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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 저술 200주년, 다산학의 고향을 찾아서
유형원·이익 유적지 함께 답사
‘나라다운 나라’ 뜻 되새긴 여정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은 흑산도선
형 정약전이 해양생물 도감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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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자각의 선구자들
“…저것이 바다로구나, 저 막막한 것이, 저 디딜 수 없는 것이…. …마음은 본래 빈 것이어서 외물에 반응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니, 바다에도 사람의 마음이 포개지는 것인가.”
“도(道)를 안고서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칠 수 없었으니
한 세대의 불행이로다
저서를 남겨 아름다운 혜택을 넉넉하게 끼쳤으니
백세의 행복이로다
(…) 학문의 전통을 전해 감이야 우리 하기 나름이지 남이 해 줄 것인가.”
전북 부안군 우동리 반계 유형원(1622~ 1673)의 ‘반계서당’은 17세기에 세계적 저술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산실로 그 터가 풍기는 기개가 대단했다. 산골 초야에 묻혀서도 틈틈이 전국을 돌며 국가개혁 대작을 구상한 반계를 다산은 “찬란한 국왕 보좌 재목”이라 기리면서도 “산림 속에 묻히어 늙어 죽으니”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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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전·약용 형제의 우애와 비애
사학(邪學) 죄인으로 엄중한 문초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약전과 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 유배지에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저술을 의논했지만 천주교 연루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끔찍한 기억 탓이었을 것이다. 혹시 해코지하려는 자들이 가짜 서신으로 엮을까 싶어 옥(玉)으로 조그만 도장을 새겨 전갈이 오갈 때의 신표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손암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해양생물학 도감 『자산어보』를 쓴 ‘사촌서실(沙村書室)’은 흑산도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다. 물고기 외에는 먹을 것이 없는 이곳에서 그는 어부들과 대화하며 박물학자로서의 삶을 꾸려 갔다. 담장 너머 조성된 ‘자산어보원’과 유배문화공원에는 흑산도에 유배 온 37명의 명단패가 서 이 땅의 기구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형을 흑산도로 떠나보내고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네 번이나 거처를 옮긴다. 다산이 남긴 『다산신계』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 먼 길 와 입에 풀칠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다산을 거두어 준 이는 주막의 한 노파였다. 주모의 은덕으로 이 술집 겸 밥집에서 4년을 지낸 뒤 다산은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란 이름을 붙였다. 집주인은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웁니다’에 등장할 만큼 유배 초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를 기려 세워진 ‘사의재’는 그 속뜻이 무색한 한옥체험관으로 둔갑했고, 그 마당에 선 주모와 딸의 청동상은 너무 크고 우악스러워 생뚱맞았다.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옮긴 뒤에는 못을 파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과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 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는 기록이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나온다. 19일 오후 답사단이 찾은 다산초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개축해 다산 정신의 본모습을 흐려 놓은 티가 역력해 안쓰러웠다. 다산의 체취를 더듬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초당 오른쪽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란 각자(刻字)만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사암(俟菴)은 정약용이 쓴 여러 개 호 중 하나로 『중용』에서 따온 구절이다.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500여 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술을 백세 뒤의 성인이 보더라도 한 점 의혹이 없을 만큼 당당하다는 자부심이 드러난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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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다산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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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는 답사 참여 소감을 나누는 토론장으로 시끌시끌했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인(中人)이 이끈 잡학의 활동상을 연구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밝혔다. 고재득 전 성동구청장은 “다산의 정신을 더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다산연구소가 든든한 재정 지원 아래 조직을 탄탄히 해 활성화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200년 전 다산의 신념과 희망이 답사단의 귀갓길을 훈훈하게 덥혔다.
신안·강진·해남=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