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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展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20. 2. 29. 16:13

[이주은의 미술관에 갔어요]

추사는 19세기 한류스타, 淸 화가도 팬레터 보냈죠

입력 : 2020.02.1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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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展]

젊은 시절, 중국에서 문인들과 교류, 학문·예술에 뛰어나 유명인사 됐죠
조선 사람 만나면 추사 얘기할 정도
만난 적 없는 淸화가가 그림 보내고 유명 중국 문필가와 편지 주고받아

요즘 외국의 영화인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봉준호 감독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고 합니다. 영화 '기생충'으로 미국 아카데미상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국제적인 스타이니까요. 200년 전쯤에도 외국에서 인기를 누린 우리나라의 스타가 있었습니다. 중국 연경(지금의 베이징)의 최고 지식인들은 조선에서 온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소식을 물었어요. 김정희가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뛰어난 학자이자 천재적인 예술가라는 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여름 베이징에서 한·중 교류 차원에서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시가 열렸는데요. 두 달간 하루 평균 방문객 5000명이 다녀가서, 총 30여만명이 전시를 관람했다고 해요. 여전히 김정희가 중국에서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셈이죠.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오는 3월 15일까지 같은 제목의 전시가 열려 우리나라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왼쪽)작품1 - 정조경 〈문복도〉, 비단에 수묵, 94.5×26.2㎝. (오른쪽)작품2 - 김정희가 6세 때 쓴 〈입춘대길·천하태평시〉, 90.5×58㎝.
(왼쪽)작품1 - 정조경 〈문복도〉, 비단에 수묵, 94.5×26.2㎝. (오른쪽)작품2 - 김정희가 6세 때 쓴 〈입춘대길·천하태평시〉, 90.5×58㎝.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작품1은 중국 청나라의 화가 정조경이 상상으로 그린 김정희 모습이에요. 수염을 늘어뜨리고 긴소매의 옷을 입은 어른이 김정희이고, 그에게 손을 모아 인사를 드리는 젊은이가 화가 자신이라고 하네요. 오른쪽 위에는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문장과 학문을 오랫동안 존경해왔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그려 보내 드립니다. 혹시 실제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수염을 치켜들고 한바탕 웃으시겠지요"라는 글이 적혀 있어요. 당시 중국에서 김정희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어요.

작품2는 김정희가 여섯 살 되던 해 봄에 쓴 글씨예요. 봄을 맞아 대문에 붙여 놓으면 그해 평안하고 운수가 좋다는 '입춘대길(立春大吉)'이란 글씨입니다. 대문에 붙인 이 글씨를 마침 지나가던 조선 후기 대표 실학자 박제가(1750~1805)가 보고는 당장 "이 아이는 학문과 예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으니, 한번 잘 가르쳐 보겠다"고 김정희의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박제가는 당시 청나라에서 유행하는 최신 학문을 공부하는 학자였으니, 김정희도 스승의 영향을 받아 그 분야의 책에 푹 빠졌어요. 그 덕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24세에 생원 시험에 합격하는데, 요즘으로 치면 그때 대학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될 듯해요.
작품3 - 옹방강 〈추사에게 보내는 제3편지〉, 종이에 먹, 23.6×304㎝.
작품3 - 옹방강 〈추사에게 보내는 제3편지〉, 종이에 먹, 23.6×304㎝.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시험 합격 후 김정희는 공직을 맡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연경으로 기행을 떠납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박제가가 추천한 중국의 위대한 문필가 옹방강(翁方綱·1733~1818)을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당시 여든 살에 가까웠던 옹방강은 낯선 손님을 잘 만나주지 않았지만, 김정희와 글로 대화를 나누다가 "동쪽 나라에 이렇게 영특한 사람이 다 있다니!" 하고 감동하게 됩니다. 연경에 머무는 40여 일 동안 김정희는 옹방강의 가르침을 받았어요. 중국의 늙은 스승은 똑똑한 조선의 제자가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입니다. 이후에도 조선에서 김정희가 보낸 편지에 힘을 내어 긴 답장을 쓰곤 했다는군요. 작품3이 바로 옹방강이 김정희에게 자필로 쓴 편지의 일부랍니다. 길이가 3m에 달하는데, 종이를 이어 붙여가며 이음매마다 도장을 찍었습니다. 옹방강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쓴 편지도 김정희에게 쓴 것이라고 합니다.
작품4 - 주학년 그림, 이임송 시 〈추사동귀도시〉의 일부, 1940년 이한복 모사, 두루마리, 22×323cm.
작품4 - 주학년 그림, 이임송 시 〈추사동귀도시〉의 일부, 1940년 이한복 모사, 두루마리, 22×323cm.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작품4는 김정희가 연경 기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날에 그곳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환송의 자리를 마련해준 모습입니다. 청나라 화가 주학년의 그림인데, 김정희를 떠나 보내는 아쉬움이 담겨 있어요. 귀국한 뒤 김정희는 옹방강의 가르침을 받들어 책으로만 글씨체를 익히지 않고, 발로 돌아다니며 옛 기념비석에 새겨진 글씨체까지 꼼꼼히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먹구름은 서서히 그의 집안으로 몰려오고 있었어요. 1840년 김정희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됐습니다.
작품5 - 김정희 〈계산무진〉, 종이에 먹, 165.5×62.5㎝.
작품5 - 김정희 〈계산무진〉, 종이에 먹, 165.5×62.5㎝.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그는 황량한 제주에서 홀로 9년의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책을 읽고 마음을 다스리며 글씨를 쓰는 일에 몰두한 덕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5를 보세요. '계곡과 산은 다함이 없다'라는 뜻의 '계산무진(谿山無盡)'이란 글씨입니다. 이 작품은 글자 하나하나가 네모 칸에 보기 좋게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있어요. 좌우로 대칭을 이루지도 않고, 글자들끼리 크기가 비슷하지도 않아요. 종이 위에서 글자를 가지고 놀듯 구부렸다 펼쳤다 하며 전체적인 조화로움을 만들었습니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김정희의 다양한 글씨체를 볼 수 있어요. 묵직하고 안정감 있는 글씨도 있고, 먹물이 풍부하여 기름진 느낌이 나는 글씨도 있어요. 비뚤비뚤 어수룩하고 서툴러 보이는 글씨도 있지요. 언뜻 못생기고 균형이 깨어진 듯 보이지만, 그런 시도를 통해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주은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기획·구성=양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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