’라고 생각했지요.

뉴스가 나온 뒤에 방송에도 출연하고 여기저기서 불러줘서 강연도 하고 그래요. ‘강연하는 대장장이’는 저밖에 없을걸요? 다들 비결을 묻는데 특별한 게 있나요. 할 수 있는 게 이 일뿐이니 우직하게 일해온 것뿐이에요.”

 
 ■ 영주의 맞수 맛집

영주에는 유독 ‘맞수’ 맛집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쫄면의 대표 맛집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분식집 ‘나드리’와 ‘중앙분식’. 영주동 ‘랜드로버’ 브랜드 매장 앞에 있다고 해서 ‘랜떡’으로 불리는, ‘원조’를 주장하는 두 곳의 포장마차 떡볶이집의 경쟁도 치열하다. 카스텔라 인절미로 이름난 태극당 빵집이나 칼칼한 감자탕을 착한 가격에 내는 명동감자탕도 영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