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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

낡고 지친 거리… ‘쓸모’ 다한 존재들의 ‘쓸쓸함’을 보다

장자이거나 나비이거나 2016. 3. 26. 23:23

낡고 지친 거리… ‘쓸모’ 다한 존재들의 ‘쓸쓸함’을 보다
 
▲  영화 ‘차이나타운’ 촬영지인 인천 동구 송림동 현대상가. 좁고 긴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뻗어 있는 이곳에는 빛이 들어오지 않아 대낮에도 가로등이 켜져 있다. 이런 분위기는 비정한 암흑세계를 그린 영화의 느낌과 잘 어우러진다. 곽성호 기자 tray92@

(31) 영화 ‘차이나타운’ 촬영지… 인천 송월시장·송림동 현대상가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 처음 방문했던 건 아마 이십 대 후반 언제쯤이었을 거다. 정확한 시기가 아니라 언제쯤이라고밖에 말을 할 수 없는 건 아무리 돌이켜봐도 명쾌한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인데, 원래 데뷔를 꿈꾸는 감독 지망생의 일상이라는 게 그다지 명쾌할 수가 없다.

이 시기의 감독 지망생들은 아무런 기약도 보장도 없는 상태로 주변의 만류와 함께 자기 재능에 대한 의심들을 얻어맞는다. 근근이 작업한 시나리오나 단편 영화들을 공모전에 들이밀며 ‘맨땅에 헤딩’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작품은 공모전 문턱도 넘지 못하고 예심에서 탈락을 반복한다. 좌절할 새도 없이 일 년에 수십 번씩 자신의 포트폴리오 DVD를 택배로 보내거나 제본한 시나리오를 들고 직접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그런 시간이 몇 년 혹은 십수 년씩 흘러가 버리는데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인천의 한 영상기관에서 주최하는 공모전 마감 날, 전날 밤까지 수정한 시나리오를 들고 부랴부랴 인천행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예상대로 공모전 접수창구 앞에는 나처럼 밤을 새우고 벌건 눈을 한 채 자신의 시나리오들을 꽁꽁 싸맨 사람들이 가득했다. 자격지심 때문인지 왠지 퉁명스럽게 보이는 접수원이 기계적으로 시나리오를 받아들고 “접수됐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순간 괜스레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허무함은 ‘어차피 또 안 될 거야’ 같은 패배감 때문일 수도 있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각고의 노력 끝에 내놓은 ‘내 새끼’를 대수롭지 않게 보는 남들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분명한 건 십 년 가까이 마주하는 이 기분이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다는 거다.

접수처에서 나와 허기라도 채울 겸 근처 차이나타운을 찾았다. 골목 끝 적당한 식당에 들어갔는데 평일 오후여서 그런지 손님이 나 하나뿐이었다. 짬뽕 한 그릇을 주문하자 화교 아주머니가 익숙한 북경어로 주방에 주문을 넣곤 원래 있던 빈 테이블로 돌아가 앉았다. 그녀는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별 표정 없는 얼굴로 TV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TV 속엔 삼국지였던가, 수호지였던가 하는 중국 사극이 한국어로 더빙된 채 방송되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작은 이과두주 한 병을 조금씩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기분 탓인지, 직업병 탓인지 내겐 그 무료한 풍경이 꽤 인상에 남았던 모양이다.

타국에 와서 모국의 드라마를 다른 언어로 보고 듣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영화 ‘차이나타운’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장면은 후에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몇몇 정서로 그려졌다.

▲  영화의 주 무대인 중구 송월시장 앞 은하수스튜디오(오른쪽). 이 사진관에서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며 인물 간 갈등이 고조된다. 한준희 감독은 “이 늙고 지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은 극 중 ‘엄마’(김혜수)와 닮아 있다”고 말했다. 왼쪽 사진은 송림동 현대상가 외관. 송월시장 일대와 현대상가는 곧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다.

‘차이나타운’은 사실 인천 차이나타운이라는 공간으로부터 출발한 이야기는 아니다. 서로 다른 두 여자가 일반적이진 않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에서 생존하고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게 최초의 구상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영화사에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은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영화의 틀을 정하며 자연스레 인천 차이나타운을 영화의 공간으로 설정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광지에 가까운 차이나타운을 있는 그대로 구현한 것이 아닌, 영화적 역설과 허용 가능한 상상 속 ‘이면’의 차이나타운을 만들고자 했다. 냉소적이고 기묘하지만 분명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리고 그 기저에는 쓸쓸함이 깔려 있는 차이나타운을….

영화의 주 무대이자 가장 많은 사건이 벌어지는 사진관은 차이나타운 지척의 송월시장 앞에 있는 실제 사진관을 섭외해 촬영했다. ‘차이나타운’ 외에도 많은 한국 영화에 등장한 송월시장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상업의 중심에서 재개발을 기다리는 처지로 변모한 곳이다. 이 늙고 지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은 덤덤하게 그 끝을 기다린다는 기분을 주는데, 촬영하는 내내 극 중 ‘엄마’(김혜수)와 닮아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대사처럼 사람이고 건물이고 ‘쓸모없어짐’은 서글픈 마지막을 담보 삼는다.

사진관의 내부는 지인에게서 들었던 ‘화교의 삼도(三刀)’를 콘셉트 삼아 세트장 내에 따로 공간을 만들었다. 세계 어느 나라 차이나타운에 가도 초창기 거리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가게들이 있는데, 이를 보통 세 종류로 구분한다고 한다. 식칼을 사용하는 중식당과 가위를 사용하는 이발관, 재단 가위를 사용하는 세탁소까지. 모두 일종의 칼을 잡는 일이라서 삼도라 칭한다 들었는데, 이민 초기 머나먼 타국에서 맨주먹으로 시작하는 화교들에겐 고단함과 희망이 함께 묻어 있는 공간이었을 게다. 미술감독과의 오랜 논의 끝에 이미 낡고 사용되지 않는 중식당, 이발관, 세탁소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집으로 재탄생했다. 동시에 이 주거공간에서 범죄가 도모되고 이루어지는 설정이 더해지며 더욱 복잡한 정서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됐다.

사진관만큼이나 중요했던 공간이자 마지막까지 로케이션 헌팅(장소 섭외)에 애를 먹었던 공간은 엄마가 어린 일영(김고은)에게 새로운 세계의 룰을 일러주는 좁은 골목길이었다. 이 장면은 연출, 제작팀 스태프들의 부단한 노력(동인천에 존재하는 모든 골목길을 뒤지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에 인천 동구 송림동 현대상가에서 찍게 됐다. 2층 구조인 현대상가는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좁고 긴 골목들이 바둑판처럼 뻗어 있는데 대낮에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아 마치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상가 군데군데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로등이 켜져 있다. 2층은 1층 개인 집들을 통해서만 연결돼 있는 특이한 구조인데 이 동네 자체가 예전 송림산에 터를 잡을 때 빈 땅에 산 모양대로 주거지들을 지어 남의 집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갈 수 있는 가옥이 많았다는 풍문이 있다.

여러모로 묘하고도 재밌는 공간인지라 누구라도 이곳을 처음 방문한다면 그 독특한 분위기에 넋을 잃게 되지 않을까 싶지만, 아쉽게도 이곳 역시 송월시장 일대와 마찬가지로 곧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이다.

종반의 추격전을 촬영했던 인천 남항부두 또한 잊을 수 없는 촬영지이다. 추격전은 와이어, 액션, 스턴트까지 두루 포함된 난도 높은 촬영이었다. 게다가 3일간 모두 찍어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어서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정확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김고은은 무릎에 찜질을 해가며 수십 번 달리기를 반복했고, 고경표는 수심도 깊지 않은 바닷물에 대역 없이 뛰어들었다. 의료진과 안전장치가 모두 준비돼 있었지만 제작진 모두가 긴장을 유지한 채 촬영을 이어갔다.

다행히 모든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노력으로 촬영은 무사히 끝났고, 나 또한 정신없이 집중해 모니터만 보고 있던 3일이 지나고서야 해 뜨는 남항의 아침을 볼 수 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모두 파랗게 물들어 있는 잠시간의 ‘매직아워’는 컨테이너와 배들 뒤에 숨어 있는 수평선까지도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모든 촬영이 끝난 것도 아니고 작품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 수도 없는 시기였지만 아주 잠깐, 그 찰나의 순간만은 영화가 직업이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제출하고 짬뽕을 먹었던 그날 이후 ‘차이나타운’을 만들기 전까지 시간을 내서 따로 인천을 방문한 적은 없다. 예상대로 제출했던 시나리오는 또다시 탈락했고 명쾌하지 않은 일상이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행운과 부침을 오가는 시간들을 몇 년 더 겪고 나서 데뷔란 걸 하게 됐다. 데뷔만 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란 어리석은 착각과는 달리 무수한 시행착오와 선택을 지나서야 완성된 영화를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었다.

영화 개봉과 홍보활동, 몇몇 해외영화제 방문까지 정신없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얼마 전에 하루 날을 잡아 홀로 차이나타운에 가봤다. 자연스레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 중식당을 찾아봤는데 너무 오래된 기억인지, 아니면 이미 사라지고 만 건지 결국 찾진 못했다. 몇 번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적당한 다른 식당에 가려다 발길을 돌려 차이나타운을 나왔다.

한준희 영화감독