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호접몽

세상과 세상 사이의 꿈

모두 평화롭게! 기쁘게!

시창작 도움자료

우대식의 시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7. 1. 30. 00:19

계간 시와 산문 시/인/조/명

우대식 시인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 『설산 국경』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시에 죽고 시에 살다』

 

<시인이 뽑은 대표시 5편>

 

오리五里 외 4편

 

오리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야크의 꿈

 

나는 첩첩이 우랄산맥의 야크였다가

 

첩첩이 돈황의 바람이었다가

 

 

첩첩이 화장터 위의 구름이었다가

 

첩첩이 애비를 버리고 떠나기도 하였다

 

또 첩첩이 천장天葬의 독수리였다가

 

첩첩이 한 꽃나무이기도 했다

 

첩첩이 떠나는 한 여자였으며

 

한 남자이기도 하였다

 

내 발길은 더러 허공의 길마저도

 

밟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절벽의 길을 걸어 첩첩한 발바닥의 무늬로

 

첩첩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첩첩이 집을 떠나는 길이었다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어디 먼 해조음이 들려오는 탓이다

울지 말고 그만 잠들라는

그 어떤 먼 신호도

울음 소리였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달 아래

그대 젖가슴으로 찬 손을 천천히 뻗어본다

죽음이란 이런 순간 다가오는 것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발이 네 개인 때문이다

해변을 달린다

달림, 들림 혹은 울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다만 12월의 해변을 내달려

나의 울음도, 너의 울음도

그대 핏줄 어딘가에 돋아난

 

푸른 감각이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다

그대에게 보낸 한 통의 죽간竹簡은 받아보았는가

내 입에는 날이 선 이빨이 가득 고여

입을 벌리면 한 마리 삵이 되어

눈 내린 험한 산을 떠돈다고 썼다

지금 기차는 발해만을 떠나 극락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광포한 노래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고 썼다

너는 읽었는가

모든 근육이 일제히 발이 되어 걸어가는

한 마리 삵,

꽃무늬 발자국이 그대 젖은 분화구를

어지럽게 흩뜨려 놓았을 것이다

 

신폭神瀑에 들다

 

 

윈난성 신폭 아래

객잔에 들었다

숯불을 피우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먼 당신은

가끔 눈사태만 엽서처럼 보냈을 뿐

흔적이 없다

떡을 떼어 객잔의 창으로 흐르는 눈발에 섞어 먹었다

반야의 밤에 달이 떠오르면

야크의 젖통은 부풀어

신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나를 지우거나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붉은 숯불이 잦아든다

국경 아래 뜬 달이 조금씩 기울면서

그 아래를 걷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환상 속의 당신

그대 어깨가 붉어진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설산 국경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던 한 생生이 있다

 

왼손의 그늘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이 가을날 나의 사랑을

얼마 남지 않은 저 잔광의 빛으로

당신을 몰고 가는 일

그것이 내 연애법이다

그 몰입에 얼마나 당신이 괴로워했을 줄

모든 빛이 꺼지고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처럼

당신과 내가 어느 풀밭에 앉아있다 하자

젓가락을 들어 당신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다

음식 밑에 바쳐진 당신의 왼손

그 아래로 그늘이 진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시인의 최근 신작시 5편>

 

바빌론 물가에서 외 4편

 

높은 나무에 올라

서쪽,

노을을 향해 우는 원숭이처럼

시퍼런 인광燐光을 다독이며

어둠의 이불을 덮고 누워 다시

한밤을 생각한다

꽃들이 무더기로 피다가 진

먼 바다 위로

혼령의 울음이 떠돌 때

숨을 곳도 없는 죄지은 사람들이

개펄에 머리를 박고 기도한다

빼앗긴 영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전선을 밤새 밀어 올린다

바빌론의 포로들이 일터로 돌아가는 아침이면

다시 그들의 땅,

영토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이들은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졸음이 쏟아진다

어떤 영혼이 다녀가는 소리

자꾸 다녀가는 소리

지상의 끝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장엄과 연민 앞에서

무서움이 몰려왔지만

결심했다

도망치지 않겠다

 

애굽을 넘어, 모래바다를 건너, 뻘밭을 기어

조금만 더,

턱까지 숨 닿는 소리

풍경

 

시골 마을 정류장에 긴 등나무 의자가 하나 있다

가을 날 오전,

등나무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모두 사라진다

장날 행상을 꾸린 할머니도 지상으로부터 추방되어

보따리만 정겹게 놓여있다

보따리 안에 아욱과 콩이 재잘거리고

스스로 버스에 올라

빈 자리를 찾아 앉으며 창문을 활짝 열어 재킨다

가을볕이 좋구만

션하구만

무가 튼실혀

사람 같은 소리를 해대며

장터로 씽씽 달려가고 있다

기사 아저씨가 왜 사람짓을 하냐고 호통을 치니

다 그게 그거고 그거 아닌가 하고 항의를 한다

뒷자리 누군가가

맞지 암만 맞고 말고 역성을 든다

씽씽

장터에 도착한 콩과 아욱이 길거리에서 가을바람을 쐬고 있었다

당당했다

유년시幼年時

 

서울 달동네

행당동 수도국산

어둠이 하냥 푸르른

10월의 밤길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남자 아이들은 간혹 여자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놀래키고

그러면 더 따뜻하게 모여 체온을 나누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

하나님이 있었다

나는 무서워져

집으로 뛰어갔다

 

홍수환 약전略傳

 

대머리가 벗겨진, 한수 이남 새들이 유유히 날던 압구정의 영원한 챔피언 무사 홍수환을 선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들이 흰 와이셔츠를 입고 사무를 보거나 100만불 수출 고지를 점령한다고 부산을 떨 때 선생은 사각 빤쓰를 입고 왕십리 살곶이 다리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남의 집 장작을 수도 없이 패주곤 하였다. 세상을 모르는 이들은 나이를 생각해 이제 그만 싸움질을 그치라고 핀잔을 주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세상은 혼돈스러웠다. 군인들은 늘 총을 차고 다녔고 무림의 세계는 정의가 없었다. 어느 날 흑인의 강자 카라스키야가 무림을 뒤흔들 때 선생은 의연히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모두들 정신이 나갔다고 비아냥거렸지만 무림에도 법이 있다는 것을 선생은 알리고 싶었다. 쓰러지고 쓰러지고 또 쓰러진 선생의 얼굴은 피로 얼룩졌다. 무림에 법을 세워야 한다. 다시 한 번 쓰러졌다 일어난 선생은 흑인 무사의 배를 도끼 내리찍듯 승부를 결정지었다. 그가 왜 싸우는지 아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어떤 이는 파이트머니 때문이라고 어떤 이는 승리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게거품을 물었다. 강자는 늘 고독한 것, 약한 인간들은 모른다. 그가 떠났을 때 무림도 무너져 버렸다. 선생은 진정한 싸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을 뿐이다. 아아 선생은 속세를 등지고 압구정에 날던 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기인은 늘 이렇게 왔다가 사라지는 법. 선생의 덕을 흠모한 학생이 약전을 지어 남길 따름이다.

 

술꾼 내력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와 가짜

괴로웠다

2차에 갔다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었다

3차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체험적시론

 

 

나와 나 아닌 것의 싸움

 

 

 

 

시를 쓴다는 사실은 늘 나의 사유를 가로막는다. 거꾸로 말해도 괜찮다. 나의 사유가 늘 시를 가로막았다. 이 두 말은 거미줄처럼 엉켜 있다. 다시 분명하게 말하면 시는 늘 나를 괴롭힌다. 무수한 인상에 대한 메모들이 머릿속을 흘러간다. 스스로에게 약속한 바가 있다. 번뜩이는 인상을 메모하지는 않겠다. 그러한 인상이 시가 되는 것이 나는 싫다. 차라리 그 인상 중 하나를 악랄하게 물어뜯는 것으로 시를 완성하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다. 절망에 빠질 때가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좋은 시를 쓴 뒤에 항상 그랬다. 이제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라는 생각. 다시는 좋은 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괴로움에 몸을 떨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해결책은 둘 중 하나다. 늘 조바심을 내거나 내팽겨쳐두는 것. 어느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나다. 시를 쓰면서 특별한 시론을 가져본 바 없다. 창피하기도 하지만 더러 잘 했다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시에 대한 내 집약적 인상은 각 시집 시인의 말에 옮겨놓았다. 다른 시인들의 시집을 볼 때 시인의 말을 유심히 읽는 것은 그러한 내 개인적 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첫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의 자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읽는다. 눈 맞고 서 있을 정갈한 갈매나무를 나도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타샤는 끝내 퍼붓는 눈 속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당나귀는 술에 취해 늙어갔다. 당나귀 등짝같이 부드럽고 즐거운 시간은 다 지나갔다. 시는 내게 우울한 낡은 집이며 동시에 숨은 神 이다. 내 묘비명을 미리 써놓는다. “숨은 神을 찾다 죽다”

낭만적이고 비감한 저 어조야말로 시에 대한 젊은 날의 내 초상이다. 내 시의 거개가 슬픔 쪽으로 기우는 것은 내 시가 결핍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어린 날의 불우야말로 내 시의 젖꼭지이다. 백석과 박용래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기실 나는 그들의 시에서 개결한 시정신을 배웠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나는 시란 환상이라는 말도 들었고, 시란 철저히 현실에 복무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지만 이토록 자기 우수를 간직한 채 시를 쓰는 시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늘 감동했다. 자서에 쓴 것처럼 시는 우울한 내 자신을 확인하는 낡은 집이며 동시에 내 유일을 증명하는 실체였다.

두 번 째 시집의 시인의 말을 나는 짧게 썼다.

사람이 나를 이끈다. 허무가 나를 이끈다.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 즈음 어떤 허무의식이 아주 짙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허무의 그림자를 밀어내면서도 그 허무가 내 안에 깃들었을 때의 안온함을 잊을 수 없었다. “동강 낮은 물에서 낯선 밤을 지새우고/ 호이호이 높고도 괴이한 소리 들으며/ 새벽 강을 빠져나왔다/ 언제나 뒤를 따르던 한 마리 삵이/ 허무를 부풀릴 따름이라고/ 모든 낯선 풍경을 거부했다”(「진달래 장의사」에서). 그랬다. 끝없이 허무를 부풀리는 그 무언가가 나를 따라다녔다.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느낌이었다. 차라리 허무가 이끄는 곳으로 가보는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죽음, 혹은 죽음에 가까운 삶, 순간의 지혜 혹은 번뜩임이 허무 속에 내가 마주한 관념이고 실체였다. 백년 동안 카페 보들레르에서 술을 마시며 한 시절을 지냈다.

주막에서 보내는 날들이 저물어간다

가물가물한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다른 지옥으로 방랑을 떠날 것이다

나 아닌 다른 神을 만나고 싶다

반갑고 슬프고 지랄 같은 눈발 속에서

불온한 나의 생각은 용서 받을 수 있나

용서 받을 필요는 있나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시라

 

세 번째 시집의 시인의 말을 이렇게 썼다. 허무의 한 시절을 지나고 이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두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일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스스로 나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아닌 가장 값진 것을 찾는 여행은 가능한가? 불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의 길이란 결국 나와 나 아닌 것의 싸움,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투신, 무궁한 연민이 뒤엉켜져 있다고 믿는다. 나의 시가 그렇다는 말이다. ‘죽음이 신이라고 믿고 살아온’ 한심한 내 삶을 돌이켜 본다. 내게 시는 여기에서 멀지 않다. 이것이 시에 대한 내 단상이다.

 

 

 

우대식 시인을 주목한다___전해수

애굽을 넘어 나에게 이르는 길

──다시 읽는 우대식의 시세계

전해수

 

구원의 길이 없는 곳을 이르는 ‘애굽’은 출애굽을 상정하며 구원을 향한 ‘길 떠남’을 전제한다. 애굽이 ‘검은 땅’을 지칭하는 것은 그러므로 출애굽에 이르러 미혹에서 탈출하여 세상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다. 물론 단언컨대 나도 우대식 시인도 종교적 개념의 ‘애굽’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며, 다만 ‘애굽’으로 지칭될 수도 있는 지난한 삶의 모습과 과거 시간 속에 구원을 믿을 수 없었던 고독한 자아의 빈약하나 고집스러운 믿음을 반영하는 ‘애굽’을 통해 ‘시인’과 ‘시詩’와 ‘신神’을 과연 한통속으로 묶어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애굽’은 진정한 나를 찾기 이전의 혼돈과 고난에 그 맥락이 있다.

 

이런 사족이 이 글의 서두에 쓰인 이유는 10편의 시와 함께 실린 우대식의 산문이 시인의 시세계를 규명하는 데에 적잖은 실마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바로 시인의 저간의 시작詩作 행보가 ‘체험적시론’으로 규결된다는 사실을 시인의 산문은 쉽게 알려주고 있다. 산문에서 시인은 그간 발표한 세 권의 시집을 차례로 언급하면서 각 시집의 첫 장에 쓴 ‘자서’가 지니는 의미를 진솔하게 토로한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시집 첫 장의 자서는 시인의 시작 태도나 시론에 다름 아닌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특히 주목된다. 그는 시인으로 살아온 삶의 육중한 무게와 유년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적 궤적의 일련이 바로 “체험”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스스로 다짐한, “번뜩이는 인생을 절대로 메모하지는 않겠”다는 강한 내적 각오는 우대식 시인에게 있어 시란 최소한 “번뜩이는” 구절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들어진 기교가 아니라, “우울한 내 자신을 확인하는 낡은 집이며 동시에 내 유일을 증명하는 실체”로써 인식되는 어떤 자리이자 존재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스스로 결핍의 시간으로 여기고 있는 불우했던 어린 날들과, 시가 신神이고 신神이 자신이며 자신이 곧 시詩이기도 했던 온전히 그 자체로 ‘애굽’의 땅이라 말할 수 있을 고독했던 과거 시간 속 ‘자신’이야말로 유일하게 ‘허무’를 아는 신神이라 시인 스스로 믿기도 했던 것이다.

 

이 점은 어떤 경지를 연상하게 한다. 누군들 시와 신과 나를 동류에 둘 수 있단 말인가. 시인이 시집의 자서에 묘비명을 적어 둔 점, 그 묘비명의 내용이 “숨은 신神을 찾다 죽다”로 요약된 것은 “허무가 이끄는 곳으로 갈 것”이라는 시인의 지향점과 함께, 바로 시인이 겪은 과거를 답보한 현재와 미래의 시야말로 신의 실체이며 시인 자신을 향한 다짐을 보여준다.

 

시인에게 시는 바로 이곳에 머문다. “허무”가 신이며 신이 곧 ‘나’이기도 한, 나이면서 내가(신이) 아닌 것으로의 열망, 그것이야말로 “결국 나와 나 아닌 것의 싸움,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투신, 무궁한 연민이 뒤엉켜져 있는” “불온한 생각”의 갈피가 열린 바로 ‘나 자신’인 탓에, 내가 곧 ‘시’라는 것, 신神일 수 있다는 것은 시인이 지향하는 온전한 ‘체험’의 시가 바로 이러한 자아의 발견 혹은 시의 궁극의 도달점에 기꺼이 존재하고 있는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기에 가능한 생각인 것이다. 시인이 밝히고 있는 체험의 중심에 그의 과거 시간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시간의 역사 속에 우대식 시의 자리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오리五里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香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오리五里」 전문

첫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에 수록된 위 시는 나를 존재하게 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매양 오지 않을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자식의 간절한 마음결을 담고 있어 가슴께가 시큰해온다. 일찍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읜 시인의 정서적 상실이 “오리五里”의 거리감으로 제시되어 있다. 실상 오리五里는 십리十里에 비하면 먼 거리가 아니며, 어찌 보면 금세 가 닿을 것만 같은 심중에 둔, 가까운 그러나 가깝지만은 않은 거리이며, 이 멀지만 멀지않은 거리감이야말로 어머니가 나를 찾아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하는 이중적 의미로서의 ‘오리’인 것이다. 요컨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의 열망이 “오리”라는 단어에 애절하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향이 박힌 성황당 나무 등걸”은 죽은 어머니와 나와의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을 인식한 장소로써 정서적 그리움의 정도를 깊숙이 전달하고 있으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지로 인식된다. “성황당 나무 등걸” “그곳에서 다시 오리”를 더 가면 어머니가 ‘다시 올’것 같다는 기시감은 어린 화자의 깊은 그리움의 애잔한 마음이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의 반복적 다짐 혹은 열망으로 그 간절함을 배가시키고 있다. 하여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얀”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하는 어린아이의 상상계가 표출되어 더욱 슬픈 현실의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것도 나를 지우거나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붉은 숯불이 잦아든다

국경 아래 뜬 달이 조금씩 기울면서

그 아래를 걷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환상 속의 당신

그대 어깨가 붉어진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설산 국경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던 한 생生이 있다

──「신폭神瀑에 들다」 부분

또한 우대식 시인에게 여행 체험은 과거를 다시 만나게 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고 있다. 시인에게 여행은 과거와의 만남이며 과거 시간은 현재의 거울이 된다. 세 번째 시집 『설산국경』에 수록된 위 시는 “윈난성 신폭 아래/ 객잔에” 든 날의 기억으로 시작된다. “신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야크의 모습에 자신이 투영되기도 하고 설산의 모습 속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는 이 “한 생”에 대한 애끓는 감정을 담아내기도 하며 “(윈난성)신폭神瀑에 들”고 있는 체험의 순간을 과거와 현재를 잇는 “환상 속의” 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속에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이 보이기도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부처의 비할 바 없는 지고의 깨달음을 되짚으며 “설산 국경”의 경계에서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는 신폭의 시간을 “한 생”으로 넘나드는 환각에 가 닿는다.

 

우대식 시인의 시간 여행은 이렇듯 현재에서 시작했지만 과거를 오가며 다시 현재에 이르고 곧 미래로 이끌 생의 모든 것으로서의 ‘과거’에 대한 깨달음에 이른다. 그에게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에 머문 시간이자 미래의 여행지, 시적 공간의 기원인 것이다.

서울 달동네

행당동 수도국산

어둠이 하냥 푸르른

10월의 밤길

저녁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남자 아이들은 간혹 여자 아이들을

어둠 속에서 놀래키고

그러면 더 따뜻하게 모여 체온을 나누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다

하나님이 있었다

나는 무서워져

집으로 뛰어갔다

──「유년시幼年時」 전문

요컨대 정작 시인이 두려운 건 미래를 관장하는 ‘신神’이 아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신은 나를 제외한 “그들의 하나님”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미래를 믿지 않듯이, 미래에 올 구원을 믿지 않으며, 신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에게 신은 “그들의 신”으로서만 존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되짚어보면, 과거의 교회는 “서울 달동네” 아이들에겐 구원처럼 다가온 장소이기도 했다. 예배가 끝나면 가난한 아이들에게 빵과 과자처럼 일용할 양식이 생기곤 했던 구원의 장소가 ‘예배당’이었으며, 더구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들이 자연스레 친밀해지던 장소가 ‘교회’ 아니던가.

그러나 시인의 유년시간은 핍진한 현실의 구원을 예정한 ‘척’하는 신의 존재야말로 결국 ‘두려움’자체였을 것이다. 최초로 신을 만난 곳에 신은 내게 없었고 그들에게만 존재한다는 외톨이 체험을 갖게 된 것은 혼자 “집으로 뛰어가”던 기억 속의 두려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혼자였던 나에게 신을 믿는 “그들의 하나님”은 ‘그곳’에서 다만, “그들”과 함께 있었을 뿐이다.

 

높은 나무에 올라

서쪽,

노을을 향해 우는 원숭이처럼

시퍼런 인광燐光을 다독이며

어둠의 이불을 덮고 누워 다시

한밤을 생각한다

꽃들이 무더기로 피다가 진

먼 바다 위로

혼령의 울음이 떠돌 때

숨을 곳도 없는 죄지은 사람들이

개펄에 머리를 박고 기도한다

빼앗긴 영토,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전선을 밤새 밀어 올린다

바빌론의 포로들이 일터로 돌아가는 아침이면

다시 그들의 땅,

영토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이들은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빌론 물가에서」 부분

 

하여, “영토”는 그에게 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듯하다. “빼앗긴 영토” 바빌론 물가에서 “어둠의 이불을 덮고 누워” 겪어내야 할 “한밤”의 고독한 무거움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던 자에게 있어 한 평 “영토”는 “영혼”과도 같을 것이다. 영토를 빼앗긴 자에게 신은 있나. “영혼”과도 같은 영토를 빼앗겼을 것이므로 “숨을 곳도 없는” 이들이 “개펄에 머리를 박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울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신이 해야 할 역할(?)은 척박한 현실의 구원이므로 “영토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이들” 편에 선 ‘그들의 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영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빌론의 포로”처럼, “노을을 향해 우는 원숭이처럼”, 나의(혹은 나와 같은 입장의 “죄지은 사람들”의) “땅”은 해가 지는 “서쪽”의 “시퍼런 인광”일 뿐임을 시인은 알고 있다. 시인의 “한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전선을 밤새 밀어 올리”는 것으로 새 기약을 한다. 그러나 그 기약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진짜와 가짜

괴로웠다

2차에 갔다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었다

3차에 가기가 두려워졌다

──「술꾼 내력」 전문

시인에게 ‘두려움’은 절망과 결핍 다음의 간곡한 언어로 자리한다. 그러나 시인이 정말 두려운 것은 “진짜와 가짜”가 뒤엉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둘은 “뒤바뀌”기도 한다. 이것은 앞날의 기약을 믿을 수 없다는 깨달음과도 통한다. 술을 마시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또 마신 술은 점점 “가짜와 진짜”가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또 다른 ‘두려움’을 준다. 이것은 예정된 미래(“3차”)가 믿기 어려워진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한 마리 삵이 되어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이유는

어디 먼 해조음이 들려오는 탓이다

울지 말고 그만 잠들라는

그 어떤 먼 신호도

울음 소리였다는 것을 아는 때문이다

──「삵」 부분

두 번째 시집 『단검』에 실린 위 시는 네 발 달린 짐승 “삵”의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삵”은 고양이 과의 야생동물로 알려져 있다. 야생성이 강한 시인이 자신을 한 마리 “삵”으로 표현한 것은 과거 “발해만 앞바다”를 서성이는 것만 같은 (처지를 상실한) 자신을 투영해 본 모습일 터이다. “삵”의 존재는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옛 이미지와 상통한다.

왼손의 그늘,

지상에서 내 삶이란

당신이 만들어준 왼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

놀다가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일

코스모스처럼 내 등을 툭 한번 쳐보다가

돌아가는 당신의 늦은 귀가

그림자가 사라질 때

나의 연애는

파탄의 골목길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

──「왼손의 그늘」 부분

“용재 오닐의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당신의 오랜 귀가”란 무엇인가. “파탄의 골목길”로부터 서성인 나의 한 생이 “왼 손의 그늘에서 놀다 가는 일”이라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당신의 늦은 귀가”는 “가끔 당신이 그리워 우는” “내 등”을 “비올라 소리 같은 깊고 슬픈” “왼손의 그늘” 아래로 여기게 한 소외疏外에서 탄생한다. 이때에 “지상에서 내 삶”이란 “왼손의 그늘”에 놓인 자의 (제외된) 모습이 된다.

어떤 영혼이 다녀가는 소리

자꾸 다녀가는 소리

지상의 끝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장엄과 연민 앞에서

무서움이 몰려왔지만

결심했다

도망치지 않겠다

애굽을 넘어, 모래바다를 건너, 뻘밭을 기어

조금만 더,

턱까지 숨 닿는 소리

──「바빌론 물가에서」 부분

그러나 우대식 시인은 (이 모든 과거 시간을 지나) 마침내 “애굽을 넘어, 모래바다를 건너, 뻘밭을 기어” ‘나’에게로 이르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 길은 “턱까지 숨”이 차는 소리를 내며 “조금만 더” 나아가기를 북돋우는, 결코 “도망치”는 길이 아니라 “지상의 끝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기적 소리와도 같다. 시인은 이제 과거 시간 속 고독했던 “무서움”을 떨치고 “어떤 영혼이 다녀가는 소리”를 힘차게 내지를 것이다.

검은 땅 ‘애굽’을 넘어 그렇게 한 평 영토(시)를 얻은 시인이 온다. 조금 더 ‘생’의 가까이로 그가 오고 있다.

전해수 / 문학평론가. 1968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평론집 『목어와 낙타』, 저서 『1950년대 시와 전통주의』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