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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황금의 나라 조선① 호러스 알렌과 운산금광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8. 12. 10:04

“미국 회사에 운산금광을 주십시오”… 美선교사 알렌, 고종에 요청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9. 황금의 나라 조선① 호러스 알렌과 운산금광

400년 동안 조선 산하에 묻혀 있던 금은보화가 19세기 말 제국주의에 의해 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사진은 1930년대 일본 자본이 개발한 강원도 정선 천포금광. 지금은 화암동굴 관광지로 변했다./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11 03:00

 

 

모든 게 연결된 사람들

1884년 9월 14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청나라 상하이에서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조선을 기독교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장대한 꿈도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에 도착한 알렌은 그달 20일 제물포에 닿았다. 석 달 뒤 제물포에서 50마일 떨어진 한성에서 젊은 노론 개혁파가 정변을 일으켰다. 갑신정변이다. 이때 거의 죽을 뻔했던 조선 왕비 조카 민영익을 알렌이 살려줬다. 석 달 뒤 알렌은 6년 연상인 조선 국왕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 옆에는 왕비 여흥 민씨가 앉아 있었다. 남편 고종보다 한 살 연상이었다.

구한말 선교사로 방한해 조선 왕실 고문과 미국공사, 그리고 사업가로 활동한 호러스 알렌. 조선 최대 금광인 운산금광을 미국이 차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4월 고종은 아관에서 알렌에게 조선 최대 금 산지인 운산금광 채굴권을 선물했다. 이미 반 년 전 왕비 민씨는 일본인들에게 암살당했지만, ‘왕비 조카를 살려준’ 은혜를 갚은 것이다.

그해 11월 운산금광 개발을 위해 미국 광산 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조선에 도착했다. 일행은 13명이었다. 1905년 운산 노다지를 미국에 선물한 알렌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3년 뒤 아버지 테일러가 죽었다. 장남 앨버트가 일을 물려받았다. 그 사이 대한제국은 사라졌다.

운산금광에서 일했던 광산기술자 앨버트 테일러. 3.1운동을 보도한 기자이기도 했다.

 

1919년 2월 28일 앨버트와 일본에서 만나 인도에서 결혼한 영국 연극배우 메리 부부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아들 브루스 요람에는 다음 날 조선 민중이 읽을 독립선언서 한 장이 숨겨져 있었다.

금광개발업자 남편 앨버트 테일러와 함께 조선에서 벽돌집 딜쿠샤을 짓고 살았던 영국 배우 메리.

 

그때 앨버트는 운산금광을 떠나 충남 천안에서 사금(砂金) 광산을 개발 중이었다. 금광 이름은 직산금광이었다. 금광을 함께 개발한 미국 회사 이름은 직산광업회사(Chiksan Mining Company)였다. 직산금광은 1922년 폐광됐다. 이듬해 앨버트 가족은 큰 은행나무가 있는 서울 행촌동에 붉은 벽돌집을 지었다. 집 이름은 딜쿠샤(Dilkusha)라고 지었다. 앨버트와 아버지 조지 테일러는 지금 서울 양화진에 묻혀 있다.

폐광 후 직산광업회사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유전 개발업에 뛰어들었다. 1922년 이 회사는 ‘액체든 기체든 전혀 새지 않는’ 파이프 이음쇠를 개발했다. 1940년 미국특허청에 상표 등록된 이 이음쇠 브랜드는 ‘직산(Chiksan)’이다. 고압 액-기체 수송용 파이프를 연결하는 부품인 ‘스위블 조인트(swivel joint)’가 주요 제품이다. 지금 ‘직산(Chiksan)’은 이 스위블 조인트를 뜻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직산(稷山). 21세기까지 통용되는 이 미제(美製) 부품 하나에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보물을 팔아먹은 지도자, 그리고 엘도라도를 밟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앨버트 테일러가 개발한 직산금광을 인수한미국 직산광업회사의 액체 운반용 파이프 이음쇠 와 그 브랜드 ‘Chiksan’. 회사명과 로고는 모두 직산광산에서 따왔다. /FNC Technology

미국 직산광업회사의 장비 로고, '직산(CHIKSAN)'./미특허청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9. 황금의 나라 조선① 호러스 알렌과 운산금광

400년 묻혀 있던 금은보화

 

조선 시대 금과 은은 ‘진실로 국가에서 사대(事大)하는 데 쓸 물건일 뿐’(1415년 4월 20일 ‘태종실록’) 민생과 무관했다. 그런데 채금(採金)은 ‘1년 금 캐기가 10년 공물 준비보다 갑절이나 고됐다.’(1425년 8월 28일 ‘세종실록’) 금을 캔다고 다른 부역이 면제되지도 않았다.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주야로 채근하는 바람에 금 캐다 말고 농민들은 쓰러지기 일쑤였다.(유승주, ‘조선전기 대명무역이 국내산업에 미친 영향’, 아세아연구 통권 82호,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89)

그리하여 1429년 8월 18일 세종이 명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척박해 금과 은이 생산되지 않음은 온 천하가 다 아나이다. 금과 은을 조공 물품에서 제외해 주사이다.” 그해 12월 마음을 졸이던 세종에게 사신들이 ‘금은 조공 면제’라는 낭보를 가지고 돌아왔다.(1429년 12월 13일 ‘세종실록’) 사실 조선에 금과 은이 많다는 사실은 고려 때부터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황제가 보여준 너그러움은 언제라도 분노로 바뀔 폭탄과도 같았다.

그래서 조선 정부가 택한 정책은 금은 생산 및 유통 금지였다.(유승주, 앞 논문) 이후에는 왕실 수요용 금은만 농민에게 부역 생산하도록 했으나, 이 또한 농민들 저항으로 생산량은 극미했다. 이에 성종 때 이조판서 겸 원상(院相·승정원 임시 최고 결정권자) 구치관이 “민간에게 광업을 허용해 생산량을 증가시키자”고 건의했으나 흐지부지 끝났다.(1470년 4월 19일 ‘성종실록’) 요컨대 조공이 됐든 왕실 수요가 됐든, 조선 정부는 금은 수요를 부역을 통한 생산으로 충족했고 민간에게는 유통도 생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금과 은은 조선 산하(山河)에 400년 동안 묻혀 있었다.

 

제국주의, 이양선 그리고 고종 정부

19세기가 왔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은 유럽 인류에게 가공할 힘을 선물했다. 대량으로 생산한 대량살상무기를 대량으로 싣고 떠났던 유럽 상선들은 갑판 위아래에 금은보화를 싣고 귀향했다.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와 아프리카, 동남아에 이어 청나라와 일본 차례였다. 1793년 건륭제가 영국 대표단에게 자유무역을 불허한 이래 청나라는 서서히 침몰 중이었다. 침몰 중이던 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난파당했다. 이에 질겁한 일본은 반강제 반자발적으로 나라 문을 열었다.

조선 차례였다. 철갑을 두른 이양선(異樣船)이 동해와 황해와 남해에 수시로 출몰했다. 1863년 들어선 고종 정부는 그래도 쇄국을 고수했다. 1875년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를 본떠 강화도에 함포를 쏴댔다. 이듬해 조선이 나라 문을 열었다.

1880년대 미국을 선두로 조선과 조약을 맺은 서구 국가들은 조선을 이 잡듯 뒤지며 금맥을 찾았다. 외교관은 물론 광산기술자, 지질학자·군인, 상인까지 동원해 금을 찾았다.(이배용, ‘한국근대광업침탈사연구’, 일조각, 1997, p2)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가 고종에게 “아무 지식 없이 무조건 외국인에게 금광을 허가하지 말라”고 충고할 정도로 ‘노다지 탐사’ 열풍은 뜨거웠다.(이배용, 앞 책, p53)

모순적이게도, 고종 정부가 가장 먼저 금광 채굴권을 선물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그 뒤에는 선교사요 의사며 외교관이며 사업가 호러스 알렌이 있었다.

 

1884년 9월 알렌 입국과 갑신정변

 

1884년 9월 14일 스물여섯 먹은 선교사 호러스 알렌은 청나라 상해(上海)에서 제물포행 배에 올랐다. 바로 며칠 전 아기를 낳은 아내 패니는 상해에 남겨뒀다. 9월 20일 알렌은 일본 나가사키~조선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했다. 목적지는 제물포가 아니라 서울이었다. “부산은 일본인 천지요 제물포는 외국인 천지였다. 게다가 유동 인구가 너무 많아 개종을 시켜도 관리가 쉽지 않았다.”(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1884년 10월 6일: F. 해링턴, ‘God, Mammon & The Japanese’, 위스콘신대 출판부, 1944, p31, 재인용)

이틀 뒤 당나귀를 타고 서울로 가다가 알렌은 주막에서 나반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나반은 “조선에는 금이 풍부하다”고 그에게 알려줬다. 그날 밤 서울 여관에서 만난 미국인 미첼은 목재 무역을 위해 내륙을 탐사 중이라고 알렌에게 말했다.(‘알렌의 일기’ 1884년 9월 22일, 김원모 역, 단국대 출판부, 1991) 서울에서 만난 공사 푸트는 그에게 무급 의사직을 권했고, 알렌은 수락했다. 10월 11일 알렌은 아내 패니와 아기를 데리러 상해로 돌아갔다. 배에는 영미 선교사 몇과 미국인 교수, 창녀 하나가 동승했다. 알렌은 ‘충격적이지만, 대부분 정부(情婦)와 동행했다’고 기록했다.(‘알렌의 일기’ 10월 11일)

두 달 뒤인 12월 4일 밤 갑신정변이 터졌다. 종로 우정국 낙성식에서 벌어진 정변에서 실세 권력 중의 실세인 왕비 민씨 조카 민영익이 칼로 난자당했다. 오른쪽 귀 뒤쪽 동맥이 끊어지고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이 잘려나갔다. 온몸이 칼집 투성이였다. 산책을 마치고 집에 있던 알렌은 급히 불려나가 한의사들이 보는 앞에서 밤새 수술 끝에 민영익을 살려냈다. 민영익은 미국 의사에게 10만냥을 선물로 줬다.(‘알렌의 일기’ 1885년 1월 27일) 광산 이권 사업에 대한 언질도 함께.(엘린우드에게 보내는 편지, 1885년 2월 26일, 이배용, 앞 책, p63, 재인용)

 

선물로 받은 운산금광

해가 지나고 1885년 3월 27일 고종 부부가 알렌을 찾았다. 알렌은 약한 천연두를 앓고 있던 조대비와 고종 그리고 왕비 민씨를 차례로 진찰하고 치료해줬다. 한 달 뒤 알렌은 왕비로부터 100야드짜리 비단 한 필과 누런 두루마기를 선물 받았다. 알렌은 조선 왕실 주치의 겸 국왕 고문이 됐다.

1887년 7월 고종이 고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미국 정부의 관심을 유도하고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겠는가.” 알렌이 즉각 대답했다. “금광을 미국 기업에 주시라. 특히 금 많기로 소문난 평안도 운산금광.”(에버렛에게 보낸 편지, 1887년 7월 2일, 이배용, 앞 책, p64, 재인용) 이미 미국인 사업가 타운센드를 통해 운산금광 탐사를 마친 터였다. 두 달 뒤 1887년 9월 알렌은 정2품 참찬으로 임명됐다.

이후 조선 금광을 찾는 미국인 조사단 발길이 이어졌다. 1888년 미국에 가 있던 알렌은 광산기사 피어스를 파견해 운산금광을 조사했다. 1889년에도 기사 5명이 내한했다. 조선 정부예산으로 조선 광산 정보를 모은 사람은 조선 정2품 참찬 알렌이었다.

실제로 운산금광이 미국 기업에 넘어간 것은 알렌이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으로 이직한 뒤인 1895년이었다. 그해 7월 왕비 민씨는 알렌을 통해 미국 기업인 모스에게 운산금광 채굴권을 주라고 전격 지시했다. 계약은 7월 15일에 맺어졌다. 조건은 25년 채굴권 보장과 면세, 다른 광물도 채굴 가능. 왕실이 지분 25%를 소유해 연간 2만5000달러 지급. 보고를 받은 미 국무장관 실(Sill)은 “이보다 더 조건이 좋을 수 없다(as broad as possible)”고 했다.(해링턴, 앞 책, p156)

1895년 10월 왕비 민씨가 일본인에게 암살되면서 계약은 잠정 취소됐다. 그리고 고종이 아관파천 중이던 1896년 4월 17일 고종 정부는 계약을 정식으로 허가했다.

운산금광이 미국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조선에 들어와 있던 ‘모든’ 나라가 동일 조건으로 금광 탐사와 채굴권을 요청했다. 나라는 바야흐로 땅속까지 털리는 중이었다. 1899년 3월 27일 대한제국 정부는 해마다 원화 2만5000원 지급을 조건으로 지분을 모두 미국에 매각했다. 이듬해 1월 1일 대한제국은 일시불 1만2500달러를 받고 채굴 기한을 40년으로 연장했다.

‘운산금광은 ‘현금 1000달러를 담은 상자를 2개씩 등에 실은 소 40마리’가 분주히 광산과 항구를 오가며 돈을 쓸어갔다. 생각도 못한 금광 허가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금 생산국이 됐다. 운산은 아시아에서 제일 수익성이 좋은 광산이었다. 1939년 미국 기업이 철수할 때까지 거둔 순익은 1500만달러가 넘었다.’(S. 파머, ‘American Gold Mining in Korea’s Unsan District’, Pacific Historical Review, Vol 31, No 4, 캘리포니아대 출판부, 1962)

 

또 다른 엘도라도

1910년 훗날 미국 31대 대통령이 된 광산기술자 허버트 후버가 일본 금융계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H. 후버, ‘The Memoirs of Herbert Hoover’1, 맥밀런, 1950, p100) 서양의 조선 광산사 연구가 로버트 네프에 따르면 그때 후버는 운산금광 주점에 들러서 술을 마시고는 술값을 떼먹고 사라져버렸다.(2018년 4월 12일 ‘로이터통신’) 1896년 11월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 미국인 광산기술자 조지 테일러가 가족과 함께 입국했다. 제물포와 진남포를 거쳐 테일러는 두 아들과 함께 운산에서 금맥을 탐사했다. 1908년 그가 죽었다. 조지 테일러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이제 그 장남 앨버트가 또 다른 엘도라도를 찾을 참이었다.<다음 주 계속>

* 유튜브 https://youtu.be/32u72oB2dZQ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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