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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8. 6. 10:25

“가짜 양반 엄택주를 영원히 노비로 삼으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8. 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8.04 03:00

1457년 10월 21일 강원도 영월에 유폐됐던 조선 6대 임금 단종이 죽었다. 영월 말단 관리 엄흥도는 서강(西江) 물가에 방치된 그 시신을 수습해 자기 선산 언덕에 묻었다. 1698년 숙종 때 노산군에서 단종으로 왕위가 복위되고 1758년 영조 때 엄흥도는 사육신을 모신 영월 창절서원에 배향됐다. 단종이 묻힌 언덕은 장릉(莊陵)으로 조성됐다. 이보다 3년 전인 1755년 엄흥도 후손인 전직 현감 엄택주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1698년 11월 6일 ‘숙종실록’, 1755년 3월 12일, 1758년 10월 4일 ‘영조실록’) 노비 신분을 세탁해 현감까지 오른 뒤 흑산도로 유배됐다가 역모(逆謀)에 휩쓸려 죽은,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일생.

강원도 영월에 있는 단종릉인 장릉(莊陵). 1457년 영월에 유배 중이던 단종이 죽자 영월 관리 엄흥도가 죽음을 각오하고 그 시신을 자기네 선산에 모셨다. 노비였던 이만강은 엄흥도 후손 엄택주로 신분을 위조해 현감 벼슬까지 지내다 적발됐다. 조선 후기 노비들이 에워싼 세상은 이성으로는 설명하기 난해한 세계였다./박종인

[박종인의 땅의 歷史] 268. 조선 노비 엄택주의 파란만장한 인생

요동치는 노비 제도

 

임진왜란 와중과 이후 많은 노비가 양민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대가를 받고 양민으로 풀어주는 일을 ‘속량(贖良)’이라고 한다. 속량은 국가가 주도했다. 납세 의무가 없는 천민을 양민으로 상승시켜 재정을 정상화하려는 조선 정부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천민들 이해관계가 맞았다. 속량 대가는 전쟁이나 반역 토벌전 무공(武功) 또는 돈이었다. 돈은 쌀 160석이 최고였다. 17세기 숙종 때는 최저 10석까지 낮아졌지만 여전히 노비 하나가 25년을 일해야 거둘 수 있는 돈이었다. (국사편찬위, ‘조선 후기의 사회’(신편 한국사34), p145, 노비신분층의 동향과 변화)

 

불만은 가득한데 무공도 돈도 없는 노비들은 도망을 갔다. 영조 5~8년 3년 사이에 성균관 소속 노비 가운데 달아난 종들이 2500명이었다.(1732년 9월 2일 ‘승정원일기’) 2500명이 달아난 사실도 놀랍지만, 성균관에 그 많은 노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달아난 천민들은 서북쪽 국경 지대와 남도 섬으로 숨어들어 가 살았다.

사내종 상돌이를 속량해준다는 속량문기./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많은 양반 또한 노비를 속량했다. 스스로 가난에 빠져 벗어날 수 없는 양반들은 돈을 받고 노비를 풀어줬다. 1709년(숙종 35년) 양반 박상현은 외사촌에게서 샀던 계집종 애임(愛任)을 ‘긴히 쓸 돈이 필요해’ 수소 두 마리와 돈 3냥에 속량했다. 애임은 외사촌이 길거리 떠돌던 아이를 주워다 종으로 기른 여자였다. 그 여자를 박상현이 사서 부리다 속량한 것이다. 1733년(영조 9년) 봄 김씨 성을 가진 주인은 자기네 산소 석물(石物)을 세울 돈이 필요해 사내 종 준석을 50냥을 받고 영원히 속량해주었다. 애임을 속량한 박상현은 ‘본인이 계집종에게 먼저 속량하라고 제안할 정도로’ 돈이 급했다.(전경목, ‘조선후기 노비의 속량과 생존전략’, 남도민속연구 26, 남도민속학회, 2013) 연도 미상인 어느 날 이씨라는 상전은 종 상돌이와 자식들을 속량했다. 가격도 문서에는 없다. 이유는 ‘상돌이의 원통함이 지극하고 나 또한 어기지 못할 명을 따르기 위한 계책으로’였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38046 ‘上典李贖良文記’)

인간이 아닌 삶, 그리고 저항

그렇게 많은 사람이 노비가 되었고, 많은 사람이 양민이 되었다. 노비는 물건이었다. 토지 매매계약서와 노비 매매계약서는 대개 양식이 유사했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7일 박 생원이 자기 노비 임단(任丹)이 가족을 최 생원 집에 팔았다. 식구는 6명이었다. 일괄 가격은 60냥이었다. 그런데 노비 문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뒤에 태어날 아이들(後所生·후소생)과 임단이 배 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 포함.’ 마흔다섯 먹은 여자 임단이는 그렇게 배 속 ‘태(胎)’와 함께 최 생원 집으로 팔려갔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167796-2 ‘朴生員宅奴李長生奴婢文記’) 1723년 5월 1일에는 김상연이라는 가난한 양반이 계집종 넷을 이내장이라는 사람에게 팔았는데, 스물아홉 먹은 이월(二月)이는 ‘임신중(懐孕·회잉)’이라는 문구가 문서에 부기돼 있다.(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문서번호 207769 ‘金尙埏奴婢文記’)

박 생원이 노비 임단 가족을 최 생원에게 판 노비문기. 그때 임단은 임신 중이었는데 문서에는 ‘뱃속에 있는 태(腹中胎·복중태)’도 함께 판다고 적혀 있다.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존엄과 무관한 그 생활을 견디다 못한 자들은 반역을 꿈꾸기도 했다. 1684년에는 서울에서 “우리를 만약 모두 죽이지 못하면 종말에는 너희들 배에다 칼을 꽂고 말 테다”라며 양반을 다 죽이자고 무장투쟁을 계획한 ‘살주계(殺主契)’도 나왔다.(‘연려실기술’36, 숙종조고사본말, ‘난민을 잡아 다스리다’)

노비를 택한 사람과 방조한 정부

성리학 윤리를 법제화한 조선 법률체계에서 스스로를 노비로 파는 행위, 자매(自賣)는 불법이었다. 하지만 윤리가 생존을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많은 사람이 정부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모순 해결을 위해 존엄을 팔고 생존을 택했다. 흉년, 부모 봉양, 빈곤, 채무 그리고 환곡. 자매문기에 나오는 대표적 매매 사유다.(김재호, ‘자매노비와 인간에 대한 재산권, 1750~1905’, 경제사학 38, 경제사학회, 2005) 자매문기[婢文券·비문권]이라는 표준 계약서 양식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노비를 두고 윤리와 현실이 충돌할 때, 조선 정부는 명분을 택했다. 예컨대 이런 일. ‘양구 사람 이만근은 흉년을 맞아 자기 몸을 팔아 부모 봉양 밑천으로 삼았다. 한 달여 만에 그를 산 자가 어질게 여겨 돌아가라고 권했으나 이만근은 굳게 사양하였다.’(1794년 정조18년 7월 16일 ‘일성록’, 김재호, 앞 논문, 재인용) 정조 정부는 스스로를 판 이만근을 효자로 선정하고 그 후손에게 노역을 면제해줬다. 인신매매 사례가 아니었다. 인신매매는 양성화하고 그 몸을 판 사람을 효자로 선정하는, 이 기이함.

 

세습은 법적으로 불법이었다.(1796년 8월 13일 ‘일성록’, 김재호, 앞 논문, 재인용) 하지만 노비계약서인 ‘자매문기(自賣文記)’ 대부분은 ‘영영방매(永永放賣)’라는 조건이 따라다녔다. 영원히 스스로를 팔고 그 후손까지 판다는 것이다.(땅의 역사 267. ‘스스로 노비를 택한 노비 계약 자매문기’ 참조) 노비 세습은 1886년 고종 정부 때 마련된 ‘사가노비절목(私家奴婢節目)’에 의해 금지됐다.(1886년 3월 11일 ‘고종실록’) 그런데 노비를 자청한 자매 노비 본인은 ‘단 하루라도 일을 하면 주인에게 속량을 청할 수 없다’고 규정해버렸다. 주인이 원하지 않으면 양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김재호, 앞 논문)

환부역조(換父易祖)와 화려했던 엄택주

이제 우리의 엄택주 이야기다.

강원도 영월 장릉에 있는 엄흥도 정려각 비석. /박종인

 

도망간 노비 가운데 부(富)를 이룬 자들은 ‘부모 이름을 바꾸고 다른 사람 족보를 위조해 양민 또는 양반 행세를 한다. 족보를 살펴보면 거의 친외가 모두 유학(幼學)이다(左幻右眩而幾皆良丁幼學·좌환우현이기개량정유학).’(1798년 12월 17일 정조 22년 ‘일성록’) ‘유학(幼學)’은 과거 급제나 벼슬 제수 경력이 없는 유생을 뜻한다. 그러니까 국가에 기록이 없는 자들을 골라 자기를 족보에 끼워 신분을 세탁한 것이다. 이렇게 아비를 갈아치우고 족보 위조로 할아버지를 바꿔버리는 행위를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한다. 우리의 엄택주는 역사에 남은 환부역조 대표 사범이다.

조선왕조 역대 과거 급제자 명단인 ‘국조방목’에 따르면 엄택주는 영월 사람이고 1719년 과거 응시 당시에는 강릉에 살았다. 1719년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경상도 영일 현감까지 지냈다. 아비는 엄완이요 할아버지는 엄효, 외조부는 신원종이라는 인물이었다.(’국조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K2-3538)

1745년 3월 7일 사간원 정언 홍중효가 영조에게 충격적인 보고서를 올렸다.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엄택주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1745년 3월 7일 ‘영조실록’)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가짜라는 것이다. 주요 죄목은 ‘환부역조’와 ‘친부모 제사 의무 불이행’이었다.

알고 보니 엄택주는 노비였다.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다. ‘엄택주는 충청도 전의 관아 노비 아들이었다. 어미도 노비였다. 재주가 뛰어나 어릴 적부터 스승 신씨로부터 글을 배웠다. 훗날 “주인집 처자와 혼인하고 싶다”고 스승에게 털어놓자 스승이 크게 꾸짖었다. 이만강은 그 길로 달아나 영월 말단 관리 사위가 되고 스스로 엄흥도 후손이라고 칭하고 이름을 엄택주로 바꿨다.’(남하정, ‘동소만록’, 원재린 역주, 혜안, 2017, p491)

정언 홍중효가 전의에 들렀다가 알게 된 사실이었다. 천민이 신분을 위조한 데다 전의에 있는 친부모 묘소에 단 한 번도 성묘하러 온 적이 없다는 ‘충격적인’ 강상죄(綱常罪)까지 저지른 악질이었다. 서울로 끌려온 엄택주는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흑산도로 유배형을 당했다. 영조가 이리 하교했다. “죽여도 아까울 것 없다 하겠다. 영원히 노예로 삼고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여라.”(1745년 5월 26일 ‘영조실록’) 국조방목에는 ‘삭과를 당하고 관노가 됐다’라 부기됐다.

엄택주가 과거에 붙었다가 신분 위조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격을 박탈당했음을 적어넣은 ‘국조방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가뜩이나 히스테리가 심한 영조였고, 무수리가 낳은 아들이라는 신분적 피해 의식이 심한 왕이었다. 영조는 신분 위조보다 ‘한 번도 그 아비의 무덤에 성묘(省墓)하지 않았음’을 제1의 죄로 꼽았다. 성리학적 질서를 파괴한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엄택주는 이듬해 몰래 서울을 왕래하다 발각되더니(1746년 5월 26일 ‘영조실록’), 9년 뒤인 1755년 반(反)영조 역모 사건인 나주괘서사건 때 주동자 윤지와 편지를 왕래한 사실이 드러나 서울로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엄택주는 “문예(文藝)가 있었음에도 귀양을 갔었기에 원한이 가득했다”고 자백하고는 물고(物故) 됐다. 고문사했다는 뜻이다.(1755년 3월 10일, 3월 12일 ‘영조실록’)

우리는 신분과 계급이 없는 나라 대한민국에 산다. 임신한 몸을 파는 애처로운 임단이도 없고 환부역조하는 이만강도 없다. 그런가?

* 유튜브 https://youtu.be/BaxUIeb5Kgc 에서 동영상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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