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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3. 25. 19:26

[박종인의 땅의 歷史]

아들을 인질로 보내라 하자 판서들이 앞 다퉈 사직하였다

252.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17세기 조선왕국
백성은 전쟁 구렁텅이
정권은 일신 안녕 추구

1627년 정묘호란 때
인조, 진짜 동생 대신
가짜 왕제(王弟) 보내서
위기 모면

병자호란 때도 가짜 동생 보냈다가
국가 존폐 위기 맞아

백성은 인질로 끌려가는데
고관대작들은
아들 인질 피하려
줄줄이 사표 대행진

’더러운 왕' 못 섬기겠다는
’더러운 신하들'의 위선

’빗자루 쓸 듯 사라진 기강'

병자호란 때 조선군 200명이 전멸한 남한산성 '전승문'./박종인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3.24 03:00 | 수정 2021.03.24 03:00

‘나라는 중국에 의해 난장판이다. 국제 정세는 위기다. 국민은 도탄에 빠졌다. 권력자들은 국가 생존 대신 일신 안녕을 걱정하며 산다. 나라와 국가를 입에 달고 살지만 다 가짜다.’ 위선적 도덕주의자들이 망가뜨린 17세기 조선 왕국 이야기.

1895년 갑오개혁 정부는 인조가 항복한 자리에 있던 잠실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자빠뜨리고 청 사신을 맞는 무악재 영은문도 철거해버렸다. 2년 뒤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는 영은문 기둥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비석을 때려눕혔다고 역사가 스스로 바뀔 리는 만무했다. 1916년 촬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252. 병자호란과 위선의 계보 ①도덕주의 권력의 위선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1623년 음력 3월 13일 서인 세력이 능양군 이종을 앞세워 광해군을 몰아냈다. 쿠데타 당일 능양군은 경운궁(덕수궁)에 유폐된 인목대비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았다. 세 무리가 목적이 다 달랐다. 능양군은 왕권이, 서인은 권력이, 광해군에 의해 폐위되고 아들까지 살해된 인목대비는 광해의 목이 목적이었다. 폐모살제(廢母殺弟·인목왕후 폐위와 동생 영창대군 살해)의 패륜과 사대 본국 명나라에 대한 배신 심판 같은 거창한 목적은 명분에 불과했다.

목적이 죄다 달랐으니 정권도 엉망진창이었다. 그 권력이 초래한 전쟁이 두 차례 호란(胡亂)이었다. 1636년 3월 부제학 정온이 이리 상소하였다. “장수들은 농장 감독이나 하고 있고 훈신들은 자기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 지킬 계획은 없다.”(1636년 3월 2일 ‘인조실록’) 정묘호란(1627)에 이어 다시 피비린내를 감지한 늙은 대신의 경고였다. 경고는 먹히지 않았다. 그해 겨울 전쟁은 터졌고, 후세 모두가 알다시피 47일 만에 조선은 조목조목 창피한 절차를 통해 패했다.

그리고 근 3년 뒤인 1639년 11월 28일(양력 1640년 1월 1일) 인조가 항복한 서울 잠실 삼전도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가 섰다. 1895년 갑오개혁 때 조선 정부는 비석을 자빠뜨리고 청 사신을 맞던 무악재 영은문도 철거해버렸다. 2년 뒤 서재필이 이끄는 독립협회가 영은문 기둥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 대(對)중국 종속과 사대(事大)는 청산됐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위선(僞善)과 입만 살아 있는 도덕은 청산할 수 없었다. 그 기록을 본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에는 출입문이 네 군데 있다. 북문은 ‘전멸(全滅)의 문’이다. 사령관 김류가 병사들을 성 밖에 매복한 청나라 병사들 가운데로 내몰아 200명을 몰살시킨 문이다. 그런데 ‘전승문(全勝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남한산성 안내문’에 따르면 문은 인조 때 만들었고, 이름을 붙인 왕은 정조다.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고 정신승리 혹은 위선의 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박종인

위선의 서막 – 가짜 왕족

1627년 2월 정묘호란 종전 후 청(후금)은 인조 동생 한 명을 볼모로 달라고 요구했다. 인조와 관료들은 정교하게 계획을 꾸몄다. ‘종실 가운데 어린 사람을 가짜 동생으로 만들자.’ 처음에는 이계선이라는 인물의 첩 소생 이보(李溥)를 왕제(王弟)로 둔갑시켰다. 이름을 부(傅)로 바꾼 뒤 수성군(遂成君) 군호까지 내렸다. 이부는 찾아온 관리에게 “본시 천민인데 어찌할꼬”라며 울었다.(1627년 2월 12일 ‘인조실록’) 들통이 나면 경을 칠 일이었으니 수성군은 없던 일이 됐다.

하여 이튿날 인조는 종친 원창부령 이구(李玖)를 동생으로 둔갑시켰다. 종친부 종5품 부령(副令) 이구는 하루아침에 군(君)이 되었다. 9촌 아저씨뻘인 이구는 조카의 동생이 되었다. 인조는 원창군에게 예모 강습을 단단히 시키라 일렀다. 조선 정부는 두 달 뒤 ‘이러이러하여 이구를 왕제로 만들어 오랑캐와 화친했으니 천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 애처롭게 여기시라’라고 명나라 황실에 보고서를 보냈다.(2월 14일, 4월 1일 등 ‘인조실록’) 가짜의 서막은 왕이 그렇게 열었다.

또 가짜 왕제

‘살려는 마음만 있고 죽음으로 지킬 계획은 없는’ 세월이 10년 흘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터졌다.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조선 조정에 청나라 군사가 협상을 제안했다. 협상 파트너로는 반드시 왕제(王弟)와 대신(大臣·정승)이 나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인조 정부는 ’10년 무탈'을 보장해준 가짜 왕제 원창군을 떠올렸고, 실행에 옮겼다. 이번에는 종친 중에 정4품인 능봉수(綾峯守) 이칭을 정1품 능봉군으로 격상시키고 왕의 동생으로 둔갑시켰다. 역시 대신으로 둔갑한 형조판서 심집과 동행해 산성 아래에서 종전협상을 벌였다. 청나라 장수 마부대가 물었다. “또 가짜 아닌가?”

가짜 대신 심집이 느닷없이 이리 말했다. “나는 평생 충과 신을 말했다. 오랑캐라도 속일 수 없다. 나는 대신이 아니요 능봉군은 왕제가 아니다.” 분기탱천한 마부대는 통역관 박난영을 처형하고 왕의 아들, 세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나만갑, ‘병자록’, 1636년 12월 16일 ‘인조실록’) 이게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가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 원인이었다. 가짜의 2막도 각본과 연출은 왕 인조였다.

남한산성 전승문./박종인

더러운 군주, 상처받은 새

명분을 입에 달고 사는 서인들은 오랑캐에게 항복한 왕을 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조를 이렇게 불렀다. ‘더러운 왕(汚君·오군)’.

 

‘사대부가 초야에 물러나면 더러운 임금 섬기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하고(恥事汚君·치사오군) 유생이 과거 보러 나아가려 하지 않으면 하찮은 조정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한다(恥入小朝·치입소조). 다들 일망타진의 변이 일어날까 의심한다. 아아, 혼조(昏朝·광해군) 때에 실컷 듣던 말이다.’(1637년 8월 12일 ‘인조실록’ 대사헌 김영조 상소)

서인세력 힘으로 오른 왕위였다. 그래서 인조는 만사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관료들이 과하게 시비를 걸면 “위를 능멸하는 풍조가 생겨 군상(君上)에게 반드시 꼬치꼬치 따지며 대든다”고 주장해보기도 했다.(1629년 7월 4일 ‘인조실록’) 하지만 인조는 상소에 대한 답변은 내시에게 베껴 쓰게 하고 초안은 물항아리에 담가 찢어 뒤탈을 남기지 않았다. 하루 종일 찡그리고 웃는 것도 함부로 하지 않았다.(이긍익, ‘연려실기술’23 인조조 고사본말)

‘항복한 군주’와 ‘부도덕한 위선’은 그를 끝까지 옥좼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활에 상처받은 새(傷弓之鳥·상궁지조)’라 불렀다.(1643년 10월 11일 ‘인조실록’) 왕이 그러할진대 관료들은 말할 것 없었다. 격(格)이 추락했다. 영(令)도 무너져갔다.

더러운 관료, 그들의 위선

항복 조건은 잔인했다. 형언하기 어려운 금은보화는 물론 소현과 봉림 두 왕자 부부도 끌려갔다. 수많은 백성도 끌려갔다. 그 숫자가 50만명(최명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 인구가 200만명 안팎이었음을 감안하면(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 2019, p62) 이는 불합리한 추정이다. 어찌 됐든 ‘너무나도 많은 조선인들이’ ‘하루 종일 수백씩 열 지어 끌려가는 것이 지속됐고, 적진(敵陣) 가운데 조선 포로가 절반인데, 뭔가를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채찍으로 때렸다.’(나만갑, ‘병자록’)

청 황실은 삼공육경(三公六卿), 현직 정승과 판서 아들 또한 인질로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저항할 싹을 제거하겠다는 뜻이다. 왕의 아들 며느리들이 끌려간 마당에 성리학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요구였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때 육경(六卿)이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고 하자 서로 판서 보직에서 교체되려고 잇달아 꾀하였다. 임금이 인질을 들여보낼 시기를 의정부 정승들에게 물었으나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다 분개하였다.’(1637년 8월 14일 ‘인조실록’)

1639년 1월 29일 형조판서에 임명된 홍보가 즉각 사표를 던졌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자 홍보는 출근을 거부했다. 4월 21일 비변사에서 홍보를 근무 태만을 이유로 파면을 요청했다. 인조는 “아들 인질을 거부하는 것”이라 의심했다.(1639년 4월 21일 ‘인조실록’)

그해 11월 5일 형조판서 민형남이 병이 들었다며 사표를 냈다. 민형남은 일찌감치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도록 여기저기 스스로 해직을 민원하고 있었다.(1639년 11월 5일 ‘인조실록’) 이듬해 4월 9일 인조는 퇴직한 민형남을 다시 형조판서에 임명했다. 민형남은 아예 집에 드러누워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헌부가 인조에게 고했다. “임금을 무시하고 법을 멸시함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1640년 4월 9일, 5월 12일 ‘인조실록’)

1641년 11월 2일 예조판서 윤의립이 파직됐다. 그 또한 아들을 인질로 보내지 않도록 ‘늙고 병들었다’며 해임을 요구했다. 윤의립은 파면됐고 아들은 인질 신세를 면했다.(1641년 11월 2일 ‘인조실록’) 조정에는 ‘기강이 땅을 쓸어낸 듯이 없어져 육경(六卿) 자리가 장차 비게 되었다.’(1639년 2월 4일 ‘인조실록’)

남한산성 전승문 현판./박종인

훗날 돈 많고 권세 많은 이들은 포로가 된 가족을 속환금을 내고 귀국시켰다. 1637년 7월 좌의정 이성구가 인질로 간 자기 아들을 데려올 때 1500금(金)을 치렀다. 거금이었다. 이후 속환가(贖還價)가 매우 비싸져서 가난한 백성이 돌아올 희망을 아주 없어지게 하였다.(1637년 7월 7일 ‘인조실록’) ‘돈 없고 빽 없는’ 백성은 가족을 포기했다. 오군(汚君)을 들먹이며 백성을 팽개친 더러운 신하(汚臣·오신)들 덕택이다.<다음 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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