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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베이비박스 2019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3. 4. 01:35

< 나호열 시집 안녕, 베이비박스해설>

 

시간에 대한 사유와 사이의 미학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며

 

시인이 시집의 해설을 부탁하면서 내게 마지막 시집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했다. 시들을 읽으면서 마지막이라는 이 슬프고도 단호한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의 모든 시들에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듯했다.

꼭 마지막이라는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이 마지막 시간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다. 시간은 피할 수 없고 또 거역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이 마지막이 언젠가는 오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사라질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이 사라질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자신의 욕망을 키운다. 키운 욕망을 채우고 또 채울수록 자신의 삶이 확대되고 연장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완전히 채울 수 있는 욕망은 없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삶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호열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은 시간과 이 시간 속에서 더욱 간절해지는 인간의 욕망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 준다. 그의 시들을 읽으며 그의 언어가 다시 불러내는 시간 속의 여행을 해보도록 하자

 

2. 시간에 대하여

 

우리의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젊은 시절의 시간과 늙어서의 시간은 그 속도가 다르다. 젊은 시절에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앞으로 밀려드는 시간이 그에게는 더 힘들고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은 밀도가 높고 그 시간을 헤쳐 가는 데에는 많은 힘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은 훨씬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이 들어 느끼는 시간은 성긴 밀도를 가지고 있다. 일과 일 사이에는 공극처럼 빈 시간이 흐르고 앞에서 마지막 시간이 지친 삶을 끌어당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시간이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시인은 어느 날 문득 느껴지는 이 빠른 시간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아침에 아내는 국수를 삶았다

이가 아픈 남편은 아무 말 안했다

후르륵 국수 가락이 목으로 넘어가는데

손가락에 관절염이 온 아내는

연신 헛가락질을 하고 있을 때

남편은 속으로 많이 늙었네

목구멍이 간질거릴 때

늙은 아내가 활짝 꽃 피었다

함박꽃이 웃었다

 

많이 늙었네

 

             - 함박꽃전문

 

늙음을 참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국수를 먹는 일만큼 쉬운 일이다. 흔히 국수를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으로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는 그 긴 국수가 쉽게 넘어간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얼마나 늙음이 빨리 와 있는가를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니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슬프기도 하다. 그 슬픔은 쉬운 국수 먹기마저 쉽게 할 수 없는 아내의 관절염 걸린 손가락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 슬픔은 다시 함박꽃으로 활짝 피어난다. 함박꽃은 작약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마지막 찬란함을 보여주는 것처럼 화려하면서도 처연하다. 시인은 이 환한 아름다움 속에서 늙음의 슬픔을 보고 반대로 늙음 안에서 화사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하지만 그것은 곧 져야 할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꽃처럼 사라질 슬픔을 내재한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시간은 이 마지막 늙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렇듯 이 시는 늙음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간은 완벽히 수치화되어 존재한다. 꼭 마르크스의 이론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모든 것에는 이 수치화된 시간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가 받는 월급에도 우리가 사는 물건에도 이 수치화된 시간이 가격이라는 이름을 달고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 삶이란 불가능하다. 나의 삶은 모두 이 수치화된 시간의 규칙에 의해 규정되고 조절되고 또 예정된다.

 

열두 살 손녀가

삼십년 뒤엔

뭘 하고 있을까

헤아려 보고 있는 동안

벚꽂 잎이 와르르

웃음인지

울음인지

흩날리고 있었다

 

            - 벚꽃 엔딩전문

 

시인은 손녀를 데리고 봄날 벚꽃 구경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 행복을 만끽하지 못하고, 아니 어쩌면 더 만끽하기 위해 미래를 생각한다. 그런데 그 미래의 시간에는 만개하다 흩날리며 지는 꽃잎처럼 기쁨과 슬픔이 한꺼번에 존재한다. 요즘말로 하면 웃픈상태인 것이다. 30년 후 한참 장년기의 손녀의 삶이 행복했으면 하는 기대와 그것마저 시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바로 숫자이다. 시인은 열두 살이라는 손녀의 나이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고 또한 미래의 어느 날도 삼십년 뒤라는 숫자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시인이 느끼는 주관적 시간인 카이로스의 시간마저 절대적이고 수치화된 크로노스의 시간의 언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음을 방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 손녀의 나이를 열둘이라는 숫자로 환기해야 하고 미래의 어느 날도 30년이라는 숫자가 주어져야 상상된다는 것은 우리가 철저하게 수치화된 시간에 적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웃기만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 준다. 이 절대적인 수치화된 시간이 지금 내 앞에 가로놓여 있고 아직 미래가 창창한 젊은 손녀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벚꽃의 화려함은 그 자체가 이미 슬픔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 된다. 벚꽃이 엔딩과 함께 올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다음 시에서는 이 슬픔의 근원이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번번이 내가 쏘아올린 화살은
과녁에 닿지 못하고
파랑새가 되어 날아갔는데
이제는 활도 화살도 없이
저 홀로 타면서
뜨거워지지 않는 저녁노을 가까이
몸을 기대어
이곳저곳에서
속삭이는 파랑새 날갯짓을 품는다
놀라워라
햇살이 비껴간 그늘 한 구석에
떼구르르 구르면
지옥에라도 닿을 듯한 비탈길에
놀라워라
내가 쏜 화살들이
저마다 무리지어 피어 있다니
살은 사라지고
화만 활짝이다니

 

                - 만항재에서 파랑새를 만나다전문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아름답고도 울림이 있는 언어로 쓴 작품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시인은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화살처럼 빠른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특히 시인은 화살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길면서도 또한 짧은 시간들을 생각하고 그 시간이 만든 지금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그러면서 화살의 을 동음이의어의 묘미를 살려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이 시에서 화살의 는 꽃이고 불이며 또 심화, 즉 가슴 속의 한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의 시간들은 과녁에 닿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파랑새처럼 희망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년이 된 지금의 시간은 활도 화살도 없이 / 저 홀로 타는 저녁노을과 같이 저무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애달픈 시간을 아쉬워하거나 허망하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헛것인지만 알았던 과거 시간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꽃이 되어 피어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것을 살은 사라지고 / 화만 활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살은 죽이는 목표에 박히고 상대를 죽이는 것이다. 젊은 날의 열정은 그것을 원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는 대신, 아니 그것을 포기하고 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이 는 꽃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하고 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언어로 피어나 그가 일생을 통해 남긴 꽃 같은 시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인은 젊은 시절 잃어버린 파랑새를 다시 만난다.

이렇게 시인은 시간이 다 되고나서 희망을 다시 본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나서 잊어버린 것을 다시 되찾은 것이다. 인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는 시간이 많지 않은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꽉 찬 시간을 경험하는 아이러니를 시인은 발견하게 된 것이다.

비울수록 꽉 찬다는 이 비움의 미학을 다음 시는 좀 더 분명히 보여준다.

 

너무 많은 것을 보지 마세요

안과의사가 말했다

너무 많은 것을 들으려 하지 마세요

이비인후과 의사가 말했다

 

병든 몸을 씻으려 강가에 와서

눈물을 쏟았다

먼지가 되버린 신기루가

꽃씨처럼 휘날렸다

귀에서

몇 필이나 되는 지 목 쉰 바람만

흘러나왔다

 

사막은

너무 많은 나

휘발된 눈물과

호명되지 않은 이름의 발효

 

지금의 나는

오래 전에 떠나왔던

초원을 기억하는

단봉낙타

- 너무 많은전문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원하게 하고 얻도록 만들지만, 너무 많이 봐서 눈이 나빠져 결국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가질 수 있는 너무 많은 것이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든다. 시인은 이 많은 욕망과 그 욕망의 대상들이 목 쉰 바람만 들리는, 결국 사막의 허망함으로 귀결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단봉 탁타가 되어 기억 속에서 만으로 남아있는 초원을 그리며 이 사막을 견디고 있다.

 

3. 차이와 사이의 미학

 

시간은 사이를 메꾸는 질료이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 또한 관여한다. 사이를 좁히고 관계를 긴밀히 한다는 것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시간을 공유하지 못할 때 같은 한 존재라 하더라도 분리되어 또 다른 존재로 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간의 거리는 인간의 능력의 발전과 노력으로 좁힐 수 있지만 시간의 거리는 현실적으로 좁히기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존재와 존재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이야말로 어떤 존재의 의미와 다른 존재와의 차별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나호열 시인은 바로 이 다른 시간들의 차이와 그 시간의 간격을 사유하는 것을 통해 그의 시에 고유한 미학을 만들어 내고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자.

 

아주 먼 곳

이 세상의 끝까지 가봤지

나는 빛의 속도로 달렸어

주먹 한 줌만큼 햇살이 앉은

의자

 

앞에 놓인 그림자를 짚는

목발 몇 개

날개 흉내를 내고 있다

- 목발 2전문

 

이제는 오래 걸을 수 없다고 했다

직립의 슬픔으로 남은 두 손은

앞발이 되기보다

날개가 되기를 원했다

 

오래된 꿈이

가끔 땅에 내려앉을 때

언뜻 사람이 되기도 한다

- 목발 12 내가 새가 된 이유전문

 

목발과 날개는 엄청난 차이를 가진 존재들이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론 생김새나 용도와 기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차이는 속도와 시간의 차이이다. “빛의 속도를 꿈꾸는 것은 사실 목발의 일이 아니라 날개의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의자 옆에 놓여 쉬고 있는 목발을 보고 광속으로 달려오고 난 후의 휴식의 모습을 가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목발이 보여주는 그 느림과 불편함 속에는 이미 속도와 그 속도로 시간을 확장하려는 욕망이 들어 있음을 시인은 간파하고 있다. 시인은 바로 거기에서 우리의 삶의 한 측면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날개와 목발만큼이나 우리의 욕망과 현실은 차이가 있고 바로 그 사이에 시간은 허망하게 가로놓여 있고 우리의 삶은 그 시간에 얽매여 있다. 빠름과 느림 사이, 욕망과 현실 사이의 이 간극을 메우다가 우리의 삶은 늙고 낡아가는 것임을 이 시는 놓여있는 목발을 통해 우리에게 선명한 이미지로 알려주고 있다. 간결하여 더욱 가슴 아픈 시이다.

위의 작품들이 차이에서 오는 사이에 주목을 했다면 다음 시는 유사한 것들 간의 사이를 생각하게 해 준다.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곳에서 사라진 시계와 지갑 같은 것 청춘도 그리하여서 빈 자리에 남은 흠집과 얼룩에 서투른 덧칠은 잊어야 한다는 것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손에서 놓아버린 아쉬움이라고 하여도 새 순으로 돋아오르는 잊어야지 그 말

문득 열 일곱에서 스물두 살 그 사이의 내가 잃어버린 것인지 놓아버린 것인지 아슬했던 그 이름을 며칠째 떠올려 보아도 가물거리는 것인데 왜 나는 쓸데없이 손때 묻은 눈물에 미안해 하는가

낮달처럼 하염없이

 

                     - 잊다와 잃다 사이전문

 

잊다잃다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말이다. 하지만 글자 모양도 발음도 비슷하여 종종 혼동하여 사용되기도 하는 말이다. 이 잘못된 사용이 이 두 단어 사이의 의미를 닮게 만들기도 한다. 시인은 바로 그 점을 예리하게 포착해서 그것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잃어버린 것이 놓아버린 것이기도 하고 또한 일부러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지난 세월의 모든 이별들에 미안해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면서 스스로 낮달과 같은 존재가 된다. 낮달은 눈에 띄지 않아 잊혀지거나 잃어버린 존재이다. 나이가 들어서 잊어지고 잃은 것이 많아지면서 자신의 삶이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이 통째로 잃거나 잊은 것이 되어가고 있음을 시인은 깨닫게 된 것이다.

시인은 사이의 사유를 통해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오늘도 그가 왔다

굳은 표정과 열쇠가 없는 침묵으로

말을 거는 그에게

오히려 나는 할 말이 없다

낯이 익은 탓인지

온갖 비밀로 가득 찼던 몸을

기꺼이 내게 열어 주지만

그는 언제나 나에게는 삼인칭의 이름

찬란했던 봄이 가고

딱딱한 눈물이 남는 나무처럼

부드러운 나의 손길에도

깊은 나이테를 보여주지 않는다

잘 가라

다시 만날 일은 없을 터이니

나는 다시 또 다른 그를 기다릴 뿐

슬퍼할 겨를이 없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

장의 葬儀의 나날들

 

                     - I It전문

 

IIt는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일인칭과 삼인칭이라는 커다란 거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인은 이 거리를 의심해 본다. 나와 그가 과연 다른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내가 나 아닌 그로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시의 이러한 의문들이 우리를 깊은 사유로 이끈다. 내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항상 삼인칭 그로 존재한다. 나인 그가 나에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 사회적 자아로 의식된다. 누구의 누구이거나 누구를 위한 누구 또는 누구에 의한 누구로만 존재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내면의 자아는 내게서 잊혀 져 간다. 나에 의한 나를 위한 나의 존재는 항상 미래의 것으로만 존재한다. 우리의 모든 시간은 결국 이 진정한 나와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나와 나 같은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전 생애와 살아있는 모든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다음 시는 바로 이 전 생애의 시간을 얘기해 주고 있다.

 

안녕

이제 떠나려해

혹한과 눈폭풍 속에서도

서로의 황제가 되었던

짧은 며칠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부화를 꿈꾸는 돌을 닮은 생명

난 뒤돌아 보지 않아

이제 저 푸르고 깊은 바다로 갈꺼야

나의 몸부림이

멋진 자맥질이라고 오해하지는 마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우리는 만날 수 있을까

뒤돌아 보지 않으려 해

너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해

부디 짧은 추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지금 너무 느리게 걸어가고 있을 뿐

 

나의 베이비 박스

안녕

 

                   - 안녕, 베이비 박스전문

 

세상이 단지 자신이 버려진 곳인 베이비 박스였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세상에 버려진 존재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 부화를 꿈꾸며 몸부림치다 짧은 추억을 남기다가 가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길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너무 느리게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시에 깔린 정조는 허무주의이다. 그런데 이 허무는 우리의 삶이 가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가치 없는 것들에 허망하게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인가를 성찰하게 해 준다. 패배주의적 또는 퇴폐주의적인 허무주의가 아니라 성찰적 허무주의라 이름붙일 수 있다. 다시 말해 깊은 허무가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로 이끌어 준다.

 

4. 맺으며

 

이상의 해설을 통해 나호열 시인의 시적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시인의 전 생애를 통해 일군 시적 세계를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더욱이 항상 울림 있는 시어를 통해 삶의 깊이에 도달하는 시들을 써온 오랜 시력의 시인의 작품을 둔필로 해설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용감하게 이번 시집의 시들을 정리하자면, 나호열 시인의 시들은 시간과 시간들의 사이를 통해 우리 삶의 허무를 돌아보고 그것으로 우리의 허망한 욕망을 성찰하는 지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볼 때 시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이 허망한 시간의 흐름에 헛된 또 하나의 허망한 세계를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시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은 풍자의 언어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멍멍
멍멍멍

한 단어로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이 기막힌 은유를
그냥 개소리로  듣는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아무리 울어대도 울림을 주지 못하는
개소리

 

              - 개소리전문

 

시인이 애써 시를 쓰더라도 그것은 결국 개짓는 소리에 불과하다. 모든 감정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한 불구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울어도 울림을 주지 못하고 아무리 말해도 전달되지 못한다. 단지 멍한 의문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의문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더 허망한 세상의 소리들을 한 상태로 지우기 때문이다. 시가 아직은 필요한 이유이다. 이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호열 시인은 아직은 더 시를 써야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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