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불문학자의 고백 “프루스트 처음 通讀합니다”
학술원 회원 정명환 서울대 교수 독서記 ‘프루스트를 읽다’ 펴내
입력 2021.07.12 03:00
지난 4월 학술원 회원인 정명환(92) 서울대 불문과 명예교수가 딸의 부축을 받으며 서울 서초구 현대문학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손에는 200자 원고지 1200장 분량의 원고를 들고 있었다. 머리말에서 그는 “평생 일종의 부끄러움을 남몰래 간직하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명색이 불문학자, 그것도 현대 불문학 전공자로 통해온 내가 프루스트를 통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말년이 되자, 나는 이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하지 않고는 자괴심 때문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에게 부끄러움을 안긴 책은 20세기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프랑스 문학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자전적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집필 14년, 분량 4000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이다. 정 교수는 2016년부터 소설 독해를 시작했고, 감상을 덧붙이며 원고를 완성해 최근 ‘프루스트를 읽다’를 펴냈다.
2013년 위암 수술로 위 일부를 도려내고 2017년에는 폐암 수술을 받았다. 그는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몸이 약해지니 하루에 책을 읽을 시간이 1시간이었다”며 “컴퓨터로 독후감을 적었고, 서른 살 외손자가 원고를 취합해 교정했다”고 말했다. 흔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번역돼 알려진 소설 제목을 그는 ‘잃었던 때를 찾아서’라 불렀다. “‘시간'은 과학적인 개념이죠. ‘때’는 순간으로부터 장기간까지를 포괄합니다. 프루스트 소설엔 순간적인 이야기도, 긴 이야기도 있어요. 프루스트가 소설을 통해 시간을 찾은 건 아닌 것 같아요.”
찬탄으로 시작했던 독서를, 노 교수는 비판적으로 마감했다. 분석력과 구성력, 감성과 이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작가적 재능에 찬사와 감탄을 보냈지만, 정 교수에게 문학은 스스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일 때 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문학을 자기 혐오와 자기 비판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세계를 향해 저를 내던져 이질적인 것을 만나기 바랐습니다. 그런데 프루스트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거꾸로 세계를 자기 속으로 흡수하죠. 나중에는 그런 태도가 답답해졌어요.” 소설을 쓰면서 프루스트는 과거의 유리한 때만 찾고 불리한 때는 숨겼다는 것이다.
“20년간 들락거린 요양소 생활은 작가 인생의 큰 부분이었을 텐데 소설에선 일언반구가 없어요. 아마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을 겁니다.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서 주인공이 7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는 장면과 아주 대조가 됩니다. 그의 소설은 솔직한 인생 고백이 아닌 픽션입니다.”
90 평생을 문학과 함께 살아온 평론가에게 최고의 작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꼽았다. “이성과 욕망의 싸움, 증오와 사랑, 사랑의 이중성…. 인생의 모든 드라마가 그 속에 있습니다. 모든 인물이 충격을 줍니다.”
정 명예교수는 “이번 책이 유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독자께서 ‘정명환이란 불문학자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비판해주십시오. 이 책으로 독자들도 잃었던 과거를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프루스트처럼 찾지는 말고, 괴로웠던 기억도 한꺼번에 찾으면서 현재에서 소화해나가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