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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는 주체성을 세워야 할 때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3. 6. 00:48

반성하는 주체성을 세워야 할 때

정유화

한 나라 한 사회의 행복지수를 측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기준이 어떠 하냐에 따라 행복지수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경제조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고, 정치 문화적 조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으며, 개인의 자유적 조건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우연하게 인터넷에서 2016년에 발표된 세계행복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여기서의 기준은 모두 일곱 가지이다. 1인당 GDP지수, 사회적 지원지수, 건강한 삶의 기대지수, 삶의 선택에 대한 자유지수, 관대함에 대한 지수, 부패율 지수, 반 이상향의 잔류지수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1위는 덴마크, 2위는 스위스, 3위는 아이슬란드이다. 관심이 있는 한국은 58위, 또 한국과 비교 대상이 되는 일본은 53위, 중국은 83위이다. 순위로 보면, 경제조건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국내총생산량인 GDP로 보면 1위가 미국, 2위가 중국, 3위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예상 외로 순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는 다름 아닌 반이상향의 잔류지수로 나타났다. 반 이상향의 잔류지수란 디스토피아가 남아있는 지수를 의미한다. 이를 좀더 쉽게 풀이 하자면 한 사회나 국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나 의식이 남아있는 지수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지수가 클수록 사회나 국가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게 되고 이에 저항하는 반감의 감정은 상대적으로 격렬하게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반 이상향적인 잔류지수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행복지수가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질 때가 많다. 반 이상향의 잔류지수가 높은 탓인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모든 분야에서 희망보다는 절망을 이야기하고, 긍정보다는 부정을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칭찬보다는 질책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대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런 만큼 대부분의 대화를 보면, 나는 다 옳고 남은 다 그르다는 식의 대화이다. 좀 더 비약하자면 ‘나’를 어렵게 만든 것은 모두 ‘너’ 때문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진위와 상관없이 ‘나’의 의견에 동조하면 그 사람은 옳은 사람이고, 반대하거나 비판하면 그른 사람이다는 식이다. 물론 어떤 사실을 따져 봤을 때 한두 가지는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말 나만 옳고 너만 틀린 것일까.

 

이러한 극단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기적인 자기 주체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주체성은 진실과 진리를 따르는 주체성이라기보다는 주어진 형편과 상황에 따라 자기의 논리를 그때 그때마다 바꾸는 가변성의 주체성이다. 진리를 따르는 것을 단일성의 주체성이라고 한다면, 상황에 따르는 것을 다원성의 주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원성의 주체성은 우리 사회를 대립과 불신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작용한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일성의 주체성이다. 물론 단일한 주체성을 세우기란 현실적으로 너무나 힘이 든다. 많은 제약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원성의 주체와 균형을 이룰 만한 정도는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단일한 주체성을 세워가는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란 자기반성을 통하여 타자와 융합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타자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과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하근찬의 소설 「수난이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인공 박만도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강제로 징용에 끌려갔다가 전쟁터에서 왼쪽 팔을 잃은 인물이다. 그 인물이 이제는 아들 진수가 6.25전쟁에서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받고 기차 정거장으로 마중을 나가게 된다. 그런데 아들을 만나는 기쁨도 잠시, 아들 진수가 한쪽 발을 잃게 된 것을 보고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래서 “예라이 이놈아” 하며 냉담하고 무뚝뚝하게 혼자 뒤돌아서서 먼저 걸어가고 만다. 일종의 다원성의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시냇물의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할 상황이 되자 박만도의 다원성의 주체성은 무너지게 된다. 예의 다리 잃은 아들 진수가 그 외나무다리를 건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다리를 지닌 박만도가 아들 진수를 업고 건너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박만도는 허리를 굽혀 다리 없는 아들 진수를 업게 된다. 대신 다리 없는 아들 진수는 양손으로 아버지가 산 고등어와 지팡이를 잡는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한 몸으로 완전하게 결합·융합되자 그 외나무다리를 쉽게 건너갈 수 있게 된다. 아버지 박만도는 아들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고 있으며, 아들 진수는 아버지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박만도는 장애물인 외나무다리를 통해서 단일한 주체성을 세우게 된다.

 

단일한 주체성을 세우기 위해서는 그 주체성을 반성하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말하자면 다원적인 주체성을 비판하는 반성적인 주체성이 그 과정에 필히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올곧은 단일한 주체성을 세울 수 있다. 우리 한국문학에서 윤동주 시인만큼 반성적인 주체성을 문학 전면에 내세운 이도 드물다. 그는 다원성의 주체성을 해체하고 단일성의 주체성을 정립하기 위해 옥사하기까지 전생을 반성하는 주체로 살았던 시인이다.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괴로워하든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흰그림자」)이라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전생을 반성하는 주체, 곧 괴로워하는 수많은 주체로 살았다. 그 결과 그는 모든 어리석음을 깨닫고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쉽게 씌어진 詩」)를 하게 된다. 여기서의 악수는 다원성의 주체성을 지닌 ‘나’를 단일성의 주체성을 지닌 ‘나’로 정립하는 순간을 의미한다. 작금의 한국문학을 보면 다원성의 주체들로 넘쳐난다. 그런 만큼 반성하는 주체성이 절실한 때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는 단일한 주체성을 새롭게 보여줄 때이다. 앞으로 그런 문학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