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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1. 4. 28. 13:17

[박종인의 땅의 歷史]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

256.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①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대한제국 초대황제 광무제 고종이 만든 경운궁 석조전.

박종인 선임기자

입력 2021.04.21 03:00 | 수정 2021.04.21 03:00

 

서울 광화문광장에 공사가 한창이다. 명분은 ‘일제에 의해 왜곡된' 북한산~관악산 국가 상징축과 역시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 육조거리 복원이다. ‘국가 상징축’ 위에 있는 한강대교 가운데 노들섬에는 이미 공연장인 라이브하우스가 들어섰다.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가는 한강대로에는 미래를 상징하는 국가상징거리 조성이 예정돼 있다. 대한제국 황궁 덕수궁 또한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과연 광화문광장은 원래대로 복원 중인가. 과연 한강대로는 미래를 상징하는가. 과연 덕수궁과 대한제국은 제대로 복원 중인가. 100년 전 그때로 한번 돌아가서 과거와 현재를 직시(直視)해보도록 하자.

1897년 10월 12일 조선 26대 국왕 고종은 소공동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국 대한제국을 건국했음을 하늘에 고했다. 고종은 황궁인 경운궁(덕수궁)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비롯해 황궁에 걸맞는 전각들을 건축했다. 그때 대한제국 황도 한성은 대대적인 변신을 한다. 현재 서울 광화문광장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복원작업은 100년 전 그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 프로젝트다. 원구단(圜丘壇)은 ‘환구단’으로 표기되지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원리에 따라 ‘원구단’으로 읽어야 옳다.

[박종인의 땅의 歷史] 256. 광화문광장 100년 이야기 ①광무제 고종의 한성 개조사업

 

고종이 황제가 되던 날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초대 황제 광무제가 황위에 올랐다. 광무제 고종은 이날 오후 3시 황궁(皇宮) 경운궁(현 덕수궁)을 나와 동쪽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황제가 되었다. 여드레 뒤인 10월 20일 1년 동안 파천했던 러시아 공사관에서 궁인 엄씨가 잉태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은(垠), 훗날 영친왕이다. 이틀 뒤 왕자를 낳은 궁인 엄씨는 귀인(貴人)으로 봉작됐다.

11월 21일에는 을미사변 이후 2년 동안 미뤄왔던 왕비 민씨, 명성황후 국장이 치러졌다. 상여는 경운궁 인화문을 나와 새로 만든 길을 따라 황토현으로 북상한 뒤 종로를 지나 홍릉으로 떠나갔다.

‘독립신문’ 발행인 서재필에게 제국 선포는 반가운 일이었다. 서재필은 1884년 그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칭제건원은 독립국가 조선이 입헌군주제를 통한 개혁 시발점이었다. 독립신문은 “조선이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만드사”라고 찬송했다.(1897년 10월 14일 ‘독립신문’) 천제 이튿날 황제가 선언했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겠노라(欲革舊而圖新·욕혁구이도신).”(1897년 10월 13일 ‘고종실록’)

서울 소공동에 있는 원구단 황궁우. /박종인

 

무척 조급했던 나날들

 

이리도 성대하게 진행된 제국 선포였지만, 고종은 이상하리만큼 조급했다. 황제 등극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마지막 의식을 위한 장소는 결정되지 못했다. 제국 선포를 20일 남긴 9월 21일 의전 담당관인 장례원경 김규홍이 “천제 장소를 정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리고 10월 1일 고종은 청나라 사신 숙소인 옛 남별궁 자리에 원구단을 지으라고 명했다.(이상 ‘고종실록’) 공사는 10월 7일에 시작돼 닷새 만에 선포식에 맞출 수 있었다.

조선 창업 500년 만에 올리는 천제는 그렇게 급하게 준비됐다. 가톨릭 조선교구장 뮈텔은 이렇게 기록했다. ‘조선 왕이 천제(天祭) 장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옛 남별궁 경내에서 밤낮으로 일을 하고 있다. 웃음거리다!’(‘뮈텔주교 일기’2, 천주교 명동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3, p211) 대한제국 정부는 제국 선포 다음날에야 한성 주재 외교관을 불러 이를 통보했다. 뮈텔은 “일본을 제외하고는 승인을 서두르지 않기로 한 듯하다”고 기록했다.(앞 책, p25)

천지신과 태조고황제 이성계 신위를 모실 황궁우(皇穹宇)는 아예 만들지도 못했다. 황궁우는 이듬해 9월 3일 착공해 1899년 12월 완공됐다. 그나마 신위를 넣는 감실(龕室)도 없이 비어 있었다. 감실은 고종이 강제 퇴위당한 뒤인 1907년 12월에야 황궁우에 들어섰다. 신이 기거하지 않는 건물이지만, 황궁우는 3층 높이를 통해 황국의 위엄을 마음껏 과시했다.(이욱, ‘대한제국기 환구제에 관한 연구’, 종교연구 30, 한국종교학회, 2003)

1896년 2월 고종이 경복궁에서 피신했던 러시아공사관. 지금은 망루만 남아 있다./박종인

 

예정됐던 황궁, 경운궁

황궁이 있으면 황성이다. 황제가 살면 그곳이 황궁이다. 1896년 2월 11일 조선 왕조 법궁인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을 때부터 고종은 경복궁으로 복귀할 생각이 없었다.

파천하던 날 왕태후인 헌종 비 효정왕후와 왕세자빈 민씨는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갔다. 석 달 뒤인 5월 16일 고종은 경운궁으로 가서 일본 공사 고무라 주타로를 접견했다. 7월 16일에는 또 경운궁에서 일본 특명전권공사 하라 다카시를 접견했다. 8월 10일 고종은 “여러 임금이 계셨던 경운궁을 수리하라”고 명했다. 8월 31일 그는 자기 초상화를 경운궁으로 옮기라 명했다. 9월 4일 역대 왕 초상화들과 왕비 민씨 관을 경운궁으로 옮겼다. 10월 31일 고종이 선언했다. “왕들 초상화가 있는 진전과 왕비 관이 있는 빈전이 경운궁에 있으니 환궁은 당연히 경운궁이다.”(이상 ‘고종실록’) 그리하여 이듬해 2월 20일 고종은 1년 전 그가 떠나온 경복궁을 버리고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한 달 뒤인 3월 15일 영국인 브라운이 통역관 최영하와 함께 고종을 알현하고 경운궁 지형을 측량했다.(1897년 4월 6일 ‘독립신문’) 목적은 석조전(石造殿) 건축이었다. 석조전 공사 와중인 1901년 황제 고종은 중화전 건축을 명했다.(‘중화전영건의궤’ 1901년 7월 13일 조칙, 김해경 등 ‘덕수궁 석조전 정원의 조성과 변천’, 한국전통조경학회지 33집 3호, 한국전통조경학회, 2015, 재인용)

제국을 선포하던 해 발의된 석조전은 제국이 멸망하고 두 달 지난 1910년 10월 완공됐다. 황궁우에 신들이 기거하지 못했듯, 황제는 이 서양식 궁전에 살아보지 못했다.

석조전을 발의했던 브라운은 대한제국 총세무사였다. 그가 근무하던 해관(海關)은 경운궁과 미국 공사관 사이에 있었다. 북쪽으로는 해관 관사를 비롯한 다른 해관 건물 부지가 있었다. 제국 황궁인 경운궁은 이 부지를 인수해 그곳에 돈덕전을 지었고 미 공사관 서쪽에는 중명전을 지었다. 총독부에 의해 철거돼 어린이 놀이터로 변했던 돈덕전은 현재 복원 중이다.

1840년 김정호 수선전도(부분). 경복궁과 종묘(위 붉은 색), 경희궁(파란색) 및 육조거리와 종로, 남대문로와 남대문은 있지만 경운궁(덕수궁, 보라색)은 존재가 미미하다. 육조거리 남쪽 황토현에서 남대문까지 뻗어 있어야 할 지금의 태평로 길도 보이지 않는다.

 

황제의 황성(皇城) 개조 계획

경운궁은 동과 서로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됐다. 동쪽으로는 원구단을 향해 뻗어나갔다. 서쪽 영역은 근대 서양식 건물로 채워졌다. 석조전은 물론 또 다른 양식 건물인 구성헌을 궐내에 소유했고 담 하나 너머 돈덕전까지 가지게 됐다. 그리고 경운궁 북서쪽에는 역대 국왕 초상화를 모신 선원전을 건설했다.

경운궁으로 환궁을 결정하기 한 달 전인 1896년 9월 29일 고종은 ‘내부령 9호’를 포고했다. 현재 세종대로 사거리 황토현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거리와 남대문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남대문로 정비 계획이다. 이미 을미사변 전 갑오정부에 의해 입안됐던 이 치도(治道) 계획은 미국 공사관에서 근무했던 한성부윤 이채연이 주도했다. 1896년 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인 비숍은 “4개월 만에 극동에서 제일 지저분했던 도시가 제일 깨끗한 도시로 변모 중”이라고 했다. (이사벨라 비숍,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인화 역, 살림, 1994, p497)

1897년 제국 선포 직후 고종은 예산을 배정해 원구단 옆으로 소공로를 신설하고 종로 청진동과 외국 공관이 밀집한 정동길도 정비했다. 한성 성곽 바깥인 용산도 정비됐다. 남대문~석우(石隅·현 삼각지 부근)~청파역~용산에 이르는 길도 정비 구역에 포함됐다.

그런데 이 정비 계획에 들어 있는 ‘용산(龍山)’은 지금 용산역이 있는 용산이 아니다. 현재 용산은 모래사장이 대부분이라 사평(沙平)이라 불렸다. 주민이 살고 집이 몰려 있던 옛 용산은 이보다 서쪽, 군자감 창고가 있는 마포 인근이었다. 위 치도 계획에 있는 청파역~용산 구간은 현재 서울역~한강대교 구간과 전혀 다른 별개다.

용산포구는 한성과 제물포를 오가는 물류 집산지였다. 1892년 제물포에 설치된 조폐소 전환국의 화폐 또한 이곳으로 들어왔다. 전환국은 1900년 군자감 창고 자리로 이전했다. 1899년 고종은 전차도 신설했다. 서대문에서 민비가 묻힌 홍릉 앞 청량리까지 개통됐던 전차는 1901년 1월 옛 용산까지 노선이 확장됐다. 광화문 앞 육조거리를 중심으로 한성 성곽 내부에서 왕조 500년 동안 유지됐던 도시 구조는 혁명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21세기 덕수궁을 지키는 대한문 수문장들. 서울광장 건너 건물 사이로 원구단 황궁우가 살짝 보인다./박종인

 

무엇을 어떻게 왜 복원하는가

그 혁명적으로 변신한 도시, 100년 전 그 역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식민시대가 그 대지를 덮었고 전쟁이 그 대지를 파괴했다. 언제 어디까지 복원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 광무제 고종은 제국을 선포하면서 “낡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도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는 1894년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탈여하는 권한이 바로 군주권”(박진철, ‘고종의 왕권 강화책 연구’, 원광대학교 사학과 박사논문, 2001, p175)이라고 주장했다. 제국 선포 3년 전이다.

변화된 서울 중심가 모습에 놀랐던 비숍 또한 ‘(러시아공사관 피난 생활에서) 자신이 안전함을 확인한 왕은 고질적인 인습으로 되돌아갔다’고 기록했다. 그가 시도한 한성 개조 계획은 황궁 확장과 황궁을 중심으로 한 전근대적 도시 재편 작업이었다. 황제는 1898년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며 “대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 황제가 살았던 황궁 경운궁과 그 주변, 그리고 광화문광장과 한강으로 뻗어나간 저 길에서 무엇을 복원할 것인가.<다음 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