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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세유표』 저술 200주년, 다산학의 고향을 찾아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9. 2. 11:19
 
『경세유표』 저술 200주년, 다산학의 고향을 찾아서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있는 다산초당 주변을 둘러보는 박석무 이사장(오른쪽 넷째)과 답사객들. 앞쪽 돌무더기 밑 비탈이 다산이 일군 제전(梯田)터, 즉 사닥다리 모양 밭 자리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산은 여기서 미나리를 키워 먹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에 있는 다산초당 주변을 둘러보는 박석무 이사장(오른쪽 넷째)과 답사객들. 앞쪽 돌무더기 밑 비탈이 다산이 일군 제전(梯田)터, 즉 사닥다리 모양 밭 자리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다산은 여기서 미나리를 키워 먹고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형원·이익 유적지 함께 답사
‘나라다운 나라’ 뜻 되새긴 여정
바다가 푸르다 못해 검은 흑산도선
형 정약전이 해양생물 도감 집필

올해는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국가경영을 위한 개혁안인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저술한 지 200주년 되는 해다. 내년은 백성을 섬기는 관리가 지켜야 할 태도를 살핀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작 200주년에 18년 귀양살이를 끝낸 해배(解配) 200주년이다. 이 뜻깊은 시점을 기리기 위해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가 마련한 ‘실학기행 2017’을 따라나섰다. 실학의 삼조(三祖)라 할 반계(磻溪) 유형원, 성호(星湖) 이익,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와 다산의 형인 손암(巽庵) 정약전의 유배지를 잇는 답사 여정은 선각자가 품었던 ‘나라다운 나라’의 뜻을 되새기는 각별한 길이었다.
 
“이러다가는 망하겠다”는 자각의 선구자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관광 자원 제1호로 꼽히는 촛대바위. 바다 물색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 흑산도(黑山島)란 이름이 붙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관광 자원 제1호로 꼽히는 촛대바위. 바다 물색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해 흑산도(黑山島)란 이름이 붙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푸르고 짙푸르다 못해 검었다. 그래서 흑산(黑山)이라. 흑산도로 향하는 뱃전에서 바라본 바닷물은 검은 비단결처럼 반짝였다. 섬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절경의 전남 신안군 흑산도는 역설적이게도 조선시대에 제주도와 더불어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유배지로 꼽혔다. 험난한 뱃길에 척박한 땅으로 귀양살이 떠나는 사람들 심정은 처연했을 것이다. 김훈 작가는 장편소설 『흑산』에서 흑산행 돛배를 기다리는 손암 정약전(1758~1816)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읊었다.
 
“…저것이 바다로구나, 저 막막한 것이, 저 디딜 수 없는 것이…. …마음은 본래 빈 것이어서 외물에 반응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다 하니, 바다에도 사람의 마음이 포개지는 것인가.”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 문신으로 있던 정약용이 1794~1796년 축성의 핵심 인물로 참여한 수원 화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정조대왕의 명을 받들어 규장각 문신으로 있던 정약용이 1794~1796년 축성의 핵심 인물로 참여한 수원 화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18일 오전, 200여 년 전에는 무안 포구에서 몇 날 며칠이 걸려 도착한 흑산도를 목포에서 출발한 쾌속선은 두 시간여 만에 당도했다. ‘실학기행 2017’ 답사단 41명은 시공을 뛰어넘어 유배객의 심사를 헤아리며 꼬불꼬불 험난한 해안일주도로를 타고 섬 주변을 돌아봤다. 오지 중의 오지건만 크고 작은 무인도와 세월의 풍파로 일궈진 천혜의 자연 풍광은 처연한 외지인들 마음을 푸근하게 품어 주었다. 전날인 17일 이른 아침, 경기도 남양주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실학박물관, 수원 화성에서 기행을 시작한 일행은 나라를 변혁시키려 제 몸을 아끼지 않았던 혁명가들의 숙명에 압도당해 이미 숙연한 자세였다.
 
경기도 안산시 일동에 자리한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1681~1763)의 묘역을 찾은 기행 참가자들이 묘비에 새겨진 번암(樊巖) 채제공의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기도 안산시 일동에 자리한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1681~1763)의 묘역을 찾은 기행 참가자들이 묘비에 새겨진 번암(樊巖) 채제공의 비문을 살펴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기도 안산시 일동 성호 이익(1681~ 1763)의 묘역에서는 선생을 기리는 묘갈명(墓碣銘)에 감동했다.
 
“도(道)를 안고서도 백성들에게 혜택을 끼칠 수 없었으니
한 세대의 불행이로다
 
저서를 남겨 아름다운 혜택을 넉넉하게 끼쳤으니
백세의 행복이로다
 
(…) 학문의 전통을 전해 감이야 우리 하기 나름이지 남이 해 줄 것인가.”
 
전북 부안군 우동리 반계 유형원(1622~ 1673)의 ‘반계서당’은 17세기에 세계적 저술인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산실로 그 터가 풍기는 기개가 대단했다. 산골 초야에 묻혀서도 틈틈이 전국을 돌며 국가개혁 대작을 구상한 반계를 다산은 “찬란한 국왕 보좌 재목”이라 기리면서도 “산림 속에 묻히어 늙어 죽으니”라며 안타까워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우애와 비애
답사단을 이끈 박석무 이사장은 “실학 선구자들의 유적지를 다닐 때마다 어찌 이리 버려져 있었을까 가슴을 치게 된다”고 했다. 그는 “실학자·사상가의 위상에서 더 높은 현자의 대접을 받아야 할 이들의 발자취를 대할 때마다 다산학(茶山學)과 실학의 본모습을 현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사학(邪學) 죄인으로 엄중한 문초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약전과 약용 형제는 흑산도와 강진 유배지에서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묻고 저술을 의논했지만 천주교 연루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끔찍한 기억 탓이었을 것이다. 혹시 해코지하려는 자들이 가짜 서신으로 엮을까 싶어 옥(玉)으로 조그만 도장을 새겨 전갈이 오갈 때의 신표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손암이 세계에 자랑할 만한 해양생물학 도감 『자산어보』를 쓴 ‘사촌서실(沙村書室)’은 흑산도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다. 물고기 외에는 먹을 것이 없는 이곳에서 그는 어부들과 대화하며 박물학자로서의 삶을 꾸려 갔다. 담장 너머 조성된 ‘자산어보원’과 유배문화공원에는 흑산도에 유배 온 37명의 명단패가 서 이 땅의 기구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형을 흑산도로 떠나보내고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네 번이나 거처를 옮긴다. 다산이 남긴 『다산신계』는 이 상황을 담담하게 보여 준다. “유배지에 있었던 것이 18년인데, 읍내에서 살았던 게 8년이고 다산에서 살았던 것이 11년째였다. 처음 왔을 때에는 백성들이 모두 겁을 먹고 문을 부수고 담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편안히 만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에 먼 길 와 입에 풀칠도 못하고 서성거리는 다산을 거두어 준 이는 주막의 한 노파였다. 주모의 은덕으로 이 술집 겸 밥집에서 4년을 지낸 뒤 다산은 ‘마땅히 지켜야 할 네 가지’라는 뜻의 ‘사의재(四宜齋)’란 이름을 붙였다. 집주인은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 ‘밥 파는 노파에게서도 배웁니다’에 등장할 만큼 유배 초기에 큰 힘이 되었다. 이를 기려 세워진 ‘사의재’는 그 속뜻이 무색한 한옥체험관으로 둔갑했고, 그 마당에 선 주모와 딸의 청동상은 너무 크고 우악스러워 생뚱맞았다.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옮긴 뒤에는 못을 파고 물을 끌어 폭포를 만들고, 동쪽과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적 천여 권을 쌓아 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는 기록이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에 나온다. 19일 오후 답사단이 찾은 다산초당은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번 개축해 다산 정신의 본모습을 흐려 놓은 티가 역력해 안쓰러웠다. 다산의 체취를 더듬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초당 오른쪽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란 각자(刻字)만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사암(俟菴)은 정약용이 쓴 여러 개 호 중 하나로 『중용』에서 따온 구절이다.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500여 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술을 백세 뒤의 성인이 보더라도 한 점 의혹이 없을 만큼 당당하다는 자부심이 드러난 호다.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다산의 대안
전남 해남군 녹우당길 고산 윤선도 사당 앞에 선 우람하고 잘생긴 소나무는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신목(神木)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전남 해남군 녹우당길 고산 윤선도 사당 앞에 선 우람하고 잘생긴 소나무는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는 신목(神木)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흑산비치호텔에서 열린 특강에서 김태희 다산연구소장은 『경세유표』의 원래 이름이 『방례초본(邦禮草本)』임을 밝히며 “조선의 가장 진보적이며 구체적인 논리가 민족의 지혜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다산은 ‘터럭 하나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면서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바로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우리의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것인데 이것이 경세유표의 표어인 셈이죠.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법과 제도를 개혁하기 위한 대안으로 경세유표를 저술한 겁니다.” 박석무 이사장은 “국민 한 명 한 명이 켜 든 촛불로 태어난 이 정부가 200년 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보자고 피를 토하듯 개혁안을 저술한 다산 선생의 염원을 오늘 여기서 실천해 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DA 300


 
전남 해남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들러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는 답사 참여 소감을 나누는 토론장으로 시끌시끌했다. 황상익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근대화 과정에서 중인(中人)이 이끈 잡학의 활동상을 연구하겠다는 의지가 생겼다”고 밝혔다. 고재득 전 성동구청장은 “다산의 정신을 더 널리 펼칠 수 있도록 다산연구소가 든든한 재정 지원 아래 조직을 탄탄히 해 활성화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200년 전 다산의 신념과 희망이 답사단의 귀갓길을 훈훈하게 덥혔다. 
 
신안·강진·해남=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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