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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옮겨감에 불과, 존중받으면서 가고 싶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2. 6. 01:36

 

죽음은 옮겨감에 불과, 존중받으면서 가고 싶다

웰다잉 실천한 그들의 마지막 순간

복부에서 발견된 작은 혹은 암이었다. 희귀병인 육종암 진단을 받은 윤혁은 두 차례 수술로 장기 5개를 잘라냈다. 스물다섯 번에 걸친 항암치료도 했다. 그러나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병원을 나왔다.

죽음도 삶의 과정, 의연한 마지막 길
시한부 청년이 투르 드 프랑스 완주
니어링·김수환·법정 연명치료 거부
신영복은 마지막 10여 일 곡기 끊어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 홀가분”
최종현, 항암치료 대신 명상으로
리콴유 “마지막 순간 의사 필요 없어”

 
의미 없는 연명치료 대신 그는 마지막 도전을 택했다. 평생 꿈꿨던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도전이다. 윤혁은 “병원 천장을 보면서 상상해봐도 자전거를 타는 내 모습, 그게 전부였다”고 말했다. 투르 드 프랑스는 프랑스 전역과 스페인 등 약 3500㎞를 일주하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사이클대회다. 해발 2115m 높이의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 등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어서 ‘악마의 레이스’라고도 불린다.
 
윤혁은 후원을 통해 의사와 정비공 등 10명의 팀을 꾸렸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잘했고 아마추어 보디빌더로 활동한 그였지만 높은 산맥에서 좌절도 컸다. 그러나 그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힘든 가파른 산길에서 진정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뚜르:내 생애 최고의 49일’의 내용이다. 윤혁은 2009년 한국인 최초로 투르 드 프랑스를 완주했다. 모건 프리먼과 잭 니컬슨이 주연한 영화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을 실천한 것이다. 윤혁은 1년 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중환자실의 연명치료 대신 세상으로 나와 도전을 택한 윤혁의 모습은 살아남은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남긴다. 평점 9.8을 받는 등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영화 뚜르에서 윤혁은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투르 드 프랑스에 도전한다. [중앙포토]

영화 뚜르에서 윤혁은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투르 드 프랑스에 도전한다. [중앙포토]

 

미국 사회운동가 니어링 웰다잉 선구자
서양의 웰다잉 선구자는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운동가였던 스콧 니어링(1883~1983)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부인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서 남편의 유언을 전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란다.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가능하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기를 바란다. 나는 곡기를 끊고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내 몸에 어떤 진정제나 진통제, 마취제도 투약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까닭이 없다. 임종 자리를 함께하는 사람은 조용함, 위엄, 이해와 감사, 기쁨과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원한다. 죽음은 광대한 우주적인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새로운 길을 간다. 죽음은 옮겨 감이나 깨어남에 불과하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받으면서 가고 싶다’.
 
그는 필요 이상의 치료를 거부했다. 의사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다달이 소변을 받아다 자네에게 갖다 주고 필요한 처방이나 치료를 받기를 권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내 삶의 남은 기간을 의사의 감독 아래 수명을 늘리려고 애쓰는 셈이 되는 걸세. 올바른 식사와 절제된 생활로도 잘 지낼 수 없다면, 될 수 있는 한 빨리 죽는 것이 나와 내가 속해 있는 사회를 위해서 좋을 것이라 생각하네’.
 
니어링은 몸에 이상이 생기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딱 100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신에 작업복을 입힌 후 침낭 속에 넣어 화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재는 자신이 살던 집 근처의 나무 밑에 뿌려 달라는 말을 남긴다.

색스 교수 “모든 사람은 죽음의 길 찾아”
의학계의 시인이라 불린 저술가 올리버 색스(1933~2015) 뉴욕대 의대 신경학과 교수는 암이 온몸에 퍼졌다는 소식을 듣고 뉴욕타임스에 “몇 개월 살지 모르겠으나 더 풍성하고 깊고 생산적으로 살겠다”고 했다. 색스는 마지막 글에서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 세대는 가고 있다. 모든 죽음은 커다란 아픔이다.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면 나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 같은 사람은 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똑같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들은 대체될 수 없다.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남기게 된다. 그것은 운명이다. 모든 사람은 독특한 개인이다. 자신의 길을 찾고, 삶의 길을 찾고, 죽음의 길을 찾는 것이다”고 썼다.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도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에 반대했다. 그를 치료한 황태곤 당시 강남성모병원 병원장은 “추기경께서는 생명의 존엄성을 늘 강조했지만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장하는 데 대해서는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가톨릭에서 김 추기경의 연명치료 반대는 논란이 있을 수도 있었다. 의료진은 연명치료 중단을 머뭇거렸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정진석 추기경이 연명치료 중단의사를 공증했다.
 
법정(1932~2010) 스님도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한다”며 연명치료를 거부했다. 그는 소탈하게 피안(彼岸)으로 갔다. 법정 스님은 “관을 짜지 말고 승복이면 족하니 수의를 입히지도 말고, 삼일장도 하지 말고 지체 없이 화장하라”고 했다. 법정은 또 “사리를 찾지 말고 탑도 비도 세우지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 구현 활동에 사용해 달라. 일절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라”고 했다.
 
베스트셀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저술한 신영복(1941~2016) 성공회대 교수는 감옥에서 그랬던 것처럼 죽음에 주눅 들지 않았다. 지난해 흑색종의 피부암을 치료하다 상태가 악화되자 퇴원해 집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는 스콧 니어링처럼 마지막 10여 일간 곡기를 끊었다. 마지막까지 의식이 있었고 밝은 표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임종하던 해 5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는 시집을 냈다. 박경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고 39편의 시를 모아 책을 엮었다. 시집에 수록된 ‘옛날의 그집’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는 연명치료는 물론 항암치료도 거부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토지’로 들어갔다.
 
최종현(1926~1998) 전 SK 회장도 연명치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수술 이후 폐암이 재발하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 등을 거부하고 자택으로 돌아왔다. 기능이 좋아진 신제품 항암제가 나왔으니 써 보라는 의료진의 권고를 거부했고 명상을 하면서 생의 마지막 6개월을 보냈다. 가끔 통증 완화제를 맞고 기호흡을 통해 통증을 조절하는 정도였다. 그는 당시 주류였던 토장 대신 화장을 선택했다. 웰다잉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최철주(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씨는 “최종현 회장 화장 이후 한국의 화장문화가 바뀌었다”고 말했다.
 
우리 선조들도 죽음을 의연히 맞았다.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거두 기정진(1798~1879)은 “나는 70세 이후 병이 있어도 약을 먹지 않았다. 대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은 평상의 일이다”고 했다.

퇴계 이황 일어나 앉아 편한 듯이 운명
퇴계 이황(1501~1570)도 품격 있게 떠났다. “퇴계는 1570년 12월 자제들에게 명하여 다른 이들의 서적을 기록해 돌려보내게 했다. 제자들에게 퇴계는 ‘평소 그릇된 식견으로 종일 강론한다는 것도 역시 쉽지 않았소’라고 하고 이날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 하고 유시 초 누운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일어나 앉아 편한 듯이 운명했다.”(『해동잡록』)

 
아산정책연구원은 2008년 96세로 세상을 떠난 김석기옹에 대해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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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옹은 눈길에 미끄러져 고관절이 부러졌다. 대수술 끝에 퇴원했지만 거동이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과 ‘인생 숙제가 얼추 끝났으면 의식적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맞아야 한다’는 말을 나눴고 그날부터 식사량을 줄여 나갔다. 이듬해 새봄이 올 무렵 목욕탕에 다녀온 뒤 음식을 끊고 물만 마셨다. 의식이 흐릿해지자 대학병원으로 옮겼지만 김옹은 링거를 못 꽂게 하고 큰아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안방에 누운 김옹 옆에서 아들·손자들이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김옹은 그만 가겠다면서 편하게 눈을 감았다. 장례 뒤 모인 자손들은 다시 통곡했다. 평소 그가 쓰던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것들 때문이었다. 사망신고 때 필요한 절차 메모지와 통장·도장·주민등록증·금전출납부, 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얽힌 대소사가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달력에도 졸(卒)한 날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싱가포르를 일류 국가로 올린 리콴유(李光耀·1923~2015) 전 총리는 두 달 가까이 폐렴으로 입원했지만 항생제 치료만 받았을 뿐 연명치료는 받지 않았다. 리 총리는 이미 2013년 자서전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거부의사를 공개했다. 그는 “내가 움직이지 못하고 인공 튜브로 연명하게 되면 의사들은 나를 떠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밝혔고 이런 사전 의료지침을 의사와 변호사까지 서명한 공식 문서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