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너무 야해” 1500년 전 신라 토우의 성적 욕망과 쾌락[명작의 비밀㉕]
신동아 2021년 4월호
●당대 신라인 모습 꾸밈없이 담아낸 토우
● 죽은 사람과 함께하는 부장품으로 주로 쓰여
● 토우로 소박하게 신라인 생활상 담아내
● 단순한 형태로 삶과 욕망 내밀히 표현
1926년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서 신라시대 토기와 토우가 대거 발굴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土偶裝飾長徑壺)는 모두 2점이다. 이 가운데 하나는 경북 경주시 계림로 30호분에서 출토된 5~6세기 신라 토기다. 높이 34cm. 항아리의 목 부분엔 5cm 내외의 각종 토우가 붙어 있다. 가야금을 타고 있는 배부른 임신부, 온몸으로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 개구리를 잡아먹는 뱀 그리고 새·오리·거북 등의 토우다.
그 중에도 사랑을 나누는 남녀 토우가 단연 돋보인다. 한 여인이 엉덩이를 내민 채 엎드려 있고 그 뒤로 한 남자(머리와 오른팔이 부서져 있다)가 과장된 성기를 내밀며 다가가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도 적나라할 수 있을까. 그 과감한 표현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여인의 얼굴 표정이다. 왼쪽으로 얼굴을 돌린 이 여인은 히죽 웃고 있다. 보는 이는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는데 1500년 전 신라의 남녀는 남이 보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욕망과 쾌락을 숨기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인지, 능청스러움 혹은 뻔뻔함인지. 신라인들은 왜 저렇게 대담할 수 있을까.
1926년 모습 드러낸 신라 토우
성에 개방적인 신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토우. 사랑을 나누는 연인(왼쪽), 큰 성기를 내놓은 남성을 나타낸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1926년 5월 경주 도심 황남동. 대형 신라 고분 사이에서 인부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경동선(慶東線) 경주역 확장공사에 필요한 흙을 채취하고 있던 것이다. 당초 계획은 고분 주변의 흙을 파서 약 1km 떨어진 경주역 현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땅을 파는 과정에서 소형 고분들이 확인됐다. 고분 내부에서 토기와 토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부들은 조선총독부에 이를 신고했고 조선총독부는 즉각 공식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토우는 대부분 토기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특히 굽다리 접시(고배·高杯) 뚜껑의 손잡이 주위에 많이 붙어 있었다.
공사 도중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낸 신라 토우. 그 발굴 현장은 지금의 대릉원(大陵苑) 내 황남대총 바로 옆이다. 토우와 토우 장식 항아리들은 1926년 7월부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국립경주박물관의 전신)에서 전시되며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 후 1970년대에 경주 황남동과 용강동 지역의 고분에서 토우가 추가로 발굴됐다.
신라 토우는 5, 6세기에 만들어졌다. 크기는 대개 2~10cm 정도. 신라 토우는 토기에 장식물로 붙어 있는 것도 있고,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인물을 형상화한 토우를 보면 바지 저고리 입고 상투 튼 남자, 주름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여자, 사냥하거나 고기 잡는 사람, 춤 추는 사람, 노 젓는 사람, 가야금·비파·피리 등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곡예를 하는 사람, 짐을 지고 운반하는 사람, 출산 중인 사람, 슬퍼하는 사람, 커다란 성기를 드러내놓고 있는 사람, 성행위를 하는 사람 등 무척이나 다채롭다. 저 토우들을 통해 우리는 신라인의 일상과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 보면 동물이나 집, 생활도구 등을 본떠 만든 것도 토우의 범주에 들어간다. 토우의 역사는 길고도 광범위하다. 중국·일본·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석기시대 무렵부터 토우가 등장했다. 고대인들은 다산(多産)이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사람 대신 신(神)에게 제물을 바치기 위한 목적에서 토우를 만들었다. 또는 죽은 자의 영생을 바라며 무덤의 부장품용으로 토우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신석기 시대인 조몬(繩文)시대부터 토우가 만들어졌는데 이 무렵의 토우는 약간 무서운 모습에 신체의 치장이 화려하다. 엉덩이가 큰 여인의 토우는 다산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무서운 얼굴의 토우는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주술용·제의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4~ 5세기 고훈(古墳)시대에 들어서면 하니와(埴輪)라는 독특한 그릇이 나타나는데 그 표면을 다양한 토우로 장식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시황릉의 도용(陶俑) 역시 흙으로 만들어 구운 것이기에 토우에 포함된다. 중국의 토우는 죽은 자의 영원한 삶을 기리는 의미에서 무덤의 부장품용으로 만든 것이 많다.
신라인들의 대담한 성적 표현신라 토우의 다양한 모습 가운데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성적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의 남녀 토우에서 잘 드러나듯 신라 토우의 가장 큰 특징은 대담한 성적 표현이다. 성기를 과장해 표현하거나 성적 욕구를 과시하고 남녀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토우가 상당히 많다. 힘껏 껴안고 있는 남녀, 한 몸이 되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있는 남녀, 성기와 가슴이 과장된 남녀 등. 절제와 감춤의 미학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라 토우의 이러한 면모는 파격이자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500년 전 어떻게 이런 표현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우선 토우들이 무덤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토우는 무덤의 부장품이었다. 성은 쾌락이고 욕망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탄생으로 연결된다. 성기를 과장하거나 성 행위를 드러낸 모습으로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넣었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생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 문화에서 이러한 성적인 표현은 대체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온 이 같은 문화가 신라에도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토우를 볼 때마다 의문이 남는다. 성적인 표현을 온전히 ‘다산과 풍요와 영생에 대한 갈망’으로만 해석해야 할까. 그렇다면, 왜 고구려 백제 가야에서는 이런 모습의 토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성적 표현의 토우가 왜 이렇게 유독 신라에서 성행한 것일까.
이 대목에서 신라인들의 ‘개방적인 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의 지증왕 대목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왕은 음경(陰莖)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나 돼 훌륭한 배필을 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삼도(三道)에 보내 배필을 구했다.…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된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 그 여자를 궁중으로 들여 황후로 봉하니….” 지증왕의 음경이 한 자 다섯 치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 크기가 40cm가 넘는다. 참 재미있는 기록이다. 성기를 과장해 표현한 토우를 보면 지증왕에 관한 이 기록이 떠오른다. 어쩌면 이렇게 상황이 비슷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이 신라 문화의 한 단면이 아니었을까.
사실, 신라의 성 문화는 대담하고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증왕 얘기도 그렇고, ‘화랑세기’ 등에 나오는 신라인들의 근친혼 얘기도 그렇다. 신라 화랑들이 여자 못지않게 예쁘게 치장하고 화장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황들은 신라가 고구려·백제에 비해 성이 개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신라의 성 문화가 토우의 대담한 성적 표현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일상과 낭만 그리고 미니멀리즘
멧돼지를 사냥하는 사수(射手)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앞서 말했듯 신라 토우에는 다양한 일상이 담겨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짐을 나르는 모습, 말 탄 모습, 노 젓는 모습, 사냥하는 모습 등등. 토기 뚜껑에 붙어 있는 활 쏘는 사람 형상도 인상적이다. 그 앞에 어미 멧돼지와 새끼 멧돼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은 사냥을 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활 쏘고 사냥하는 모양새가 단순하지만 힘 있게 표현돼 있다. 활 쏘는 사람이 메고 있는 화살통이 엉덩이까지 내려온 모습도 흥미롭다.
신라 토우에서는 모자, 바지. 치마 등 신라인의 복색도 볼 수 있다. 인물들의 얼굴 표정도 무척이나 다채롭다. 그 모습과 표정은 단순하지만 생생하게 다가온다. 할아버지 얼굴 토우를 보자. 쓱쓱 주무른 흙덩이에 눈과 입을 슬쩍 파놓고 수염 몇 가닥 그어 노인의 얼굴을 완성했다. 단순한 형태의 토우지만 노인의 푸근한 얼굴이 그대로 살아서 전해온다. 노래하는 토우, 연주하는 토우도 흥겹고 익살맞은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약간 치켜든 채 목청껏 노래 부르는 모습, 엉거주춤 서서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 등 신라인의 일상이 그대로 묻어난다.
신라 토우는 적나라한 성을 표현한 것이든 일상을 표현한 것이든, 동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든 하나같이 단순하다. 신라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을 쓱쓱 손질 몇 번으로 완성했다. 몇 번 주무르고 손톱으로 구멍을 내어 눈과 입을 만들어 감정을 담아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배 모양 토기에 붙어있는 나체 남성 토우는 쓱 내민 혓바닥 하나로 노젓기의 피곤함을 보여준다.
이렇게 신라인들은 단순함 속에 그 특징을 잘 드러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표정과 내면은 어떠한지 등을 최소한의 표현으로 절묘하게 보여준다. 얼굴만으로는 남녀 구분이 잘 되지 않지만 가슴이나 엉덩이 등을 과장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여성임을 나타낸다. 얼굴에 표정이 없을지라도 상체를 쪼그려 엎드린 모습이나 머리를 푹 숙인 자세만으로 주인공이 슬픔에 빠져 통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라 토우의 이런 특징을 두고 미니멀리즘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5~10cm 정도로 작지만 생명력이 넘친다. 단순한 형태에도 활력이 느껴지는 표현은 삶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토우는 결국 삶에서 나온 것이다. 삶에 기초한 미니멀리즘. 토우의 또 다른 미학이 아닐 수 없다.
삶과 죽음에 관한 철학적 사유
주검 앞에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왼쪽)과 출산 중인 여인의 모습을 빚은 토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하찮아 보이는 저 작은 인형들. 토우는 한반도 고대국가 가운데 신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토우를 만들어 무덤에 집어넣는 건 신라의 독특한 문화였다. 신라 토우에는 신라인의 일상과 풍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탄생과 죽음에 관한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신라인들은 탄생의 순간과 죽음의 순간을 모두 토우에 담아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묻었다. 신라인들에게 삶과 죽음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탄생이나 죽음과 관련해 토우에 나타난 표정과 몸짓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뚜껑 위에 드러누운 채 다리를 벌리고 있는 배부른 여인, 출산 직전 또는 출산 중인 여인, 시신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그 모습은 강렬하며 우리 삶을 돌아보게 한다.
출산 중인 여인 토우는 입과 눈을 과장되게 표현함으로써 출산의 고통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출산은 인간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성(聖)스러운 일이다. 동시에 고통의 과정이면서 내밀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출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해 표현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신라인들은 달랐다. 출산의 장면을 감춤 없이 드러냈다. 그 과감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신선한 감동을 준다.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토우를 보자. 사실, 이것이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지 객관적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본다. 어느 토우의 경우, 여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앞의 작은 천 조각은 죽은 이의 얼굴을 가린 것으로 추정되고, 여인이 고개를 숙인 채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죽은 자의 어머니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으리라.
작은 흙 인형을 통해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니, 그것은 분명 철학적 성찰의 과정이다. 또한 단순한 흙 인형의 차원을 넘어선다. 용도로만 따져보면 무덤의 부장품이겠지만, 철학적 성찰이라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그것은 보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 토우는 단순한 부장품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신라 토우를 볼 때마다 궁금증이 남는다. 성적 표현과 인간적인 일상의 모습들. 그 두 측면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전혀 다른 세계로 느껴진다. 그 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국보 제195호 토우 장식 항아리 속의 인물들을 다시 보자. 임신부가 가야금을 타고 있고, 그 옆에선 두 남녀가 적나라하게 성행위를 하고 있다. 엎드려 있는 여성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낯선 풍경이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1500년 전 그들은 아무렇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다. 신라인들에겐 간극이 아니라 풍요로운 공존이었다.
신라 고분에서는 금관, 금귀고리, 금제 허리띠, 둥근 고리 큰칼(환두대도·環頭大刀), 수입한 로마 유리그릇 등 화려하고 값비싼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우리는 그런 것들에 익숙하다. 그런 것들에 비하면 토우는 작고 초라하고 볼품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라 토우 앞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보고나서 돌아서려 하면 다시 발길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거기 신라인들의 욕망과 쾌락, 다산과 영생에 대한 기원,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숨 쉬고 있다.
신라 토우의 표정과 몸짓. 그것은 우리의 판에 박힌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놓는다. 신라 토우를 보면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저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그들은 표정과 몸짓만으로 그들의 삶과 내면과 욕망을 웅변하고 있다.
1926년 당시 일본인 발굴자의 증언에 따르면 “대체로 항아리와 굽다리접시 등의 어깨, 목 또는 뚜껑에 붙어 있었고, 더러 그릇 받침에도 부착돼 있던 것을 발굴 당시 뜯어낸 것”이다(‘신라토우, 영원을 꿈꾸다’, 국립중앙박물관, 2009). 토기에 붙어 있던 것을 뜯어냈다고 하니, 그건 분명 유물 파괴 행위였다. 토우는 아주 많았고, 많다 보니 발굴과정에서 마구잡이로 수습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서글픈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토우들은 살아남아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신라 토우가 모습을 드러낸 지 100년이 돼 간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면,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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