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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작은 돌담집엔 ‘자산어보’ 쓴 정약전의 꼼꼼함이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9. 18. 18:22

 

흑산도 작은 돌담집엔 ‘자산어보’ 쓴 정약전의 꼼꼼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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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암 정약전이 ?자산어보?(아래 작은 사진)를 저술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 ‘사촌서당’.

 

그곳은 고도(孤島)였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일주일, 날씨가 나쁘면 보름 넘게 걸려야 닿을 수 있었다. 쌀과 소금이 나지 않는 척박한 섬이었다. 나라에선 큰 죄를 지은 죄수들을 이곳으로 보냈다.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해라”였다. 전남 신안군 흑산도다. 지금은 목포에서 쾌속선으로 1시간 50분, 홍어로 이름난 관광명소지만 조선시대에는 극형의 유배지였다.
 

우리 어족 체계적 분류한 학자
타계 200돌 맞아 유배지 탐방
남양주 다산 생가서 강진까지 답사
“모두를 잘 살게 하는 공부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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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흑산도에 반가운 손님이 찾았다. 교수·영화감독·기업인 등 40여 명으로 구성된 ‘실학기행 2016’ 참가단이다. 다산연구소(이사장 박석무) 실무진과 함께 두 세기 전 이곳에서 한국 해양생물학의 고전 『자산어보(玆山魚譜·혹은 현산어보)』를 완성한 손암(巽庵) 정약전(1758~1816)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흑산항구에서 순환도로를 따라 정반대편 사리(沙里)에 도착했다. 마을 복판 유배문화공원에서 돌담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손암이 살던 복성재(復性齋)가 나왔다. 새로 복원한 건물엔 손암 동생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이 형을 기리는 글도 썼던 ‘사촌서당(沙村書堂)’ 현판이 달려 있다.

손암은 이곳에서 불후의 명작인 『자산어보』를 완성했다. 천주교도로 몰려 귀양 온 처지였지만 마을 주민과 동고동락하며 우리 바다에 나는 어족(魚族) 226종을 체계적으로 분류했다. 물고기·바다벌레·해초의 생태를 총 2만3000여 자로 꼼꼼하게 기록한 선비, 실학자로서의 손암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마침 올해는 손암 타계 200주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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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군 다산초당에서 강연하고 있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명현 임원경제연구소장은 이날 특강에서 박물학자(博物學者) 손암을 주목했다. 그는 “손암은 손수 물질까지 하며 어부들 사이에 수백 년 내려온 지식을 과학적으로 정리한 ‘한국의 린네’(1707~78·식물분류법을 만든 스웨덴 학자)였다”며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룬 그의 실용적 면모는 이 시대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답사진은 손암과 다산의 눈물겨운 형제애도 기억했다. 손암을 둘도 없는 지기(知己)이자 스승으로 여겼던 다산은 유배지 강진에서 형을 그리워하는 편지를 보냈고, 형 또한 늘 동생의 안위를 살폈다. 동생이 유배지에서 풀려난다는 소식에 거처를 흑산도에서 목포에서 가까운 우이도로 옮길 정도였다. “동생이 험한 바다를 건너 보러 오게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산어보』 또한 손암의 현장 경험에 다산의 제자 이청(이학래· 1792~1861)의 문헌고증을 거쳐 완결됐다. 손암·다산·이청의 공동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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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7대 종손 정호영씨(오른쪽)와 부인 이유정씨.

 

박석무 이사장은 “다산은 손암의 학문이 더 높다고 판단해 늘 형님의 의견을 물었다”며 “두 형제의 둘도 없는 우애와 공부는 가족이 해체되고 학문이 분화된 이 시대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고 말했다. 다산의 7대 종손인 정호영(58·EBS 정책기획센터장)씨 부부도 답사에 동참했다. 정씨는 “그간 다산의 유적은 많이 다녔지만 흑산도를 찾은 건 처음”이라며 “함께 읽고, 쓰고, 토론하는 선조들을 보며 줄세우기·편가르기에 빠진 지금의 우리를 반성하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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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행은 25~27일 사흘간 진행됐다. 다산의 출생지이자 마지막 거처였던 경기도 남양주시 다산 생가를 시작으로 다산의 과학사상과 기량이 집약된 수원 화성, 다산이 흠모했던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의 경기 안산 성호기념관과 반계(磻溪) 유형원(1622∼73)의 전북 부안 유적지,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다산의 대표작이 태어난 전남 강진 다산초당 등을 두루 돌았다. 특히 반계-성호-다산으로 이어지는 ‘실학 3조(祖)’가 남긴 유산을 성찰했다. 박석무 이사장은 “반계와 성호는 평생 재야에 살면서도 나라를 향한 걱정에 각각 『반계수록』과 『성호사설』을 썼다”며 “깊은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도 국가를 일으킬 대안을 고민했던 그들 모두는 보배 같은 존재”라고 설명했다.

참가자들도 ‘새로운 출발’을 약속했다. 분열과 대립의 오늘을 이겨내는 지혜를 탐색했다. “사회적 고통을 직시하며 모두를 잘살게 하는 공부”(서울대 이현정 교수), “서로 기대며 성장하는 형제애를 담은 창작 판소리 제작”(공연기획자 양정순), “사심 없는 태도와 치열한 정진”(인하대 김태승 교수) 등을 다졌다. 다산 자신이 즐겨 쓴 호는 사암(俟菴), 미래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다산의 사상은 현실에서 이뤄지지 않았다”(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장)는 한마디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신안·강진=글·사진 박정호 문화전문기자 jhlogos@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